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벚꽃지는 계절에 읽고 싶어 여러번 도서관을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이미 대출중이었다.
그렇게 한달 남짓 흘러갔나 보다.
여러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도서관에서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대출할 수 있었다. 우타노 쇼고의 작품은 <움직이는 집의 살인>이후 두번째다. <물만두의 추리책방> 리뷰을 읽지 않았더라도 시적인 제목에 이끌려 언젠가는 읽었을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기대하던 작품이었기에 단 이틀만에 다 읽어 버렸다. 주말 초저녁의 한가한 전철안에서 막바지로 향하는 작품 속 이야기를 쫓아가면서 나는 황당스러움과 함께 배신감마저 들었다. 작가에 대한 배신감인지 나 자신에 대한 배신감인지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감정으로 이미 읽은 페이지들을 더듬어 나갔다. 드물지만 간혹 일어나는 '작가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이따위 작품이 있을 수 있지!'
나의 '분노'와 '배신감'은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어느정도 가라앉았다. 독자로서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 작가의 원래 의도가 그러했다는 점을 이해하고 나자, 작품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해서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대단하다! 놀랍다!'라는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작품은 2004년 출간되자 마자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르는 등 베스트셀러가 되었단다.
베스트셀러란 말 그대로 일정기간 동안 가장 잘 팔린 책으로 대중의 취향을 대변해 주지만, 그렇다고해서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베스트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베스트셀러는 어느정도 입소문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될 수있었던 이유도 아마 다음과 같은 입소문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냥 한번 직접 읽어봐!'
작품을 읽으면서 줄곧 상상해 왔던 등장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가에게 물으려고 작품을 샅샅히 뒤지지만... 이거 왠걸, 작가는 거짓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독자들이 오해할만한 흔적은 곳곳에 남겨두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작가는 바로 그 '오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해 즉 사실과는 다른 잘못된 '선입견'말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그리고 독자의 오해와 선입견도 함께 시작된다.
사정(射精)한 뒤에는 꼼짝도 하기 싫다.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밀려오는 졸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예전에 치과병원 대기실에 비치된 여성 주간지에서 '후희(後戱)없는 섹스는 디저트 없는 디너'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자들에게 그 얘기를 하면 대번에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일단 사정하고 나면 젖가슴 따윈 더 이상 주무르고 싶지 않다. 설령 상대가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 미국 가수)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남자라는 동물은 먼 옛날 에덴동산 시절부터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내가 이러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 막 정액을 방출하고 여자의 배 위에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기 때문이다.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p1 中-
주인공 나루세 마사토라의 첫등장은 이처럼 다소 퇴폐적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세리자와 기요시가 나를 선배하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내가 일곱 살 위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현재 도립 아오야마 고교에 다니고 있고, 나는 그 학교의 졸업생이다.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p22 中-
주인공과 함께 호라이 클럽의 범죄를 캐내는 파트너인 세리자와 기요시에 대한 설명이다.
기요시가 내게 멍한 시선을 보낸다. 구다카 아이코는 이 헬스클럽의 회원으로, 이 험상궂은 녀석이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는 연상의 여자다.
(......)
"난 지금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녀를 좋아하니까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거죠. 그래요, 그냥 좋아하고 걱정하는 것뿐이에요. 어떻게 해볼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런 애정도 불순하고 비윤리적인 건가요?"
기요시가 눈을 부라리며 대답을 강요한다.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
양갓집여자답다. 그 집안의 여자들은 3대째 세이신에 다니고 있다. 여기서 세이신은 미치코 황후가 다녔던 세이신 여학교를 말하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시로카네에 있다. 한쪽은 양갓집 아가씨들이 다니는 최고의 여학교 출신이고, 한족은 도립 고교 재학생. 기요시에게는 너무 과분한 상대다.
(......)
기요시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아이코는 더욱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한다. 기요시는 억지로 꽃다발을 쥐어주며 묻는다.
"더위 먹은 거예요? 몸은 좀 어때요?"
"그런 거 아녜요."
"이렇게 밖에 나오는 거 보니까 아주 심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자리에 드러누웠으면 어떡하나 하고 줄곧 걱정했는데."
"그런 거 이니라니까요. 제가 아니라 가족 중 한 명이 좀......"
아이코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간병?"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아, 그래요?"
"돌아가셨어요"
"넷?"
나와 기요시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이코는 고개를 숙인 채 갈아진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래로 향한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글썽거린다.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p27~28 中-
고등학생 기요시가 짝사랑하고 있는 연상의 여인 구다카 아이코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동안 헬스클럽에 못 나온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요시와 주인공인 나루세 마사토라가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코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된다.
자, 그럼 이쯤해서 머리속에 주요 등장 인물들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그려질 것이다. 세명의 나이를 대충 짐작해 보면, 기요시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10대후반일 것이고, 그보다 6살 많은 주인공 '나'는 20대 중반일것이며, 명문 세이신 여학교를 졸업한 구다카 아이코의 나이는 아마도 이 둘 나이의 중간 어디쯤이 아닐까.
짐작이 언제나 사실과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무의식적으로 짐작들을 기정사실화 시켜버린다. 바로 '선입견'이다.
과연 우타노 쇼고는 전통추리소설의 대가다웠다.
야쿠자들의 세력 다툼으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건의 잔혹한 미스터리 살인사건을 보기좋게(?) 해결하니 말이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에는 사건을 직접 해결하는 탐정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주인공인 나루세 마사토라가 사설탐정 노릇을 잠깐 하긴 하지만 말이다. 주인공은 아이코의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위장되어 타살당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호라이클럽이라는 곳을 파헤친다. 호라이클럽은 연금생활자들을 대상으로 물건강매 및 보험사기행각을 일삼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집단이다. 겉으로는 흔히 볼 수 있는 건강식품 유통회사지만 그 내막은 야쿠자보다도 더 악날하다.
처음에는 판단력이 떨어지고 건강 문제에 유난히 집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건강식품이나 건강생수 이불 등을 팔다가 이들이 더 이상 물건을 살 돈이 없으면 고리대금을 빌려서 물건을 사게 하고, 고리대금을 갚지 못한 이들은 결국 천문학적인 빚을 떠안게 된다. 빚에 시다리던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는가 하면, 빚을 탕감시켜주겠다는 호라이클럽의 꾐에 넘어가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에 동원되고 심지어는 보험사기를 돕기도 한다.
후루야 세쓰코가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세쓰코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두 사내가 류이치로를 떠밀고, 다카기가 차로 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류이치로를 데려오고, 두 사내가 떠밀고, 다카기가 차로 친것이다.
(......)
후루야 세쓰코는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녀는 호라이 클럽이라는 거미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다음 목표물은 안도 시로라는 70대 중반의 노인이다. 독신이고 일가친적도 없으니, 보험 살인의 대상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감정을 마비시키고, 악마의 종이 되어 사악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p368~369 中-
인구의 1/4이 연금으로 생활한다는 고령사회 일본.
이런 일본이 안고 있는 사회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해 보인다. 세대갈등은 기본이고 아예 세대간 대립과 충돌이 곧곧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자리가 없어 프리터(단기 아르바이트족)로 전전하는 젊은이들은 수입의 상당부분을 연금이나 세금 등으로 떼인다. 안정적인 직장이 없으니 결혼도 요원한 일이다. 독신자가 늘어나고 출산율은 더욱 낮아지며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니 전체 인구에서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진다.
악순환이다.
도심의 전철이며 공원 등은 노인들로 넘쳐난다. 전철과 공원은 경로우대라는 이름으로 노인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이 많을수록 사회는 점점 활력을 잃고 늙어만 간다. 노인혐오 현상이 대두되면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고령사회 일본의 현주소다.
일본의 오늘이 바로 우리의 내일일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살펴보면,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전통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사회파추리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작가는 나루세 마사토라, 아사미야 사쿠라, 후루야 세쓰코, 안도 시로 등을 통해 일본의, 아니 인간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달빛 아래 비쳐든 그 슬픈 자화상처럼...
벚나무가 꽃을 피우는 5월에는 너나할 것이 없이 벚나무를 찾아다닌다. 벚꽃를 보기 위해서...
그런데 벚꽃이 지고 나면 사람들의 관심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벚나무도 단풍이 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사람도 누구에게나 벚꽃피는 화려한 시절이 있는 법이다. 그 시절이 지나고 나면 꽃잎이 떨어지고 단풍이 들다가 이내 나뭇잎마저 떨구고 말라비틀어진 나목(裸木)이 된다. 그러나 나목은 어디까지나 나목일뿐 결코 죽은 고목(故木)이 아니다. 비록 화려한 꽃잎을 피우지는 못할지언정 엄연히 벚나무인 것처럼 사람도 한창 시절이 지나갔어도 여전히 마음만은 그대로인 그때 그 사람인 것이다! 우타노 쇼고는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벚꽃지는 계절에...
나는 나루세 마사토라, 아사미야 사쿠라, 후루야 세쓰코, 안도 시로를 그리워하리라.
그리고....
또한 그대를 그리워하리라.
.
.
.
이 책, 정말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