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편혜영은 <토끼의 묘>로 2009년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토끼의 묘>는 파견근무자인 '그'의 일상을 통해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그'는 어느 지방도시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된다. 기간은 6개월이다.

6개월 동안만 머물다 떠날 것이므로 '그'는 도시에 대해 관심도 없고 사무실의 동료들과도 '애써' 관계를 맺으려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공원에서 버려진 토끼를 발견하곤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내 곧 후회하게 되지만.

 

단 6개월만이라는 조건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면서 어쩔 수 없이 토끼를 키우는 '그'는 서서히 토끼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다.

 

‘개나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경우가 없어 애완동물이나 반려동물이라고 부르기 망설여지고’, ‘사료와 양육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소나 돼지 취급을 하는 게 적당했지만 고기를 삶아 먹기 꺼려진다는 점에서 소나 돼지보다 못하다’. 그런가하면 ‘무표정하게 누군가를 오랫동안 응시하다가는 결국 미움을 사고 만다는 걸 알려주’며 교훈을 준다.

 

더도 덜도 아닌, 인간 그 자체다.

 

 

<토끼의 묘>는 소외된 현대인을 토끼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품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사무실과 독신자 아파트 그리고 야외 공원은 '묘지'라고 볼 수 있다. 공적인 관계만 존재하는 사무실 풍경이며 토끼장을 방불케하는 독신자 아파트 그리고 싫증이 난 애완동물을 몰래 갔다 버리는 공원...

 

작가 편혜영은 도시화와 사무자동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점점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인간-인간, 인간-동물 간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다만, 회복 가능성을 열어두는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더욱더 자기자신 속으로 깊숙히 침잠해 들어가는 마무리 장면이 가히 충격적이다.

 

 

사무실에 있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에 다섯번씩 벌떡 일어섰다.

처음 일어섰을 때는 큰 소리로 웃으며 괜히 화장실에 갔고

두 번째 일어섰을 때는 멋쩍은 듯 살짝 웃으며 물을 마시러 갔다.

세 번째 벌떡 일어섰을 때는 자기 머리통을 때렸다.

네 번째 일어섰을 때는 울고 싶어졌고

다섯번째 일어섰을 때는 조금 울었다.

 

                                                                                -편혜영, <토끼의 묘> 中-

 

<크림색 소파의 방>은 중소 도시에서의 곤궁한 삶을 마치고 대도시(서울)로 입성하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삿짐 차량을 먼저 보낸 후, 젖먹이 어린 자식과 젊은 아내를 태우고 서울로 향한다. 상식적으로 대도시의 새집으로 이사가는 것이니 당연히 흥겹고 희망 가득한 분위기여야 하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다.

 

 

불길한 예감은 어긋남이 없듯, 도중에 차가 고장나고 만다. 게다가 장대같은 비까지 쏟아지고...

간판을 보고 찾아들어간 주유소는 더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량 청년들을 만나게 되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차량수리를 할 줄 아는 듯 따라나선 불량청년은 본넷을 열어 뭔가 작업을 하는 듯하지만 그의 시선은 차안에서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아내에게 쏠려있다. 주인공 '그'는 기분이 상하면서 그 모든 불유쾌한 상황들을 모두 칠칠한 못한 아내탓으로 돌려버린다. 어쭙잖게 경찰에 신고를 하고 서울로 향하는가 싶더니 도중에 차량이 또 서버린다. 어쩔 수 없이 보험회사에 연락을 취해보지만 이미 도착할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험회사 직원은 전화연결도 되지 않은 채, 나타날 기미조차 없다. 이런 초조한 가운데에서도 이미 새집에 도착한 이삿집 인부들의 전화는 계속 걸려온다. 거실 크기에 맞지 않은 크림색 소파가 문제였다.

 

 

새집 거실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는 소파는 곧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주인공의 위치를 말해준다.

 

작품은 상당히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신고에 대한 보복으로 주인공을 따라온 불량청년들에게 구타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홍콩 오우삼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슬로우 비디오로 흐물흐물 움직이는 주먹질과 발길질 그리고 고통스럽게 이그러지는 표정들과 둥둥 떠다니는 땀방울과 빗방울들......

 

나약한 현대인의 초상이다.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추리소설집을 갖고 있단다.

하여, 일찍부터 독서목록에 담겨 있던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이라는 책을 서둘러 읽게 되었다.

 

모두 9편이 실려 있었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작품인 <저수지>와 <아오이 가든>까지만 읽고 책을 덮었다.

 

시체와 꾸물거리는 구더기들 그리고 끊임없이 언급되는 역한 냄새들로 인해 시각과 후각은 물론이고 촉각마저 마비될 지경이다.

독특하고 새롭다.

그러나 상당히 고통스럽다.

 

공포 스릴러물 매니아가 아니라면 섣불리 읽기를 시도해서는 결코 안되는 책이다.

 

다만,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랜드-이광호>라는 제목으로 실린 작품해설은 읽어 볼만했다. 작가의 신선한 시도와 독특한 상상력의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편혜영 소설의 서술자는 작중 인물의 정서적 개입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동일시의 가능성과도 거리를 두는 냉혹하고 무표정한 태도를 취한다. 이 하드보일드한 문체의 효과는 무엇인가? 탈내면성의 문법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간 주체의 시선의 우월적 위치 자첼르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휴먼 스토리도 배제한 채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시체의 일부로 되돌리게 한다.

(중략......)

편혜영 소설에서 인간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라는 낯익은 명제를 거슬러 다시, '인간은 동물이며 더 나아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명제로 되돌아간다.

(......)

대중화하는 하위 대중문화의 영역을 '억압적 탈승화'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 편혜영의 소설 미학이 향하는 지점은 (...) 엽기적 대중문화의 시각적 쾌락 효과 혹은 도착의 기호학 너머의 세계이다. 편혜영은 시체를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인간 존재 자체를 '시체되기'의 국면으로 끌고 나간다. 이 '시체 되기' '동물 되기' '벌레 되기'의 상상력은, 인간 존재의 주체화 과정을 해체하고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주요한 것은 시각적인 코드에서의 시체의 발견과 전시가 아니라, '시체 되기'를 통해 경험되는 '다른 삶'이다. 이런 맥락에서 편혜영의 소설 미학이 향하는 지점은 탈억압적인 미학적 탈승화의 지점이다.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랜드-이광호> 中-

 

 

작품 해설자의 말처럼 불편하고 엽기적인 작품 속 장면들 속에는 인간 진화의 결과인 현대 문명이 자랑이 아닌 '악몽'이라는 은유가 내포되어 있으며, 작가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기존의 현대 소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체험을 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면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싶다. 단 두 편을 읽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말로 형언할 수조차 없는 체험을 했으니 말이다.

 

 

많은 고민과 용기 속에서 탄생했을 작가의 작품들을 끝까지 읽지 못해서 매우 안타깝다. 나의 독서력이 이처럼 전위적이고 독특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이건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독자인 나의 개인적 성향일 뿐, 작품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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