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지나간다,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류헝.츠리 지음, 김영철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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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국두>와 <귀주이야기:秋菊打官司>의 원작가인 류헝(劉恒)은 중국의 신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소개된 그의 작품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원작이 <白涡>인 <사랑이 지나간다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는 성공한 중의학 교수 저우자오루라는 인물을 통해 중년의 일탈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지금까지 접해왔던 중국 현대 신사실주의 문학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류헝의 작품은 과장이나 해학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석도 없다. 뭔가 끊임없이 설명하고 강조하려는 여타의 중국 작품들과는 그 결을 달리한다. 류헝은 권력지향적이고 위선적인 주인공을 통해 상류 지식층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작은 핸드백이 흔들렸다. 그녀의 집은 동47조에 있었다. 30분 안에 그녀는 남편과 얼굴을 마주할 것이다. 하지만 남편 앞에서는 이렇게 나긋나긋하고 사랑스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다른 남자의 체취를 지니고 집에 들어갈 것이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그였지만 이미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의 그가 아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순결했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전혀 새로운 체험을 한 뒤 비열하게 변해버렸다. 그는 만약 이런 자신이 비열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세상에 비열함이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열함을 숨길 수 없었다.

-류헝, <사랑이 지나간다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중-


 

 

문제는 바로 새로운 감정인 체험인 것이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모든 것이 안정 궤도에 오른 저우자오루에게 여제자인 유부녀 화나이칭과의 밀회는 충분히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러나 어긋난 밀회에 빠진 현실의 남자들이 그렇듯 저우자오루는 가정과 직장 그 어느 것 하나 잃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밀려드는 죄책감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화나이칭의 요부기질탓으로 돌려버린다. 여기에서 화나이칭이 성공하기 위해 '미인계'로 저우자오루를 이용하려했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저우자오루라는 인물을 통해 혼외정사를 하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 과장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는 여자에게 유혹당한 연약한 남자였다. 그는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해쳤다. 아마도 화나이칭만은 예외일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이런 사랑은 그를 현기증 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는지 그녀의 육체만을 사랑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 육체는 소속된 곳이 없는 고립된 여성의 육체 같았다. 그는 그녀를 떠올릴 때면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화나이칭으로 위장하여 존재할 뿐 인격이 없었다. 어쩌면 그는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믿을 만한 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든다.

 

-류헝, <사랑이 지나간다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중-


 

 

 

저우자오루는 화나이칭이라는 타자에 의해 자기 존재를 재확인하고 있다. 자신을 열어 타인을 맞아들임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저우자오루의 자기 고백은 놀라울 만큼 솔직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를 사랑하며 그녀의 육체 안에 깃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다. 지극히 이기적이지만 이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우자오루는 강단 위에 섰다. 믿음 가득한 자세로 전체를 주시했다. 그는 자기의 형상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형상이다. 형상은 모든 것을 대표한다. 속마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누가 그의 영혼을 똑바로 볼 수 있는가? 아마 그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그는 박수소리에 현기증이 났다. 이는 그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몽롱한 가운데 그는 몸이 마치 제비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가고 싶은 곳으로 바로 날아갈 수 있었다!

그는 천마처럼 빨리 달리고 있었다.

소리 하나가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조심해! 그는 웃었다. 그는 그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았다. 저우자오루는 이미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류헝, <사랑이 지나간다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중-


 

한여름의 소나기가 지나갔다.

옷이 좀 젖었을 뿐이지만 햇살에 금방 마를 것이다. 그리고 주변은 비내리기 직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오히려 빗물에 젖은 만물이 더욱 생기발랄해지듯 저우자오루는 더욱 더 여유있어지고 강해질 것이다.

어느 분야나 세계인에게 어필하려면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지극히 지역적이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류헝은 중국 사회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세계는 중국이라는 한나라의 범주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작품의 소품은 물론 지극히 중국적인 것이지만 그가 침잠하는 주제는 인간 본연의 모습에 집중되어 있다. 회자되는 것처럼 만약 중국 대륙 작가인 그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된다면 그건 그의 작품 세계가 너무도 '중국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지극히 '중국적'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현재, 한국에 번역된 류헝의 작품은 이 작품외에 <수다쟁이 장따민의 행복한 생활>과 신사실주의 소설선에 몇 편의 단편들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앞으로, 그의 작품들이 더 많이 번역 출판되기를 기대해 본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언급하자면 어느 블로거가 지적한 바대로 역자는 어째서 원제목인 <白涡:하얀 물보라>대신, <사랑이 지나간다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라고 옮겼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참고로, 이 책의 역자가 류전윈의 작품 <一地鷄毛>를 <닭털같는 나날>로 번역한 것을 보고 '한국독자들에게 어색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어감을 줄 수도 있는 표현으로 굳이 제목을 직역을 해야 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중국적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기 위함으로 이해했었다. 근데 이번 작품의 제목은 그때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지나치게 의역하여 원작가의 의도와 원작품의 분위기를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중국의 전통 의학인 中医学를 중의학으로 번역해도 되는데, 한의학으로 번역한 것이 눈에 띄였다. 물론, 한의학이 중의학과 비슷한 부분이 많고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과 한국이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오랜 세월 밀접한 교류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토불의(身土不異)적 관점에서 볼때 한의학과 중의학은 상당히 유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한국의 전통의학인 한의학이 곧 중국의 전통 의학인 중의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허균의 <동의보감>이 중국의 <본초강목>을 그대로 옮긴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중의학이란 표현 대신 한의학이란 표현으로 번역한 것은 아무래 생각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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