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터키사 -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터키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터키사는 이란의 페르시아와 자주 혼동하지만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한 축을 이뤘던 튀르크족의 역사다.

한자로는 돌궐(厥)이라 불렀으며, 중국 역사서에는 한무제가 북방의 흉노를 막기 위해 장건을 월지국에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발전할 무렵인 6세기경, 튀르크족은 우수한 철 생산 기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연(몽골 지방에 살던 고대의 유목 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 이때 튀르크족을 이끌던 사람은 부민(토문)이었다. (유연의 공주와 결혼을 하려 했으나 아나괴가 거절하자) 이 기회를 노려 부민은 스스로 '일릭-카간', 즉 '나라를 세운 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뒤 중국(당시는 서위)과 손잡고 유연을 공격했다. 이들의 공격을 받은 유연은 멸망했고, 아나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국 <자치통감>이라는 역사책에서 이 일을 "돌궐의 토문이 유연을 습격해서 크게 격파하다. 유연의 아나괴(두병가한)가 자살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부민은 튀르크인의 나라가 탄생했음을 선언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인 552년의 일이다. 이때 부민이 세운 나라가 튀르크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로, 터키는 이해를 건국의 해로 기념하고 있다. -69쪽 




역사적으로 현대에 좀더 가깝게는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가 바로 이들 민족이 세운 제국들로 아나톨리아지방 뿐만 아니라 아랍과 북아프리카까지 다스렸다. 특히, 비잔틴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사이에 1077년 또다른 튀르크족이 룸 셀주크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고원 지대인 콘야로 수도를 옮기고 십자군을 막아내면서 명실상부 아나톨리아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터키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룸 셀주크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으면서 늙어가는 비잔틴 제국을 위협했지만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진다. 중앙 초원에서 불어닥친 폭풍이 사그라든 뒤 오스만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나타나서 다시 튀르크족을 통합하여 오스만 튀르크를 세웠다. 이 오스만 제국의 4대 술탄인 메메드 2세에 의해 비잔틴 제국은 멸망하고 일찌기 그리스인이 세웠던 도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이 튀르크족의 손안에 들어온다. 

도시 이름도 이슬람의 도시라는 뜻인 '이스탄불'로 다시 한 번 바뀐다.


그리스정교회의 상징인 성소피아성당과 토프카프궁전 및 여섯 개의 미나레트가 돋보이는 블루모스크가 공존하는,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역동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200여 년이 지나면서 제국은 성장을 멈추고 정체되기 시작하는데, 그 첫걸음은 지혜와 용기로 제국을 이끌었던 술탄들의 무능과 향락 그리고 군대(예니체리)의 부패와 타락이었다. 

때마침 유럽은 길고 긴 암흑기를 지나고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독일 등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온도가 높아지는 물속에 있는 개구리처럼 변화하는 세상을 눈치채지 못한다. 물론, 몇 차례의 크고 작은 개혁 시도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귀족과 예니체리 등 기득권층의 저항에 물러나고 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개혁의 주체인 술탄이 스스로 개혁의 대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만 제도를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치 두 차례의 커다란 외침을 받고도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는 왕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선조와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을 보는 것만 같다.  이때부터 조선이 정조대왕이라는 뛰어난 왕이 뒤늦게 나타났지만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되돌리지 못하고 19세기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듯이, 오스만 제국도 솔로몬의 이름을 딴 슐레이만이라는 술탄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터트리지만, 이집트와 불가리아, 그리스 등이 차례로 제국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여러 제국 가운데 환자가 있다."
1851년 페테르부르크 궁전에서 영국 대사를 만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라고 비꼬았다.  세 대륙을 주름잡고 동지중해를 호수로 삼으면서 서유럽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유럽의 놀림감이 되었고, 심지어 작은 나라인 그리스와의 싸움에서도 쩔쩔매는 종이호랑이로 풍자되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던 데 비해 오스만 제국은 정체와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쪽



당시 유럽에 오스만이라는 환자가 있었다면,  아시아엔 청이라는 환자가 있었다. 

둘 다 엄청난 영토와 인구를 거느린 제국이었지만 넘쳐나는 부와 지속되는 평화에 안주해버린 결과였다.

프로이센(독일)이 유럽의 풍운아로 빠르게 성장 발전하면서 주변국에 위협을 가했다면 아시아에선 일본이었다.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인 영국 그리고 정통의 강대국인 프랑스는 그렇다치더라도 유럽 변방의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러시아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군대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놀랍고 신기했다. 다음 번 세계사 여행(?)은 러시아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렵사리 실현된 의회민주제마저 경제성장에 불만을 품은 민중의 시위를 틈타 일어난 쿠데타와 술탄의 복귀로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다시 30여 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버리면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삼국동맹(독일, 폴란드-헝가리, 이탈리아)편에 서서 패전국이 되고 만다. 그나마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젊은 장교의 리더십으로 오스만 제국은 술탄과 이슬람주의라는 썩은 부위를 잘라내고 1923년 세속주의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터키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터키는 이슬람국가 중에서 가장 세속적이며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다. 하지만 쿠르드족 탄압과 중개무역에 뿌리내린낡은 경제구조로 1960년과 1971년 그리고 1980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여전히 제자리를 잡지 못한 모습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2인자들(독일, 러시아, 일본 등)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인류의 역사를 좀더 길고 멀리 본다면 더 큰 변곡점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9세기~20세기에 걸친 200여 년이라는 시간은 제국이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엔 서서히 내리막길을 내려간 시간에 불과했다.  


터키는 한국전쟁 때 연합국 편에 서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1만5천 명을 참전시켰던 나라라고 한다. 그런 터키가 현재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성장한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심정이 어떨까? 

'피를 나눈 형제국'이라는 인삿말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때 제국이었던 나라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부심으로 마음을 채우기 전에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역사의 순환 과정에서 최저점은 각 민족마다 제각각이지만 최정점만큼은 '이제 이만 하면 됐다'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순간이라는 거다. 


한 국가(왕조)의 탄생과 성장 및 멸망을 보통 300년으로 본다. 

우리나라는 1950년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했으므로 그뒤 100년은 재건과 성장의 시간이 될 테고 우린 그 시기를 잘 헤쳐오고 있다. 앞으로 100년 동안 국력을 더한층 응축시켜 발산시켜 나갈지, 아니면 거란의 요나 발해 및 티무르 제국처럼 100년 제국으로 끝나고 말지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 자체가 눈 내리는 광야에 절망 대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듯, 우리도 먼훗날 백마타고 올 초인을 위해 희망의 씨를 뿌려야하지 않겠는가.



역사를 배운다는 건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과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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