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진의 <조매제>는 여류작가의 작품 속 화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것과는 달리 남성이다.
작중 화자인 경덕은 일 년 제사만도 열다섯 번인 명망있는 양반 가문의 종손이다. 그래서 부족한 것없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맞선을 볼 때마다 '딱지'를 맞곤 한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실망하지도 않는다. 애당초 종손이라는 점은 그에게는 결혼을 미룰 수 있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 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종손의 성혼(成婚)을 위해 집안 어른들이 입시름을 거친 후, 마침내 사대(四代)제사를 이대(二代)로 줄이기로 하는 행사가 고향집에서 일가친척 어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행해졌다.
절을 마친 아버지가 낭랑한 음성으로 축문을 읽어 내려갔다.
유세차 ㅡ 갑술 ㅡ 삼월 ㅡ 정유 ㅡ 삭 ㅡ 십일일 ㅡ 정축 ㅡ 효현손 ㅡ 동휘 ㅡ 감고소우.
현고조고통정대부행용양위부군(縣高祖考通政大夫行龍穰衛府君)
현고조비숙부인풍천임씨(縣高祖妃淑夫人豊川任氏)
현고조비숙부인오천정씨(縣高祖妃淑夫人烏川鄭氏)
......
지사대국시개려사지양대심수무궁분즉유한(止四代國施改禮祀止兩代心隨無窮分卽有限)
......
감청신주출취옥우공신존헌(敢請神主出就屋宇恭伸尊獻)
사대조와 고조부의 경우는 조매를 위한 고유(告唯)를 하고 증조부와 조부의 신위는 서울로 모셔 갈 것임을 고하는 길고 긴 축문을 읽는 아버지의 간간이 떨리는 음성이 숨죽이고 선 사람들의 머리 위 퍼져 나갔다. 매안하기를 감히 청하는 마음이 창망하기 이를 데 없으나 백성으로 옮겨 누옥이라도 마련하여 모시고자 가히 아뢰노라는 뜻임을 띄엄띄엄 알아들으며 나는 일렁이는 촛불을 비스듬히기울어 누군가 잡아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서하진, <조매제> 中-
작품은 제사와 이장 및 신위를 모셔가는 구체적인 순서와 장면등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디테일함은 먼 훗날 더 이상 제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세대에게 '옛날에는 이렇게 제사을 지내며 조상을 모셨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 교과서에 실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부록의 낱말풀이를 참고하지 않으면 읽기가 녹녹찮은 작품이다. 그렇다고해서 고리타분한 작품이라고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다.
작품의 주제는 신(新)시대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구(久)시대의 유물과 유산에 갖혀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어쩔 수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러해야만 한다.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의 끄트머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성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경덕에게 종손이라는 신분은 이제 막 날아오르려는 나비의 꽁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고치와도 같다. 고치가 없었다면 나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려면 고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탁 트인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차들이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쳐 갔다.
(......)
나는 조수석에 소중히 모시고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부모의 신위를 내려다보았다.
(......)
사방에서 나를 둘러싼 차들의 틈바구니에는 어디 한군데도 빠져나갈 여지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덫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발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이대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하고 혼자 투덜거리는 내귀에. 가다 보면 길이 열리겠지하는 누군가의 음성이 드린 것 같았다. 나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어둑한 뒤편에 보이지 않게 도사린 물체가 있는 듯싶었다. 아무도 없는 뒷좌석에서 누가 금방이라도 불쑥 몸을 일으켜 내 뒷덜미를 움켜잡을 것 같았다.
(......)
나는 조수석의 신위를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문득 이 길 한옆에 신위 보자기를 버리고 간다면......하는 느닷없는 유혹이 나를 감쌌다. 달리는 차에 받혀 나무 상자는 조각조각 깨어지고 신위의 검은 글자가 적힌 종이는 갈가리 찢겨 바람에 날리고......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며 황망해하지 않고도 간단히 신위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이까짓 나무 상자쯤은 단숨에 박살이 날 것이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실 것이다. 어머니는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냐고 꼬지꼬치 물어오리라. 이처럼 쉽게 신위를 유기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갑자기 유쾌해져서 흐흐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매끈하게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분홍 보자기와 보이지 않는 씨름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한낱 나무 상자일 뿐인 것이 나를 이렇게 숨 막히게 한다면 그 상자를 모신 거대한 성 같은 집은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요새를 지키는 불침번처럼 문마다 붙어 있는 세콤 장치는 기실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닌가. 한 걸음 나가면 훈련된 진돗개가 막아서는 정원. 밤새도록 밝혀져 있는 방범등을 바라보며 나는 또 잠을 설칠 것인가.
-서하진, <조매제> 中-
주인공이 이처럼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순간. 구원처럼 카폰이 울리고 주인공이 사모하는 여자인 연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주인공은 지금껏 망설이기만 했던 말들을 토해내는데...
"나는 네가 필요해. 연희야! 내게는 네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야 견딜 수 있단 말야!"
연희가 내 말을 이해했는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는가. 수화기에서는 찌지직 소리만 흘러 나오고 연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모르게......안 들......여보세요?.....여....요?"
연희의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어지며 들려왔다. 산으로 둘러싸인 길을 지날 때면 으레 통화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전화기가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저만치에 붉은 경고등이 반짝이는 터널 입구가 보였다.
(......)
터널의 출구가 눈앞에 커다랗게 다가왔다. 터널을 나오자마자 나는 깜박등을 켜고 천천히 차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통화를 방해할 만한 산이 사라지는 곳, 어둠이 내린 너른 벌판이 펼쳐진 곳에 이르러 나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문을 활짝 열고 연희의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눌렀다.
띠리릭, 띠리릭.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먼 곳에서 연희의 음성이 울릴 것이다. 나는 전화기를 바짝 거머쥐었다. 차량들의 행렬, 내가 빠져나온 그 끝없는 행렬들이 내 앞에 부신 빛을 퍼붓고 사라지는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하진, <조매제> 中-
주인공이 연희와 전화 연결이 됐는지 그래서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듯이 주인공은 이미 자신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던 과거와 작별을 고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