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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베스트셀러일수록 왠지 멀리하려는 나의 청개구리식 아집(?)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소설작품들을 한동안 멀리했던 독서편식탓인지는 몰라도 암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이제서야 읽었다. 사실, 한국현대소설들을 차근차근 읽어 보리라 결심을 한 후, 신경숙 작가의 단편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엄마를 부탁해>를 언젠가는 읽어 보리라 생각했었는데 그 언젠가가 내 생각보다는 일찍 찾아왔다고나 할까.
암튼, 평소 즐겨 찾는 동네 도서관의 사서추천작코너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흔적이 역력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발견하고는 마치 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한 것마냥 '뜻밖의 행운'에 감격해 했다. 최근 이 작품이 아시아 맨문학상 최종수상작으로 선정되고 또 수상식장에서 작가가 수상소감 말미에 덧붙인 탈북자 강제 북송을 반대하는 발언이 언론에 집중 소개되면서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이 다시 많아졌을텐데도 불구하고 얌전히 제 자리에 놓여 있다가 내 눈에 띄었다는 점이 마냥 신기했다.
'읽을 운명인가보다......'했더랬다.
1938년 7월24일생인 박소녀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상경했다가 서울역 전철역에서 앞서 걷던 남편이 오른 전동차를 따라 타지 못하면서 행방불명되고 만다. 엄마의 부재를 통해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족들은 엄마의 존재 가치를 하나씩 하나씩 깨우쳐 나간다.
첫째딸의 독백과 장남, 남편 그리고 주인공인 엄마의 독백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은 신경숙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몇 번이고 엄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 역시 몇 번이나 엄마에게 달려가고픈 마음을 억누르며 '엄마! 엄마! 우리 엄마ㅡ'를 가슴으로만 셀수도 없이 외쳐 불렀다.
내 엄마 역시 작품 속의 박소녀 할머니와 같은 1938년생이다.
박소녀 할머니처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허리가 많이 휘어 거동이 불편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병원에서 지내신다.
우리 엄마도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삼남매를 키우셨다.
자신의 건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채 자나깨나 자식 걱정뿐이셨다. 그래서 얻은 노환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일찍 일찍 병원을 찾지 않아서 이렇게 본인 고생 자식 고생이라며 푸념을 해대지 않았던가.
엄마의 희생으로 성장했으면서도 자식들은 그런 엄마의 희생을 마주하기를 그 무엇보다도 부담스러워하고 두려워한다. 그건 인간으로 하여금 그토록 헌신하게 만드는 그 '모성'이라는 힘의 위대함을 진작부터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단언컨대, 모성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소녀 할머니는 3살때 사고로 아버지를 여인 까닭에 학교 문턱조차 밟아 보지 못했단다. 그래서 그녀에게 학교란 가고 싶었지만 못 간, 그래서 한없는 '그리움'이자 또한 너무나도 낯선 '그대'이지 않았을까. 돈과 시간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기차타고 상경하기는 글을 읽지 못하는 박소녀 할머니에게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미국에 가는 것과도 같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을 뚫고 대학 입학 원서 제출용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큰 아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슬리퍼를 신은 채 서울로 달려온다. 이것이 바로 모성이고 엄마인 것이다.
그런 엄마를 잃은 것이다. 아니 잊은 것이다.
박소녀 할머니가 젊어서 밖으로만 나돌던 남편과 그런 남편 대신으로 의지했던 곰소의 그 남자를 찾아 나서지 않은 건 남편에 대한 애정이나 의리가 아니었으리라.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닌 다섯 남매의 엄마라는 사실이 그녀를 주저 앉혔을 것이다.
내 엄마도 그러했을까?
아마도...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 엄마도 고단한 삶을 헌 신 벗어던지듯 그렇게 훌훌 털어내고 훨훨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난히도 총명하여 명문 약대를 나온 똑똑한 둘째 딸이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자신의 아이들 사이에서 등골이 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박소녀 할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 애미 힘들게 하는 손주 새끼들에 대한 야속한 마음을 고스란히 들어내고 있다.
친정 엄마가 외손주를 돌봐주는 것은 외손주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 예뻐서가 절대로 아니라, 조막만한 손주보다 몇 배는 더 큰, 이제는 어른이 되어 엄마까지 된 '내딸'이 힘들까봐서다.
예전에 언니가 첫딸을 낳았을 때였다.
그 아이가 옹알이를 하고 아장아장 걸음를 떼어 놓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 엄마는 한없이 행복해했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짓굳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엄마!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인데 말야. 언니와 조카가 동시에 물에 빠졌어. 그럼, 엄마는 누구 먼저 구할 것 같아?"
그때 엄마의 대답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당연히 네 언니지!"였다.
내 딸이 없으면 손주 손녀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과 함께......
난, 그때 사랑은 절대 '내리사랑'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의 사랑이 딸에서 손주로 내려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영원히 딸에게만 머문다. 손주에 대한 사랑 역시 딸에 대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런 '엄마'인데, 그런 엄마를 그런 엄마의 존재와 소중함을 우린 너무 자주 잊고 산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작품속의 '너' '그' '당신'은 모두 이땅의 딸들이고 아들들이고 또한 남편들인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작가의 또 다른 단편인 <감자 먹는 사람들>을 읽었을 때와 매우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아버지의 입원을 계기로 자식에 대한 부모 특히 부성애가 진하게 배어 나오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연작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두 작품은 배경에서부터 분위기 등이 서로 잘 어울린다.
끝으로, '장미묵주'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에필로그는 그냥 작품의 후일담으로 남겨 두었다가 다른 지면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그 엄마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데, 굳이 감정이 고조될대로 고조되어 있는 독자들을 낯선 이국땅으로 데리고 가 굳이 서구적이고 이국적인 모성애 앞에 '불쑥 '던져 놓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