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비교 통사 - 역사상의 재정립이 필요한 때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박은영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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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중일 세 나라를 모두 아우르는 역사서는 접해보지 못했다.

내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비교적 일찍(?) 한국 역사를 자신의 학문 세계에 포함시켰던 저자의 이 책조차도 2020년도에서야 출판되었으니, 한국의 역사관은 여전히 애국심 고취가 주목적인 국내용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다.

한국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함께 균형잡힌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저자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내 친일파의 공격을 피하지는 못한 것 같다.


K-pop은 일찌감치 일본에 진출했건만 우리는 법적으로 일본 연예인의 국내 공연조차 금지하고 있으면서 BTS가 일본 TV에 나오고 공연 티켓이 매진된 걸 메인 뉴스로 알리면서 자랑스럽게 여긴다.

10여 년 전만해도 한국의 아이돌 지망생과 출신들에게 일본 시장은 실력을 쌓고 스타로 도약하는 발판이었다. 

이제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춤과 노래를 배우려 오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건만 아직도 일본 노래나 연예인의 국내TV 출현이 금지되어 있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왜풍이 무서워서인가?

그렇다면 반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식민강점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어디 연예계뿐이랴.

역사 분야에서의 논란과 분쟁은 예상 외로 뜨겁고 끈질기다. 

물론, 독일처럼 전쟁의 유산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 일본의 국내 정치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정치 세력 역시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하면서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분쟁을 일삼고 있다.

이런 의도적인 분쟁에 한중일 세 나라 국민 모두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나라의 자국 중심적인(심지어 왜곡된) 역사 교육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중일 세 나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으로 긴밀했던 세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이를 위해 세 나라 역사 학자들의 공통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한국의 역사를 배우고 연구한 대표적인 일본 역사학자로, 이 책은 한중일 세 나라의 공통된 주식인 '쌀'을 생산하는 농사 방법과 변화를 중심으로 세 나라가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비교 분석한 책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했으나 읽기에 어렵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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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세 나라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듯하면서도 상당히 달랐는데, 특히 중국과 한국보다는 일본의 이질성이 더욱 두드려졌다. 


우선, 유교(주자학)의 수용 면에서 그렇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중국과 한국 및 일본에 순차적으로 전래되어 고대 국가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한국에선 적극적으로 수용된 반면, 일본에선 에도 시대에 양명학이 일본 지식층의 관심을 끌었을 뿐 근대에 이르기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과거제도의 유무였다. 

일정한 시험을 거쳐 관료를 뽑는 과거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국과 한국 및 베트남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제도였다. 

세습 귀족을 억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채택된 과거 시험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대대로 세습되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단히 근대적인 제도였다. 과거 제도 덕분에 중국과 한국에선 전문적인 시험준비과목이자 학습서로써 주희의 주자학이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중세를 마무리하고 근세로 접어든 조선 역시 고려의 문벌 귀족 대신 유학자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다. 반면, 문(文)보다는 무(武)가 지배적이었고, 무사 출신인 쇼군에 의해 다스려졌던 일본에서는 과거 제도가 수용될 수 없었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통치 시스템이 절실했던 에도의 지배층은 조선을 통해 유학에 접근했지만, 충(忠)보다는 효(孝)를 숭상하는 주희의 주자학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국 전국 시대에 공자에 의해 창시된 유가의 가르침, 곧 유교는 한대(漢代)에 국교가 된 이후 국가체제에 큰 영향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주자학 이전의 유교는 사상으로서 체계화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특히 불교가 유입되고 나서는 지배적인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따라서 주자학은 장대한 체계를 가진 불교에 대항하는 가운데 태어난 새로운 유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주자학의 성립을 전후하여 유교 자체의 면목이 완전히 일신되었다. 더욱이 주자학의 탄생은 그것을 낳은 계층인 과거(過擧) 관료층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사상계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존재 양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4쪽

중국 화북의 농업은 그 기후적 조건 때문에 축력(畜力)의 이용이 불가피하므로 가족 경영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역축(役畜)을 소유한 대경영과 거기에 보조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영세 경영 내지는 예속적 노동력의 존재라는 이중구조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약도작의 발전은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소시켜 가족경영의 보편화를 초래했다. (...) 송학(宋學), 특히 주자학은 이와 같이 대두한 농민층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를 강하게 의식한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생래적인 신분의 차이를 부정하고, '배움'의 차이를 통해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하고자 한다. 따라서 주자학은 귀족적인 체제를 부정하고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통해, 즉 실력으로 지배 엘리트가 된 사대부층에 적합한 사상이면서 동시에 경영 주체로서 성장해 온 '민(民)'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를 자각적으로 의식하는 가운데 성립한 것이다. -46쪽




그 다음은 지배구조였다.

주지하다시피, 중국과 한국은 일찌감치 조공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군신 관계를 구축했다. 

한국이 중국 대륙을 천자로 받들고 신하의 신분에 머물렀던 가장 큰 원인은 원에 의한 침략과 100여 년에 걸친 원간섭기로부터 기인한다. 원이 멸망하고 고려가 다시 일어섰더라면 한국 역시 일본처럼 무를 중시하는 체제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학을 신조로 삼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새로운 나라 조선이 건국되면서 중국 대륙을 천자로 스스로를 낮춰 자발적으로 신하의 자리에 머물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국 대륙이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음에도 이미 사라진 명을 떠받드는 건 무엇 때문인가?

이건 명분일 뿐이다.

이미 지배세력으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사대부로선 새로 부상하는 학문이나 사상 체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당시 사회에 필수불가결할지라도 문호를 개방하기보단 쇄국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18세기 말 이후 조선 근해에도 서양 선박이 빈번하게 출몰했다. 이들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정부는 그 요구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특히 청과의 책봉 관계를 내세우면서 독자적으로 외교를 할 권한이 없다는 점을 거부의 이유로 삼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취했다. 그러나 유럽이나 세계정세에 관한 정보는 상당히 부족한 상태로 17,18세기 서학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도 외부세게에 대한 관심은 매우 약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후반이 되어 유럽이나 미국, 나아가 일본이 무력을 배경으로 강력하게 통상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대 적절한 대응을 어렵게 했다. -150쪽




반면, 중앙집권화도 통일된 사상이나 사회체제도 아직 성립되지 않았던 일본은 15세기 초반 서구에서 시작된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종착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엔 태평양과 동지나해까지 이어지는 일본 제도의 지리적인 이점과 섬이라고 하기엔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일본에 비해 황해와 동해가 마치 호수처럼 둘러쳐져 있고 대륙 깊숙이 폭 들어앉은 한반도는 영토도 작았고 인구도 적었다. 여기에 더해 체제 수호 경향이 강한 중앙집권적인 왕국 체제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으니, '대항해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에겐 조선은 그냥 지나치는 간이역이었다. 




마지막으로, 군현제이냐? 봉건제이냐? 의 차이점이다. 

모든 통치자는 직접 통치를 지향한다. 그러나 다스리는 영토가 넓을수록 다스려야하는 인구가 많을수록 중앙집권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대리자에게 땅을 나눠주고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하여 영토를 수호하면서 황제를 대신해 다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는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봉건제는 지역 봉건 영주의 힘이 커지고 황제의 힘은 약해지는 생태적 특징으로 군사적 충돌과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국은 봉건제와 군현제가 번갈아 등장하다가 수당을 거쳐 송(宋) 대에 이르러서야 군현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다. 한국 역시 삼국 시대라는 혼란기와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를 거쳐 송과 동시대인 고려에 접어들면서부터 서서히 군현제가 정착된다.  

반면, 일본은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를 거쳐 전국시대에 들어선다. 전국시대는 일본의 봉건 영주인 다이묘(번주)들 간의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로 60여 년 간 이어진 이 혼란기를 오다 노부다가가 끝내면서 일본도 중앙집권화로 접어들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예상치 못하게 빨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후 일본은 도요토미와 이에야스를 거치면서 서서히 덴노-쇼균-다이묘로 이어지는 봉건체제가 구축된다.

중세 서양의 봉건제와 가장 흡사한 사회 구조였던 일본은 지정학적 위치와 함께 봉건제라는 사회구조 덕분에 동아시아에서 발전이 가장 뒤처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장 먼저 서구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른바 '서양의 충격'에 직면하게 된 동아시아 각국은 무엇보다도 구미의 군사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은 참으로 파란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 과정을 규정한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서구에서는 18, 19세기에  형성되는 국민국가의 체제와 유사한 체제를 동아시아의 국가, 특히 중국과 조선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
이러한 유사성은 중국이나 조선에서 '서양의 충격'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 특유의 어려움을 부과했다. 즉 양국에서도 19세기 말기가 되면 국가체제의 개편이 과제로서 인식되기 시작했으나, 과연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 파악 자체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아시아 가운데 일본의 경우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 농업 면이나 문화 면에서의 공통성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와 공통된 부분이 있었던 반면, 국가체제 면에서는 동시기의 중국, 조선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유사성의 다수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서양의 충격'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크게 규정하는 것이었다. 곧 무엇보다도 군사적인 위협이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던 구미에 대해, '무위(武威)에 의한 평화'를 체제이념으로 한 막번체제로서는 그 존립기반을 곧장 위협받는 것이 되므로 부득이 민첩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154쪽




'왜 유럽인가?

라는 질문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와 프로테스탄티즘"라고 답했다. 

나는 한 때 이 말을 철썩같이 믿었더랬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을 읽어본 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네가 아니고 나니까"라는 대답처럼 결과론적인 혐의가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뛰어난 문헌고증학자이자 사회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는 유럽인이라는 원초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않고 학문적으로 그 안에 안주해버렸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윤리>는 철저하게 유럽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럽의 세계화 분석에 불과하다.  



'왜 일본인가?'

늘 품게 되는 질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리더는 누가 봐도 세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중국(청)이었지 변방의 섬나라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동안 너무 한국인다운 사고 패턴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비한국인의 사고 방식을 알기 위해 스스로 비한국인의 길을 택할 필요는 없다. 비한국인을 편견없이 바라보려는 노력만으로도 시야가 확대될 수 있다. 

고개 숙여 자세히 보기 전에 우선 고개 들고 멀리 봐야 한다. 그럼, 세상은 두 배로 넓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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