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일본사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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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일본사를 배워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일본 소설이나 인문서적은 읽었을지언정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왜 일본의 역사는 잘 모를까?'


 

단순한 우연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지 않으려는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학창시절엔 그저 우리나라와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 위주로 그것도 주로 피해자로서 가해자의 악랄함을 고발하거나 미개한 일본에 선진문명을 전해준 것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역사만을 배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고대 일본은 미개하지도 않았고 문화가 우리나라보다 떨어지는 것 같지도 않다. 특히, 대대로 덴노(天皇)가 거주하고 있는 교토는 천년고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것만 무려 17개나 된단고 하니,  2차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폭격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도요데미 히데요시가 지었다는 오사카 성은 사진만으로 봤을 뿐인데도 규모와 화려함에서 솔직히 조선의 왕궁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탈아입구(脫亞入歐)'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일찍부터 앞선 것들을 배우고 모방하는 것을 부끄러워지 않았다. 네델란드 상인이 드나들 때 그들은 엽총 두 자루를 비싼 가격에 사서는 그걸 분해해서 원리를 익히고 배웠다. 네델란드인이었던 하멜 역시 조선에 표류했지만 우리는 그냥 그를 붙잡아 놓았을 뿐이다. 왜 그를 통해 바깥 세계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 밖에도 태자는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오키미 대신 덴노(天皇)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덴노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말에 즉위한 덴무 덴노 때부터였지만, 쇼토쿠 태자가 집권할 때부터 이미 주기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처럼 쇼토쿠 태자는 덴노 중심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온힘을 다했다. 1984년까지 1만 엔짜리 지폐에는 쇼토쿠 태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 역사에서 쇼토쿠 태자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몸소 실천한, 남의 것이라도 좋다면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이이토코토리' 정신은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은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 태도는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39쪽

 



 

'우리는 선진문화를 일본 열도에 전수해 줬다?' 


 

아직기와 왕인 뿐만 아니라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기술자들이 많았다. 이들을 '도라이진(渡來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모여살았던 장소며 남긴 유적과 유물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야만족에 가까운 해적(왜)에게 선진문화와 기술을 전해줬다고 배웠다. "그런데, 왜?" 아무 댓가없이 사람과 기술 및 서적 등을 제공해줬을까? 

그당시 일본은 지역으로 나눠져 서로 힘을 겨누며 싸우는 춘추전국시대 같았다. 군사력이 강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여 배운다? 힘 쎈 유목민이 약한 정주민에게 굽실거리면서 약탈한다는 말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대도 왜 단한번도 이런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대로 어쩌면 백제는 일본의 군사력이 무서워서 자발적으로 혹은 강요에 의해 인적 물적의 형식으로 조공을 바쳤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을까? 

중국 대륙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중국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던 일본을 등한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역시 사대주의가 불러온 우리 역사의 또다른  불상사라 하겠다.  

 


 

<일본서기>에는 삼국 문화의 전래 기록이 무수히 등장한다. 삼국 중에서도 백제가 일본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백제의 왕인이 유학과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도 우리 역사책이 아닌 <일본서기>에 전한다. (...) 일본에서는 왕인을 고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전파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불교문화다. 백제가 불경과 불상을 전파함으로써 일본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졌다. 이후 백제는 승려뿐 아니라 기술자까지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 발전과 사찰 건립에 이바지했다. (...) 이때 꽃핀 것이 일본의 아스카 문화였다. (...)
그러나 군사적 교류 관계를 살펴보면, 고대 일본이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단순한 주변 국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고구료, 백제, 신라 등과 각축을 벌이면서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에 적극 참여한 측면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왕자로서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동성왕, 무령왕을 빼더라도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 '박제상 설화'를 보면 당시 일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88~89쪽

 

 


 

'일본의 군국주의는 바쿠후(幕府) 체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사무라이 즉 무사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 최초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건 우리나라의 무신정변과 비슷한 시기(1192년) 가마쿠라 바쿠후였다. 가마쿠라 바쿠후는 100여 년을 존속하다가 무로무치 바쿠후에 바톤을 넘겨준다. 일본의 천황은 '신인'으로 상징성을 띄었을 뿐 실질적으로 정치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마치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와 '술탄'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將軍) 밑엔 봉토와 사병을 거느린 번주가 있었다. 각 장원의 번주들은 서로 경쟁하고 때론 물리적 충돌을 하면서 쇼군을 갈아치우기도 하는 등 늘 무사들이 사회의 지배층을 자리잡았다.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들어서기 전까진 신분제가 고정되어 있지는 않아서 하층민이었던 도요데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이 무사가 되어 장군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가 들어선 후 직업 세습을 통한 신분제를 고착시켰다. 사회적 지도층이었던 무사들은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상류층을 유지하며 유지되는 일본 사회는 늘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고 16세기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인이 무인 위에 군림했던 조선의 상황과는 정반대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19세기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스스로 권력을 덴노인 메이지에게 이양할 때까지 내전을 치를 때 단 한 번도 외세를 불러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군사지향성을 꿰뚫어본 미국 등 서구열강들이 다른 아시아 국가와는 다르게 일본을 대우하고 평가했음은 당연하다.  

 


 

'만약 갑신정변이 성공했더라면?'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소위 '아시아의 우등생'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교육과 실용기술을 중시하고 열심히 배웠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따라 배우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이 양무운동에도 불구하고 서양세력을 제대로 상대하질 못했고, 조선 역시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면서 일본은 아시아 국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렸다. 특히, 청일전쟁이야말로 일본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향하게 하는데 이정표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만약 청일전쟁에 졌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역사가 쓰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 만약 갑신정변이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조선의 왕정이 폐지되거나 입헌군주정으로 돌아선 후, 일본을 가까이 하면서 배우고 함께 움직였더라면 우리나라 역시 전혀 다른 역사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1만 엔 지폐에 새겨진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서양의 근대 문화를 일본인들에게 소개하고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근대화의 선구적 인물인 후쿠자와 유키치다. 사족 출신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에도 바쿠후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발전된 모습을 접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는 서구 열강의 발달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청과 같은 아시아 여러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비참한 상황도 접했다. 당시 일본 사회에는 일본 역시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팽배했는데,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학문의 권장>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1872년 간행된 <학문의 권장>은 근대화의 길목에 선 일본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이다. -270쪽

 

 


 

'아시아의 모범생에서 전쟁광으로 변신하다'

 


일본 역시 자발적으로 개항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1858년 패리 제독의 강압에 의해 일미통상조약을 맺은 후엔 빠르게 서구를 모방하고 따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지식층의 역할이 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게이오대를 세우고 아시아의 공동 발전을 꿈꿨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는데 자본을 쾌척했단다. 김홍집 역시 일본으로 그를 찾아가 적극적으로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양무운동에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는 청과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러시아로 기우는 조선을 보면서 '아시아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탈아입구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때까지만 해도 톈진조약을 맺으면서 청에 밀렸던 일본은 그위 10년 동안 빠르게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1895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측이 의도적으로 도발하여 일어난 전쟁이었음은 물론이다. 일본은 외세와의 대면을 피하거나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닌 게 아니라 충돌을 피하지 않았고 실력을 가늠한 후 부족한 점을 적극적으로 키운 후 다시 그 실력을 확인하려고 했다.

조선과 청과는 다른 일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일본에겐 호연지기가 있었고 조선과 청에겐 없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특수를 누리던 일본 경제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불황에 빠지자 승전국임에도 얻은 게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다.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난과 민중 시위가 일어나는 등 혼란한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난다. 입헌군주정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수상이 암살당하면서 소수의 군인들이 덴노를 방패막이로 내세워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구 열강들 간의 패권 전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군인이 정치를 하게 되자 군부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갈 수밖에 없었고, 1차세계대전에 이어 1936년 중일전쟁일, 1941년 진주만 공격 등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첫 단추는 잘 끼었지만 중간에 단추 한 개나 어긋난 형국이라고나 할까.

 

 


'패전국에서 어떻게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을까?'


 

미국은 일찍부터 중국 및 동남아시아의 중간 기항지로서 일본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1858년 패리 제독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미수호조약을 체결한다. 미국은 군부간 충돌을 지켜보면서 일본 사회 특우의 무사 우위 사회의 군사력과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그뒤 일본을 막무가내식으로 억압하지 않고 아시아 침략의 앞잡이로 활용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서구 선진국이 되려는 일본과 미국의 의도가 맞아떨어진다. 1905년 청일전쟁 후 포츠담에서 전후처리를 논의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세계외교무대에 소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공산주의국가인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던 미국은 회담 전에 이미 일본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일본에게 유리하게 회담을 이끌어서 러시아 대표들이 한 차례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였다. 

이런 미국을 먼저 공격했고 전쟁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종전 후 미국은 일본을 다른 패전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우하는데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철저히 미국 국익에 유리하도록!

일본을 러시아와 중공 세력의 확대를 막는 방패막으로 삼고, 오키나와를 미국의 태평양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의도가 명백했고 실제로 미군정은 오키나와를 1972년에서야 반환한다. 

 

 


'헤이안 시대 이후의 일본은?'

 


패전 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수립했지만 90년 대에 접어들어 군사대국을 꿈꾸면서 헌법 수정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엔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무장 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에 따르는 비용 증가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이 좀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기를 바라고 있고, 이럴 능력을 갖춘 일본은 그 반대 극부로 군대를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대다수 일본인은 헌법 수정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일본 우익 정부와 국민의 견해차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정상군대'라는 망토를 흔들었다가 등뒤로 감추는 미국의 꼭두각시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6000여 개나 넘는 시민단체의 힘과 평화를 사랑하는 대다수 일본인의 바람에 따라 과거사를 청산하고 아시아의 모범생으로 되돌아올 것인가?

일본이 설령 '탈구반아(脫歐反亞)' 한다 하더라도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꿈을 버리지 않는 한, 그건 역사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그건 일본이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역사를 잘못된 과거로 반성하지 않고 되돌아가고 싶은 영광의 시절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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