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사랑은 한때의 끌림일 뿐이다.'
중국대륙출신 미국작가인 하진의 <기다림>은 '절대적 사랑은 기다림으로 완성된다'는 보편적인 상식에 물음표를 던지는
작품이다. <기다림>은 중국 현대사의 오점이기도 한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 시기를 다룬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비난도 불운한 시대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도 담겨 있지 않다. 그저 거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어느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이야기일 뿐이다.
무지(木基: 하진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는 가상의 도시이름)시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는 쿵린에게는
고향마을에 부모님의 강압에 못이겨 결혼한 아내 류수위와 딸 화가 있다. 류수위는 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전족'을 한 시골
아낙네로 어느모로 보다 인텔리인 쿵린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고아로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 간호사 우만나는 남자친구 둥마이에게
버림받은 후, 점잖고 지적인 쿵린을 사모하게 된다. 쿵린 역시 그런 우만나와 도시에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 그러자면 우선 아내와
이혼을 해야만 한다.
린은 조금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관 동무, 저, 저는 제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해주십사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희 부부는 6년 동안 떨어져 살았으며 더 이상 부부로서 애정이 없습니다."
(...)
린이 말을 마치자 재판관이 그녀를 바라봤다.
"류수위 동무, 마지막으로 동무에게 묻겠소. 동무는 남편에게 미련이 남아 있소?"
"그럼요, 물론입니다."
마지막 질문에 마음이 흔들린 듯그녀는 신음을 내뱉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시오?"
"예"
-하진, <기다림>, 시공사 186p~187中-
결국, 쿵린은 아내와의 합의 이혼에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간다.
그동안, 불미스러운 일들을 겪은 데다가 혼기까지 놓쳐버린 우만나에게는 쿵린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마침내
법적으로 이혼이 가능한 세월이 흐르고 아내 류수위도 무지시 법원에서 이혼에 동의하게 된다. 드디어 쿵린과 우만나는 기나긴 기다림을
끝내고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쿵린과 만나는 40대 중, 후반의 나이지만 쌍둥이 아들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아내 만나의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서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져간다. 졸지에 아내의 병간호와 쌍둥이 아들을 돌보게 되면서 쿵린 역시 피폐해져만 간다.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정말 그 여자를 사랑해?
린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렇다고 생각해. 우리는 18년 동안이나 서로 기다렸잖아. 그 정도 세월이라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고도 남아. 아니지.
세월이 증명하는 건 하나도 없어. 사실 너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그냥 한때 반했던 것뿐이야. 하지만 기회가 없어서 그게
사랑으로 커지거나 발전하진 않았지.
(...)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 사실 18년을 기다렸다고 하지만, 그건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이었을 뿐이야.
(...)
그 세월 동안 너는 몽유병자처럼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한거야.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끌려가면서 말이야. 외부의 압력에,
너만의 환상에, 스스로를 내면화한 규정에 끌려가면서, 좌절과 수동적인 태도 때문에 너는 잘못된 길로 간 거야. 자기한테 허용되지
않은 일들이야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야.
-하진, <기다림>, 시공사, 454p~456中-
'사랑이란 한때의 끌림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18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 긴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쿵린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람에게는 가슴 떨리는 사랑보다는 편안한 잠자리와 따듯한 식사가 있는 가정이
더더욱 절실한 법이다.
뜨거운 끌림도 사랑도 없는 결혼이라고 생각했지만 쿵린은 이혼한 아내 류수위에게서 가정의 따스함과 평온함과 함께 삶의 행복을 느낀다.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혹은 계산적인 사랑이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서 하진의 <기다림>은 사랑의 본질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은 '이질성'이야말로 비주얼적 요소와 환타지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현대 문단에서 하진의 작품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주된 이유이리라.
18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만나는 결국 쿵린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쌍둥이 아들까지 출산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이제 더이상 뛰기를 거부한다.
사랑이, 그녀의 삶을..
그녀의 생명을...
그녀의 심장을...
소진시켜 버린 것이다.
우만나는 분명 사랑 가득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인생에는 분명 사랑이 필요하지만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될 수 없다'는 본질을 너무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하진의 <기다림>은 무려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내 품에 있었던 작품이다. 최근 장시간의 독서를 허락하지 않을
만큼 몸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본의 아니게 다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오히려 쉬엄 쉬엄 긴 호흡으로
읽어내려갔기에 작품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비록 재미와 감동은 덜 하지만 긴 여운을 가져다 준, 보기 드물게 훌륭한 작품이다.
사랑 역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