공교롭게도 이 땅의 겨울은 당락(當落)과 함께 시작되는 것같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불안과 초조함으로 시험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던 겨울을 수없이 맞이했더랬다.
다행스럽게도 불합격보다는 합격의 소식을 더 많이 접했던 것 같은데, 이는 남들보다 시험운이 좋았다거나 실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목표를
낮춘 덕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 실력보다 한 단계 높여 도전해야 발전이 있건만 내 실력만큼 혹은 그보다 낮게 목표를
설정하고 얻은 결과이니 그다지 내세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도전'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만큼은 무참해지곤 한다.
내
자신은 도전 앞에서 한없이 몸을 사리고 타협한 주제에 다른 사람들 특히 손아랫 사람들 앞에서는 '도전하라!'고 목청을 돋군다.
정말이지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도전의 실패에 따른 상처는 오롯이 상대방의 몫이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만용'이 아닐까 싶다.
이루지 못한 욕망이나 감추어진 욕망은 그대로 타인에게 투영되는 법이다.
학벌에 대한 좌절이 심한 부모일수록 자녀에게 학벌을 강조한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것이다."라는 한마디를 덧붙인 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클수록 도전을 회피하게 되는데 이런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도전을 부추긴다. 해결되지 않은 도전에 대한 미완의
욕망이 내재화된 결과다.
요즘 흔들리는 청춘을 위로하는 에세이가 대세인가 보다.
명망있는 중년들의 말 한마디에 위로받을 청춘들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일 터.
그러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땅의 중년 역시 막막하고 두렵고 흔들리기는 매한가지라는 걸 말이다.
고민에 대한 낯섦만 줄어들었을 뿐 고민의 무게와 방향은 변함이 없다. 함께 고민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또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할 길을 걸어가는 것은 청년이나 중년이나 노년이나 똑같지 않을까.
누군가의 삶에 이정표가 된다는 건 영광스러우면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말을 아껴야 하리라. 그게 정답이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졸인 우리 부모님들이 명문대 출신 교수님들보다 인생을 더 잘 견뎌내신 이들일지도 모른다.
학연과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한국 사회에서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아픈 줄도 모르고 맨손으로 운명의 돌을 내리 친 사람들이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젊다고 더 아픈 것도 아니고 나이 들었다고 덜 아픈 것도 아니다. 도전과 실패가 젊음의 전유물도
아니거니와 위로와 상담이 중년의 의무나 권리도 아니다.
물음표로 이어지던 삶이 중년에 접어 들어 마침표와 느낌표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도 결코 아니다.
우리 삶이 그렇게 단순하다면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문제들이 순차적으로 해결이 된다면 애당초 종교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고민과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데 전지전능한 신에게 의탁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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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아프니까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