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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죽였다 ㅣ 한국작가 미스터리문학선 2
류성희 지음 / 산다슬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알라딘 서재에 10년 동안 1800여편의 추리소설 리뷰를 올려 '전설의 블러거'로 불리는 물만두의 <추리책방>을 통해 알게 되었다.
추리소설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도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존재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가 바로 류성희 작가란다.
그동안 주로 일본추리소설 위주로 읽어 오던 나에게 첫번째로 찾아온 한국추리소설이 류성희작가의 작품이었다는 점은 알고보니 '특별한 행운'이었다. 정말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잡혀 있는 약속까지 취소하면서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한지 5시간만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쉼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흥분과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내 가슴에 마치 봄바람에 실려온 꽃잎처럼 작가의 후기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중략)
바라건대, 정말로 간절히 바라건대, 때로는 가슴 아파하며, 때로는 머리를 쥐어짜며, 또 때로는 차가운 맥주로 뜨거움을 식히며 쓴 이 글을 읽고 난 후,
주위에 있는 것들이 잠시 낯설어지기를,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내가 아닌 나,가 창밖을 바라보기를,
부디, 욕심 부려본다.
살아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의 손을 잡듯, 내 글을 곱게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류성희, <나는 사랑을 죽였다> 후기 中-
난 지금껏 이처럼 아름다운 작가 후기를 만나본 적이 없다.
살아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같은 사람의 손을 잡듯, 그렇게 곱게 글을 읽어주어 너무 고맙다는 그 작가에게 나는 너무 미안해졌다. 만약, 류성희라는 작가가 한국이 아닌 이웃나라 일본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녀는 지금쯤 미야베 미유키 수준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
일찍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과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들을 접하면서 '그래, 바로 내가 읽고 싶었던 이야기기들이야!'라며 감격했더랬다. 비록, 범죄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가슴 저미는 사연에 얼마나 많은 공감의 눈물을 흘렸던가.
류성희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감동'이라는 감정과 조우할 수 있었다.정말 오랜만의 조우답게 헤어짐은 너무나 큰 아쉬움이었다.
하여, 바라건대, 정말로 간절히 바라건대, 때로는 기막힌 반전에 탄성이 절로 나오고, 때로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듯 깊은 슬픔에 젖으며, 또 때로는 아둔한 문학적 감수성에 머리를 쥐어박으며 읽은 이 작품들이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혀졌으면 좋겠다.
열 편의 단편들 모두 제각각 독특한 맛과 멋이 있다.
특히, 허를 찌르는 반전이 돋보이는 <코카인을 찾아라>와 <살인미학>도 좋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사쿠라 이야기>와 <벽장 속에서 나오기>가 가장 마음에 든다.
<사쿠라 이야기>는 한 여인이 평생에 걸쳐 서서히 그리고 보이지 않게 원수를 갚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상대를 '죽음의 길동무'로 데리고 간, 가히 이시대 최고의 복수극이라 할만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같은 사랑을 붉고 붉게 그린 <벽장 속에서 나오기>는 한편의 시정시라 하겠다.
사랑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면 또 그렇게 순식간에 빠져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 그래야 살아낼 수 있다.
-<벽장속에서 나오기> 김승주 독백 中-
사랑하는 것보다 차라리 슬퍼하는 게 나아
슬퍼하는 것보다 차라리 화를 내는게 나아
화를 내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아
-<벽장속에서 나오기> 백현재와 홍자홍 유서 中-
백현재는 홍자홍을 사랑했습니다.
김승주는 백현재를 사랑했습니다.
홍자홍은 김승주를 사랑했습니다.
날 바라보지 않는 당신,
다른 남자만을 바라보는 당신
질투가 내 심장을 파고 듭니다.
당신이...
내게 사랑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이제 대답하지요.
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진짜라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처음보는 순간부터...
당신의 피가 마시고 싶을 만큼
영원히...
-<벽장속에서 나오기> 홍자홍의 편지 유서 中-
만약, 이 정도의 문학적 감수성과 언어적 조탁력을 갖춘 작가가 장르문학이 아닌, 순수문학쪽으로 일찌감치 발을 내딛었다면 어떠했을까? 우리네 인생에서 '만약...?'이라는 말처럼 '하나마나 말짱 도루묵'인 것도 없지 않다마는...
그만큼 작가의 빛나는 재능에 눈이 멀어버렸다는 증거요, 행여나 작가의 작품들을 앞으로 더 많이 접하지 못하게 될까 싶어 벌써부터 애가 타는 독자로서의 노파심이리라. 아마 류성희작가의 작품을 접해본 이들이라면 이 심정을 십분 이해할 듯...
오늘 오후 사무실에서 나와 늦은 점심을 홀로 먹고 인사동 거리를 거닐었다.
화사한 봄햇살 속의 흥겨운 얼굴들...
기름판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맛깔난 호떡들...
나 좀 보란 듯 가슴을 쑥ㅡ 내밀고 서 있는 간판들...
익숙한 어느 봄날 오후의 거리 풍경이건만 왜 이리도 낯설기만 한지......
작가가 의도한 것이 바로 이런 거였다면, 난 소위 확실하게 '낚였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돌아와서는 류성희작가가 종종 출몰(?)할 것같은 카페에 가입했다.
끝으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집의 표제로 쓰인 <나는 사랑을 죽였다>라는 작품이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걸까?
하여, 이곳저곳 기웃거려보았으나 어디서에도 그 '실마리'는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