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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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부터 쿡방 먹방 들이 이렇게 많아진 거지?'

어쩌다 TV 앞에 앉으면 뉴스를 제외하고는 음식과 연관이 없는 프로그램은 손에 꼽을 정도다. 

채널마다 음식점 소개 혹은 요리 관련 프로가 방영되고, 심지어 홈쇼핑에서도 여차하면 먹거리들을 판매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미식의 시대를 너머 탐식 심지어 폭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만 같다.  


'저 많은 프로그램들이 정말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걸까?'

'저렇게 다양하고 고급진 음식들을 직접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건강식은커녕 끼니조차 제때 챙겨먹기 어려운 게 대다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지 않을까?'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데에는 먹방만한 게 없다는 것일까?'

'음식 방송이야말로  방송국 입장에선 저비용으로 손쉽게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이란 말일까?' 

 

나도 모르게 넋놓고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순간 수치스러워졌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고민과 질문들을 모두 뛰어너머 그저 '먹고 산다'는 것, 생명체라면 벗어날 수 없는 그 고된 숙명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밀려왔다.


'식(食)'과 '생(生)'

'먹고 산다'는 이 한마디만큼 단순 명료하게 인간을 정의내릴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모두 '먹는 인간'일 뿐이다.

 


 

1949년에 마닐라에서 열린 전쟁범죄 재판에 나가 증언하기도 한 농민 칼메리노 마햐야오가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았다. 1946년부터 1947년 초까지 이 마을과 주변에서만 서른여덟 명이 잔류 일본병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먹혔다. 머리 부분 같은 잔해 혹은 먹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언으로 사실은 명백해졌다. 하지만 일본 측은 단 한 번도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67쪽


1993년도 소말리아 부흥과 인도적 문제 해결을 위한 원조 금액이 1억 6600만 달러인데, 그에 따르는 유엔의 군사 활동에 15억 달러가 넘게 든다고 한다. 식량 1달러당 군사비가 10달러. 이상하다.  겉보기에도 그렇다. 유엔 활동단에 참가한 각 군의 장갑차나 헬리콥터의 소음이 모가디슈를 내리누르고, 주민들은 굶주린 배를 안고 웅크린 채로 있다. - 202쪽


1993년에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외국 통신사나 일본의 잡지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알았다.

함대의 훈련 기지에서 신병 수십 명이 영양실조로 입원하고 그중 네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 원인으로 함대의 재정 악화, 식량의 부정 유출 가능성을 암시하는 보도가 있었다. -247쪽


체르노빌에서 '먹는다'는 것은 여기까지 다다른 끝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행위다. 우크라이나는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를 맞고 있고, 월간 인플레이션율은 50퍼센트를 넘었다. 먹는다는 것은 오염 여부를 따지기 전의 절박한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면 눈앞의 풍경이 애절하고도 비장하게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 길에서 살짝 측정기를 보았다. (한 시간당) 1.0마이크로시벨트가 나왔다, 도쿄의 열 배가 넘는다. -293쪽



 

『먹는 인간』은 기자인 저자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세계 각 지역의 음식 문화(?)를 취재하고 작성한 기사문들을 모은 책이다. 다만, 여타의 현지 음식 취재와는 달리 이 책의 시선은 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먹는 '괴로움'에 모아져 있다.


저자의 카메라에는 사탕수수나 야생동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의 인육을 먹었던 일본 병사들과 식량원조 지원을 위해 진행된 군사 행동에 식량원조보다 열 배나 더 되는 돈을 쓰는 유엔평화유지군 및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버섯을 캐먹고 물고기를 잡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체르노빌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는 부자들이 먹고 남긴 음식들을 사먹는 빈민들이 존재하며, 러시아에서는 경제개혁 실패와 권력층의 부패로 영양실조에 걸린 병사들과 구걸하는 첼로 소녀를 만날 수 있고, 태국에서는 애완동물 사료공장에서 자신이 만든 통조림 값보다 조금 더 많은 급료를 받으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소녀도 있다.



 

이건 저자가 취재를 하던 당시의 모습일 뿐이라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 년이나 지난 일일 뿐이라고... 오늘날 세상은 훨씬 나아졌을 거라고... 항변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해마다 30%의 음식(13억톤, 약1조달러)이 버려지고 있으며, 유엔의 <2017 세계 식량안보 및 영양 상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기아인구는 전체인구의 약 11%인 8억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 속에 소개된  전 세계 각 지역의 에피소드들이 '빈곤과 기아'라는 단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는 건 아니지만, 인간이란 결국 먹고 사는 존재ㅡ살고 먹는 존재가 아니라ㅡ라는 부인할 수 없는 본질을 보여준다.  그래서 정확한 통계 수치나 기아 난민을 찍은 자료 화면들보다 훨씬 더 실체적으로 단 한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바로,

굶주림은 굶주리는 사람이나 배부른 사람 모두를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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