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굴레 -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
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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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나라'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던 일본과 일본인을 가장 섬세하게 분석한 책이다. 

그동안 단순히 문화적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일본인에 대한 '언캐니함'의 근원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외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이름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점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사무라이들의 자기희생 컬트,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과로사할 때까지 일하는 현대의 샐러리맨),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변태적 성욕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모순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모두가 겉으로만 중시하는 척하는 사회적 평화를 위해 유지하는 가면(다테마에)과, 믿을 만한 사람과 술 한 잔 나눌 때가 아니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그 밑의 현실세계(혼네) 사이의 충돌을 묘사하기 위한 단어들도 생겨났다. -102쪽



일본의 근대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근데 이상하지 않은가?

메이지 유신이란 다름아닌 왕정 복고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천황에게 권력을 되돌려 주는 게 근대를 여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일반적인 역사의 흐름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시민혁명에 의해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일본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200년 넘게 이어져 온 긴 평화 속에서 지배층은 매너리즘에 빠졌고 세심한 조율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쿠가와의 몰락은 보통 페리 제독이 방문했던 1853년에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1838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해, 오시오 헤이하치로라는 이름의 오사카 사무라이가 다양한 계층의 군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오사카의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
오이시는 "알고서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知而不行只是未知)"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명나라 유학자 왕양명(1472~1529년)의 추종자였다. 언행일치를 강조하는 왕양명의 사상(양명학)은 청나라와 도쿠가와 일본의 주류 사상이던 신유학, 즉 주자학과 충돌했다. 왕양명의 저술에 깔린 급진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수많은 개혁사상가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113쪽



조선 역시 영정조 시대가 끝난 직후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몰락한 양반출신이었던 홍경래는 10여 년 동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몽 개혁 사상을 전파하면서 반란을 준비했다. 비록 두 사람이 일으킨 반란은 실패했지만 두 나라가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오시오의 난으로 일본은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력이 복구불능 상태로 빠졌고, 조선 역시 홍경래의 난으로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신분질서에 구멍이 뚫린다. 


오시오의 난 이후 일본은 사쓰마와 죠슈번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혁명이 배양되기 시작한 반면, 조선에선 서학을 배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이 잉태된다. 한쪽은 칼(武)을 다른 한쪽은 책(文)을 들면서 두 나라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갈리게 된다. 물론, 한국과 일본 사이에 피상적 접촉이나 일시적 충돌은 있었지만 겹치고 포개진 채 뒤섞인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두 물결이 합쳐져 흐르다가 다시 갈라지면서 나타나는 문화적 혼합과 문명의 융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웃한 단일 민족이 기나긴 세월 동안 공존하면서 한국와 일본처럼 이질적인 경우도 드물다.

 

두 나라는 일찌감치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섰다.     

헤엄쳐 건널 수 있는 그 짧은 바닷길이 참으로 넓어 보인다. 

넓지 않은 그 바다 덕분에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었고 서로가 의도치 않은 접촉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구의 물결은 두 나라 모두에게 엇비슷하게 몰려왔다. 

역사의 무대 위에선 때론 능력이나 기회보다는 의도와 의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서로를 이해할 의지와 기회가 없었던 한국과 일본은 두 나라를 개국(또는 정벌)시키려는 확고한 의지와 의도를 가진 서양 세력 앞에서 각자 필살기(?) 무기로 대응했다. 

조선은 대륙에 조공을 바치던 선비의 나라답게 외세 의존으로 기운 반면, 명목상일지언정 사무라이 사회였던 일본은 스스로 자력갱생의 길로 나아간다. 

조선의 지배층은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신의 목숨과 기득권이 우선이었다. 여차하면 대륙으로 도망갈 수 있었던 그들에 비해 일본의 지배층에겐 깊은 바다 뿐이었다. 위기의 순간엔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다가 옥쇄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걸어온 길은 언제나 '모 아니면 도'식의 타협할 줄 모르는 막다른 길이었다. 저자는 메이지 유신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정치 체제는 주권재민이 아닌 천황을 겉으로 내세운 집단지도체제였고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나미가 밀어닥친 일본을 보면서 전세계는 질서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줬던 숭고한 일본인에 감탄함과 동시에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모습에 경악했던 근본적인 이유와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지도자들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로, 일본 정치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명확한 통치권을 갖는 권력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쟁관계에 있는 권력 집단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온전히 합법적인 판단을 내려줄 제도적인 절차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이 전혀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 또한 공개적인 정치 절차가 없었던 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정책의 대부분은 그 입안의 구심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설사 정책을 끌고 가는 일관된 동력이 있다고 해도 이는 정부의 공식 기관이 주도해가는 것이 아니다. 해외로부터의 압력과,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한 국내 각종 이익집단의 요구에 좌우된다. 4장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이런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브레이크도 나침반도 없는 나라가 힘을 갖게 되면 자국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들에도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사실이 1930년대에 일어난 사건들로 증명되었음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424쪽



사실, 태평양 전쟁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일전쟁의 발발은 어처구니 없는 사소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는가. 일본은 계획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고 수행한 게 아니었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전쟁을 결정한 사람이 없었기에 끝내야 할 사람도 없었다.  패전이 짙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당시 일본인들의 고려 사항 속엔 항복은 없었다. 그들에겐 오직 끝까지 싸우다가 다같이 죽는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일본인은 어째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진다는 근대인의 특성을 거세당한 채, 석기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적일 수가 있을까. 

그 해답 역시 태가트 머피가 들려준다.



왜 일본이 자생적 부르주아 혁명에 실패했는가에 대한 대답의 일부는 도쿠가와 막부가 잠재적인 반대 세력들을 회유했던 천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회유의 정치 문화는 막부 멸망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일본 정치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지고 있다. 집권층은 상인 계급이 부의 축적을 통해 사무라이와 다이묘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는 만사의 위계를 중시하는 그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부가 상인들의 일에 직접 관여하고 나섰다면 절대 권력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일깨워 유럽에서처럼 부르주아 단결의 도화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대신 막부는 이 부분이 중요한 포인트인데, 상인 조합과 관련 단체들이 스스로를 자율감독하는 것을 전제로 그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러한 자율 감독은 상업활동을 기존 권력 구조에 노골적인 도전이 되지 않는 암묵적인 테두리 안에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 재산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는 근대적 개념을 몰랐던 일본의 상인들은 권력에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해낼 만한 이론적 틀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도쿠가와 통치를 관통하는 신유학(주자학) 정치 이론은 현존하는 위계질서를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다. 달리 말하자면, 현존하는 정치적 관계를 초월하는 어떤 질서가 존재해서 그 정치적 관계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신성한 왕권'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절대 왕정 제도는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군주의 권리가 더 높은 존재인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개념(왕권신수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군주 자체는 신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사상에서는 정당하게 설립된 정치 권력 자체가 신성을 지닌다. 도쿠가와 막부는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오래된 개념을 적극 장려해서 어느 누구도 막부의 통치에 도전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했다.  -117쪽 



'천황=신'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신(神)인 파라오 앞에 엎드려 있는 고대 이집트인들을 보는 것만 같다.  

저자는 일본의 굴레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의 탁월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는데 이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첫 단추에 지고지순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한다는 건 일본과 일본인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와 근원이 없는 일본적이고 일본다움에 집착하게 되면서 일본 문화는 그 세밀함과 정교함이 나날이 더해만 갔다. 별것 아닌 시시한 것에 대해서도 아니 어쩌면 별것 아닌 것이기 때문에 더한층 가꾸어 꾸미고 더 잘하려고 애쓴다. 가끔씩 우리가 일본에 대해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하고 느끼는 근원 또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든다던지...

혼을 바쳐 일하는 장인 정신이라던지...

소름 돋을 만큼 아름다운 문방구들과 악섹세리라든지...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자세와 서비스라든지...


일본인은 끝까지 계속해서 '~척'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가짜일수록 진짜에 집착하는 것일까?



메이지 시절 종교가 겪었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걸었던 길을 여러 면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적이지 않다'고 낙인찍어 기존 질서를 파괴하며, 사실상의 신흥 종교를 '순수하고' 자생적인 전통으로 포장하여 만들어내고,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에 열광한 소수의 엘리트들이 그 제도적 유산을 오래도록 일본에 남기게 된다. 또 '일본적인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데 집착했던 메이지 일본은, 일본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대륙의 영향을 애써 지우고자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많은 서양 문화를 허겁지겁 받아들여 미숙하게 소화시켰다. 그 결과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서양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에 빠졌고, 이러한 모순은 이후 비참한 정치적 결말을 가져온다. -143쪽



우리나라도 정치가 늘 말썽이고 여당과 야당 모두 주장하는 바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굳이 해석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심한 관찰자라면 그 속을 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는 가끔씩 앞뒤가 맞지 않는 직소퍼즐을 보는 것 처럼 순간 '멍'해진다. 도무지 해석은 커녕 해독이 필요한 암호같다.  



지역구를 자손들에게 물려 주는 것도 그렇고...

테러와 확성기가 등장하는 각종 혐오 시위들도 그렇고...

너무나 자주 바뀌는 총리들인데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일본 정치의 비정상(?) 역시 근원은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되었지만 미군정에 의해 틀이 짜여진 후 미국에 의해 공고해지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일본 정치사를 논하는 부분은 다소 지겹고 따분하다.

고이즈미와 아베가 나오자 반갑기까지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정치인들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사회당, 공명당 및 민주당 등이 있지만 일본엔 자민당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그 이상함이 당연함으로 귀결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실패를 인정하고, 책임지고, 청산하는 데 특히 어려움을 겪어왔다. 왜냐하면 충성의 행동 규범은 상사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면 당신이 자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규범은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CEO가 회사 문제에 대해 '책임지고' 사임한다든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납품 업체가 있는데도 회사가 기존 업체로부터 계속 납품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이 그 사례들이다. (...) 좋은 일본인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상호, 의존관계나 의무 또는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또는 조직)을 배신하기보다는 '주주 가치'나 '공공의 선' 같은 추상적인 원칙을 위반하는 쪽을 택한다. (...)
물론 이런 신자유주의적 관행들은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공익 전반을 약탈하는 행위를 용이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미국이나 영국에서 드러나듯 사회적 위험 요소로서 점점 심각해지는 소득 격차 문제와 불가분하게 엮여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에서 기업 인수합병 시장이나 주주 가치를 통해 경제적 정치적 결과가 좌우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혁명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다. 일본 비즈니스 세게의 근본적인 개혁을 옹호하는 사람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혁명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는 것과 같다. -355~357쪽 중




일본은 정치인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관료들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정치인의 진짜 본업은 유권자로부터 표를 적당히 얻어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이고 그 다음엔 직업정신과 투철한 소명감으로 똘똘 뭉친 엘리트들로 이뤄진관료집단에게 권한을 주고 행정을 일임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일이 발생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게 된다. 공무원이 공무를 집행했다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선출직 정치인 역시 투표에 의해 뽑히긴 하지만 천황의 이름으로 임명되기 때문에 업무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건 결국 임명권자인 천황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인데 살아있는 신(神)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은 철저한 관료사회라 할 수 있고 전 후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이런 관료들과 일란성 쌍생아라 할 수 있는 샐러리맨들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희생을 해야 하는 농촌 지역엔 '하얀 코끼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선심성 지역 공공 사업을 몰아주고, 격무와 저인금에 시달리던 도시 직장인들에게는 종신고용이라는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저항 세력은 원천봉쇄 당하고 만다. 그 결과 잘못 끼워진 단추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의존과 종속 관계 또한 공고해졌다. 



미국의 외교 정책과 노선을 함께하고 일본 내 미군기지 비용을 부담하는 한, 일본의 엘리트 지도층은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 보안 당국의 은밀한 협조를 얻어가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려왔다. 아베 입장에서는 미국이 그토록 요구하던 것들을 다 들어주었으니, 이제는 세계 최강인 미군의 무조건적인 후원을 믿고 중국을 향해 내키는 대로 대응해도 된다는 생각했던 듯싶다. (...) 미국은 물론 일본이 중국과 독자적인 친분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오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중국과 정면 대치의 갈등 상황으로 치닫는 시기와 조건 또한 일본의 뜻대로 선택하도록 놔두지 않으려 했다. -574쪽 

 


결론부터 말해 보겠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든 동해 표기 문제든 위안부 문제든 역사왜곡 문제든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분쟁에 있어서 미국은 언제나 일본 편에 섰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이 확실하다. 

누가 더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국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이 언제까지나 외교와 국방을 미국에 맡겨놓을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전통적인 강대국이 건재하며 이 둘 사이엔 남한과 북한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역학 관계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고, 미국은 현재 일본(가끔씩 한국)을 지렛대 삼아 동북아시아 역내 문제에 개입하고 있지만 결국엔 역외 국가일 뿐이다. 

일본이 열도를 움직여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가 아시아를 탈출할 수 없는 한, 일본은 언제까지나 동북아시아에 남아 있어야 하고 미국은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다.  


당장 미국과 손절하라는 뜻이 아니다. 일단, 미국과의 관계에 특별한 영향을 주지 않는 분야 특히 역사와 영유권 분쟁 등에서 일본이 미래지향적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인정함으로써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야말로 일본으로선 가장 효과적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십대 때 처음 일본 땅을 밟은 후 40여 년 동안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인 저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일본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단순히 상대의 좋은 것만 좋아하는 제한적 사랑이 아니라 단점과 트라우마까지도 이해하고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행간마다 느낄 수 있었다. 부러웠다. 한국에 대해 이 정도의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외국인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K-pop을 즐기고 BTS에 열광하며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것 말고 한국인의 내면에 새겨진 결과 무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외국인 말이다. 앞으로 십 수 년이 흐른 뒤라면 모를까 지금까지는 없는 것 같다.


'일본의 굴레'를 보면서 '한국의 굴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본이 짊어진 그 굴레는 한국의 어깨 위에도 얹혀 있었다. 




참고로, 나는 마리우스 잰슨의 <현대일본을 찾아서>를 읽은 직후 바로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두 책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었다.

<현대일본을 찾아서>는 일본에 관한 저술로는 명저 중의 명저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역사 서술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다소 학문적이고 후자보다는 조금 더 클래식하다면,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는 역사보다는 전쟁 이후의 현대 일본 사회와 정치를 기술하는데 더 많이 치중했다. 전자보다는 훨씬 더 읽기 쉽고 조금 더 캐주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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