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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 ㅣ 본격추리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소영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5월
평점 :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는 본명이 히라이 타로(平井太郞)로 일찍부터 에드가와 앨런 포의 작품을 즐겨 읽고 좋아한 나머지 에드가와 앨런 포의 발음을 본 떠 에도가와 란포라는 필명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인 1920~1930년대에 주로 발표된 그의 작품들은 이제는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와 일본인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가치까지 담고 있다.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란포의 작품에는 전보와 기차가 수시로 등장하고 전화는 최첨단 시설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무려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랑, 돈, 질투, 원한 등등 범죄의 동기면에서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과정 역시 CC화면 등 최첨단 방식이 새롭게 도입되긴 했지만 부검 지문감식 등 그 당시 수사에 주로 사용되었던 방식이 지금도 그대도 쓰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심리(마음)'을 읽어내는 수사관의 '직관'이야말로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2전짜리 동전>은 그 당시 일본에서 통용되던 두께 4mm 직경 3cm 정도 크기의 2전짜리 동전을 두쪽으로 쪼개고 그 사이에 암호를 기록한 종이를 숨긴다는 설정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일본어를 근간으로 한 암호 해독 부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발상 자체는 기발했다. 그리고 진짜와 흡사한 가짜 돈을 만들어 문방구에서 판매한다는 사실과 훔친 돈을 문방구 납품용 가짜 돈과 바꿔치기 해서 안전(?)하게 보관한다는 아이디어 또한 100년이라는 시차를 거뜬히 뛰어넘어 21세기초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
<심리실험>은 피의자에게 단어를 말해주고 떠오르는 단어를 피의자가 말하도록 한 후, 단어와 답변할 때까지의 시간 간격등을 총체적으로 분석하여 사건과의 연관성을 유추해내는 연상기법이 등장하는데 거짓말 탐지기의 고전판이 아닌가 싶다.
에도가와 란포가 만들어낸 탐정 아케치 코고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D언덕의 살인사건>과 <석류>는 인간의 사디즘적 성적 취향을 모티프로 삼은 빼어난 수작이다.
이 밖에도 <몽유병자의 죽음>과 <두 폐인> 등은 몽유병 환자 혹은 가짜 몽유병 환자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몽유병자의 죽음>은 몽유병을 앓고 있는 아들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느날 밤 아버지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뜰에서 죽은 사체로 발견되자 아들은 자신이 꿈속에서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닌가 싶어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도망가던 중 허망하게 죽어버린다는 내용인데, 아버지의 사인인 밝혀졌을 때의 그 허망감이라니......
그리고 멀쩡한 사람을 그것도 친한 친구를 몽유병 환자로 만든 후, 하숙집 주인을 죽인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두 폐인>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주한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몽유병 환자가 등장하는 위와 같은 작품들은 조금만 더 섬세하게 구성을 다듬고 신중하게 표현을 선택한다면 훨씬 더 뛰어난 작품으로 재탄생하지 않을까 싶다. 굳이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순수소설의 모티브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한번 굳게 믿어 버리면 설령 그 믿음이 현실과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 두뇌의 착각을 소름끼치도록 표현해 낸 <무서운 착오>도 좋았고, 숨을 멈추게 만드는 마지막 반전이 돋보이는 <석류>도 뛰어난 작품이다.
<석류>는 정통추리소설의 기본 트릭 중에 하나인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인물바꿔치기'수법으로 완전 범죄를 달성한 가해자가 20년이나 지난 어느날 그 당시 사건을 추리했던 형사 앞에서 자백과 동시에 깊은 계곡물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는 아마도 서구 정통추리소설을 모방하며 발전하기 시작한 일본의 추리문학이 자결이나 자살을 미화하는 전통적 분위기를 녹여내면서 만들어낸 일본다운 마무리가 아닐까 싶다.
신경증과 의부증에 걸린 아내가 남편을 극도로 미워한 나머지 자살하면서 타살로 위장하여 남편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영수증 한 장>은 발상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았을 것 같다.
에도가와 란포는 자신이 밝혔듯이 장편보다는 단편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단편들은 영미의 정통추리소설의 기법과 구성을 상당히 많이 모방한 면이 없지 않고, 고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 중간 중간에 작가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어 설명하는 해설투 문체가 곳곳에 등장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고 결국 작품의 재미마저 반감시키는 단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점들이 일본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작가의 공로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1955년 에도가와 란포의 환갑을 맞이하여 조성된 '에도가와 란포상'은 일본에서는 이미 명실상부한 추리소설작가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들을 어렸을때부터 즐겨 읽으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완성해 냈으니 이 점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일본 추리소설 분야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위상과 영향력이 어느정도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작가의 작품들이 한국에서는 최근에서야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저, 과거 양국간의 역사적 문제가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이번에 도서출판 두드림에서 총47편의 단편들을 3권으로 나누어 출간했다고 하는데 1,2권은 본격추리물이고 3권은 '기괴환상'으로 나눠져 있단다. 본격추리는 1권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보았으니 기괴환상물로 묶여졌다는 3권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