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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태동출판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나의 독서목록은 온통 추리소설 뿐이다. 주로 일본 추리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일본의 숨은 '저력'을 뒤늦게 느끼게 된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1909년생으로 1992년 타계할 때까지 <얼굴> <검은 화집> <제로의 초점> <모래 그릇> <일본의 검은 안개> 등등으로 일본 추리 소설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58년도에 쓰여진 세이초의 <점과 선>은 정통 추리 소설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세이초가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은 가장 세이초답지 않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점보다는 '왜 저질렀는가?'라는 질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범인의 심리와 범행 동기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므로써 사회병리현상을 고발하는 작품을 일컫는다.
<점과 선>은 이와 같은 사회파 추리소설에서는 다소 벗어난 듯 하지만 일본 전역을 종횡무진하는 열차와 비행기의 발착시간을 범죄 알리바이로 이용한 점 등은 감탄을 자아내며 이 점만으로도 세이초의 비범함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세이초는 우연히 열차 시간표를 들여다보다가 일본 전역이 점과 선으로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직감적으로 대중교통의 출발/도착 시간을 이용한 작품을 구상하지는 않았을까.
<점과 선>이라는 제목 역시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대중교통의 발착 시간으로 위장되어 있는 야스다의 알리바이를 마하라 경사가 하나하나 증명해 나가는 데에 지면의 대부분이 할애된 점 역시 세이초가 이와같은 자신의 착상에 얼마나 열중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정부 기관에 물건을 납품하는 야스다 다스오는 수뢰 의혹을 받고 있는 이시다 부장을 위해 사건의 전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야마 겐이치 과장대리를 없애버리면서, 남여간의 정사(情死)로 위장하기 위해 요정 여종업원이자 자신의 내연 상대였던 오토끼를 함께 죽인다. 야스다는 열차와 여객기 사이의 시간차를 이용하여 알리바이를 만들고 이 과정에서 그녀의 병든 아내인 료코가 '브레인' 역할을 한다. 포위망이 좁혀오자 료코는 야스다와 함께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점과 선>은 범인의 윤곽이 들어난 상태에서 그가 어떻게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을 오고 가며 범죄를 저질렸는지를 풀어내는 퍼즐 게임이다. 그러므로 이미 도입부분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진 상태에서 범인이 쳐놓은 알리바이를 깨는데에만 집중한 나머지 범행 동기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즉, 야스타는 병든 아내와 함께 사야마 겐치를 죽일 수 밖에 없었을 만큼 이시다 부장과의 검은 커넥션이 치명적인 것이었을까? 뇌물공여죄보다 살인죄의 죄질이 더 무거운 법인데 어째서 그는 작은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저질러야만 했던 것일까? 세이초는 이 점을 지나치게 간과해버렸다.
병든 부인이 질투로 남편의 애인인 오토키를 죽음의 길동무로 선택했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결론도 야스다와 료코가 '자살'함으로써 마무리되는 것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밖에도 전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보를 이용했다는 점 역시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야스다는 가와니시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왜 불편하게 전보를 쳤을까? 그리고 마하라 경사 역시 수사과정에서 타지역의 경시청에 업무협조를 구할 때 어째서 전화대신 전보를 이용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한 료코를 사건에 끌어들이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 또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1950년 대 후반에 나온 작품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작가의 명성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이와 같은 '빈틈'에 고개가 가웃거려지지만,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일본 추리소설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일독(一讀)의 가치'는 충분하다.
명성있는 작가의 '졸작'을 맨 처음 접하게 되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어버리기가 쉽다. 나에게는 하진이라는 작가가 그랬다. <기다림>이라는 대표작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작품들을 먼저 읽으므로써 본의 아니게 실망을 했으니 말이다.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그의 탁월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을 먼저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