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 -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김혜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남자가 걸어온다.
큼지막한 캐리어를 갖고 있어서 언뜻 여행객처럼 보이지만 그는 노숙자다. 이제 막 중앙역으로  굴러 떨어진...
술판과 악취와 욕설이 난무한다. 그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다.  한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캐리어에 넣어둔 돈은 그대로다. 적지만 그거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안도감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모두 없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이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이나 자존감, 그런 것들이 정말 있다면 그건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떨어뜨리고 마는 거다.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되는 거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오는 최악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29쪽

 

여자는 늙고 아프다.
남자와 여자는 밤을 기다린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나란히 눕는다. 추억할 과거도 기약할 미래도 없는 이들에겐 오직 현재 뿐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란 불청객이 불쑥 끼어들테니까...

종일 별다른 것을 먹지 않아도 여자의 배는 늘 불룩하다. 임신한 것처럼 솟아난 그 배가 거슬리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많다. 자꾸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곧 스스로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86쪽

 

 

남자는 아픈 여자를 돌보고 아픈 여자는 남자 주위를 맴돈다.
이게 과연 사랑일까?   
만약 사랑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너와 여자의 관계는 이곳에 있을 때만 유효한 거다. 팀장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벗어나는 즉시 너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될 거다. 그렇게 단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속하지 않은 그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내겐 이 여자가 전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35쪽


작품 해설에서 지적했듯 이 작품을 읽는 독법은 여러가지다. 어떤 작품인들 단 하나의 독법만 있을까마는...
암튼, 평론가는 '희생당한 인간(호모 사케르)'과 '사랑하는 인간(호모 에로스)' 그리고 '희망 혹은 절망하는 인간' 이렇게  세가지 접근법을 제시한다. 


일단 작품의 주인공들은 노숙자다. 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거리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산업화 사회에서 아니 인류 사회에서는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자는 늘 존재해 왔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노숙자를 지원하는 센터나 임시 쉼터 등등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노숙'만큼은 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노숙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희생당한 인간에 대한 연민만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아선 안된다. 두번째는 육체적 욕망으로써 표출되는 사랑의 실체다. 남자와 여자는 절망할수록 생의 끝으로 다가갈수록 에로스에 몰입한다. 아름답게 포장된 사랑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내 육체가 혐오스럽다. 사는 게 이토록 힘겨운데 쉬지 않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허기를 느끼고 다른 누군가의 체온을 바란다는 게 징그러울 정도다. 인간다움과는 먼 이런 방식으로 내 몸이 바라는 걸 해결해줘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아무렇게나 아무데서나 몸을 섞고 신음을 내뱉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가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 -285쪽

 

 

 

짝짓기 후 숨을 거두는 자연계의 많은 생명체들처럼 남자와 여자는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임을 웅변한다. 작가는 사랑을 불쾌하고 역겹고 심지어 자기파괴적인 지경으로까지 추락시킨다. 더이상 물러설래야 물러설 곳도 없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도 없는 곳으로 사람을 몰아부친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제 끝이구나' 생각한 순간, 불연듯 앞부분에서 스쳐가듯 지나쳤던 한 문장이 튀어올라왔다. 

 

 

이게 젤 밑바닥인 거 같지? 아냐, 바닥 같은 건 없어.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161쪽

 


나는 이 문장에 전율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을 선전하지도 자기희생적 사랑의 숭고함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이게 희망의 끝인 것 같지? 아냐, 희망 같은 건 없어. 희망이라고 생각한 순간 또다른 걸 희망하게 돼.'
'이게 절망의 끝인 것 같지? 아냐, 절망 같은 건 없어. 절망이라고 생각한 순간 또다시 희망하게 돼.'
'이게 사랑의 끝인 것 같지? 아냐, 사랑 같은 건 없어. 사랑이라고 생각한 순간 사랑이 아닌 거야.'



마지막 세 번째는 완전한 절망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속 "그"는 완전한 절망을 바라 광장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다시 희망을 바라게 된다. 미래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미래를 꿈꾸자 현재는 형편없는 요구를 해온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채무증서처럼 시간은, 갑자기 그를 몰아세운다. 희망은, 그보다는 절망을 계획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유혹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완전한 절망의 불가능성을 통해 온전한 희망 역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 된다. 삶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절망이나 희망의 몫은 없다. - 작품 해설 <캐리어 혹은 탈구된 영혼에 대하여>  중  by 강유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네가 필요하다.'
나는 이 작품을 모든 실존의 시작이요 끝인 이 단 한마디로 귀결짓고 싶다


멀리 돌아왔다.
한참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첫 번째를 거쳐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 독법에 도달해 있었다. 
여러가지 시선으로 읽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면 김혜진의  『중앙역』처럼 여러가지 시선 전부로 읽히는 작품은 어떤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원래는 이 작품이 목표가 아니었다.  
호평 일색인 『딸에 대하여』를 읽기 앞서 예행연습(?) 차원에서 집어든 작품이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였기 때문에 일단 '스타일'을 알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목표로 한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제 이 작품은 '맛보기용' 혹은 '머리식히기용'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작가 김혜진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앞으로 얼마나 멀리 나갈지... 얼마나 빨리 달릴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그저 김애란이나 황정은의 작품을 읽고난 것처럼 호흡이 빨라지고 신열이 나고 얼굴이 달아오를 뿐이다. 솔직히 난지금 '멘붕' 상태다.  '거인'을 만난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젊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