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네 집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6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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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작'하는 작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한 마디로 가능할 걸 열 마디하고, 한 장이면 될 걸 수십 장씩 남발하며, 한 권이면 충분할 주제를 두세 권씩 시리즈로 묶어내거나, 비슷한 문체와 구성으로 이 작품이 저 작품같고 저 작품이 그 작품같은, 소위 자기 자신을 무한정 표절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런 작가들이 국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이건 독자의 수준을 탓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출판사의 장삿속을 탓해야 하는 건지...


암튼, 나의 이런 편벽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박완서의 작품들을 애써 골라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완.서.가 누구인가?  

불혹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한 작가, 전쟁과 이산의 과거사 속에서 탄생한 작가, 팔순이 넘도록 작품 활동을 한 작가 등등...

그녀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 붙는다. 그만큼 그녀는 그 어떤 한 마디로도 규정될 수 없는 한국 문학의 거목과 같은 존재이지 않은가. 굳이 내가 찾아 읽지 않아도 이미 읽은 사람들 많고, 앞으로 읽을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을 작가다. 그런 그녀의 작품집을 불쑥 집어들었다가 화창한 봄날 오후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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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는 작가 생전에 펴낸 단편선집(총7권) 중 여섯 번째로 90년 대에 쓰여지고 발표된 작품 열 편이 실려 있다. 두어 편을 제외하고는 60대 이상 노년층이 주인공이거나 화자로 나온다. 정욕이 제거된 '그레이 로맨스'의 겉멋을 지적하는가 하면(「마른 꽃」),  평생 체면과 허영심에 얽매여 있던 육십 대 여성이 헛되이 애만 쓰며 보낸 하루가 펼쳐지고 (「너무도 쓸쓸한 당신」) , 부모는 열 자식 건사해도 열 자식은 부모 한 명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세태가 그려진다 (「환각의 나비」,「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꽃잎 속의 가시」) .



 

배꼽 아래는 참담했다. 볼록 나온 아랫배가 치골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면서 비틀어짜 말린 명주빨래 같은 주름살이 늘쩍지근하게 처져 있었다. 어제오늘 사이에 그렇게 된 게 아니련만 그 추악함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욕실 안의 김 서린 거울에다 상반신만 비춰보면 내 몸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또한 욕조에 잠겨서나 나와서나 내 몸 중에서 보고 싶은 곳만 보고 즐기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급히 바닥에 깔고 있던 타월로 추한 부분을 가리면서 죽는 날까지 그곳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 봐라, 하고 다짐을 했다.  - 『마른 꽃』 36쪽-



 

내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드러날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과 거기서 우수수 떨굴 비듬, 태산준령을 넘는 것처럼 버겁고 자지러지는 코곪, 아무 데나 함부로 터는 담뱃재, 카악 기를 쓰듯이 목을 빼고 끌어올린 진한 가래,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뀌는 줄방귀, 제아무리 거드름을 피워봤댔자 위액 냄새만 나는 트림, 제 입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끝없는 잔소리, 백 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 너무도 빤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 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 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마른 꽃』 46쪽-

조금은 과장을 하고 조금은 생략을 해도 좋으련만 그녀의 손끝에서 묻어나오는 노년은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적나라하다. 적나라하다 못해 꽃샘추위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듯 소름이 돋고, 뜨거운 태양 아래 장시간 펼쳐져 있던 생선 좌판 사이를 지나칠 때처럼 콧등에 주름이 잡힌다. 

 

지는 꽃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애잔하다 했던가.

사람도 젊음과 완숙미가 다 빠져나간 자리엔 스산함만 고인다. 영원한 소멸 앞에서 모든 생명체는 처연할 수밖에 없다. 

그냥 이대로 가자니 억울하고... 되돌아 가자니 되돌이킬 수도 없어 속만 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이 무력감이라니... 

지독하다. 산다는 건, 지독한 일이다.


오빠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종일관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마침내 끝났구나, 하는 얼굴로 상주 노릇을 했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무도 또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해한 영화를 보고 나면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한두 번 더 보게 되는 수가 있다. -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149쪽


 

남편은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위로가 필요 없는 인간처럼 참을 수 없는 인격이 또 있을까. 그의 체제 순응은 강요된 것도 의도적인 것도 아닌 체질적인 거였다. 그의 매력 없음의 본질 같은 거였다. 그와 다시 합친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생각하기가 싫어서였다. 그러나 오늘은 표면적인 별거의 이유가 완전히 소멸되는 날이다. - 『너무도 쓸쓸한 당신』 158쪽

 

 

한편, 이처럼 쓸쓸한 풍경만 담겨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나만 알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자화상들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아란은 깨끗하고 반득한 건물만 모여 있는 거리를 이방인처럼 달착지근한 향수에 젖어 유유히 거닐다가 그럴듯한 찻집에 들어가 랩을 들으면서 비 오는 날은 일 나가지 않고 샹송을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바보같은 엄마, 별난 파출부를 생각했다. 지금도 거금을 가지고 있긴 마찬가지인데 거짓말처럼 불안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렀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시는 그렇게 못나빠진 불안증에 걸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따개비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 살던 세상에서 어느 만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맛을 여유 있게 즐기고 나서 아란은 집으로 향했다. 너절한 동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여유를 두고 바라보니 영화 세트처럼 재미가 쏠쏠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돈이라는 윤활유가 넉넉해지면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을. - 『공놀이 하는 여자』 275쪽-


아란은 첩의 소생으로 태어나 본처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나 친부가 죽으면서 물려준 집 한 채에 그동안 쌓였던 모멸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심지어 본처 가족들을 용서하고픈 마음마저 생긴다.

돈 앞에서는 자존심도 존엄성도 없다. 아니, 돈이야말로 자존심이요 존엄성 그 자체다. 그래서 원래부터 갖고 있던 사람보다 없다가 갖게 된 사람들이 더 무서운 법이다.  예전엔 모욕인지도 몰랐던 모욕들이 불편인지도 몰랐던 불편들이 부끄러운줄도 몰랐던 부끄러움들이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아무리 지우고 털어내려해도 떨어지지 않는, 그 천박과 옹색과 거칠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학대한다.  왜냐하면 꿈엔들 나타날까 두려운, 잊고 싶은 자화상이니까....



 

집에 가면 우선 헌이한테 전화부터 걸어야지. 헌이하고 잔 게 얼마 만인지. 어서 헌이하고 자고 싶었다. 헌이 자기한테 시키던 온갖 굴욕적이고  야비한 짓거리를 그에게 시켜가며 데리고 놀고 싶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주도권이란 이렇게 간단히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을. 그의 비리비리한 팔뚝을 담뱃불로 지질 수도, 그로 하여금 방바닥을 기게 할 수도, 개처럼 헐떡이며 온몸을 핥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란은 혼자서 미친 듯이 킬킬거렸다.

헌하고 급하게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꿈은 더이상 일편단심 개천에서 용 나기를 기다리다가 기어코  개천에서 난 용의 조강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아니라도 개천에서 용 날 꿈에 매달려 사는 너의 여덟 식구만 해도 너에게는 버거운 악몽일 테니 나는 이제 개천바라기에서는 빠지겠노라고. 그렇더라도 헌의 쓸모가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용은  아니라도 필요에 따라 기둥서방을 삼을 수도,  싫증나면 헌신짝처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훗날 헌신짝처럼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 두려워해야 할 이는 이제 내가 아니라 헌이 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네가 아니라 나다. 여태껏 모든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의  주도권은 항상 가진 자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쯤은 너도 알 것이다.  - 『공놀이 하는 여자』  


 

박완서는 박완서다.

그녀는 남에겐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욕망을 들춰내는데 탁월하다. 마치 나만 알고 넘어가길 바랐던 일들만 용케 알고 일러바치는 얄미운 시누이처럼 감추고 또 감추고 싶었던 내 안의 욕망들을 헤집어내어 낱낱이 까발겨 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는 가시에 찔린 듯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리고, '그래, 너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표제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인 줄 미처 몰랐다.  

「그 여자네 집」은 작중 화자가 김용택 시인의 시 <그 여자네 집> 전문을 낭독하면서 시작된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작중 화자가 들려주는 사연인 즉, 대략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칠십 여 년 전 쯤, 하늘 아래 봄이면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마을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도 행촌리(杏村里)란다. 이 행촌리엔 만득이와 곱단이라 불리우는 어여쁜 총각 처녀가 살았더랬는데 둘은 동갑내기로 어렸을 때부터 서로 잘 어울렸더랬다. 그러던 어느날 만득이가 징병으로 차출이 되고, 혼례라도 서둘러 치러주려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곱디 고운 곱단이를 그렇게 데려오고 싶지 않았던 만득이는 꼭 살아돌아와 꽃가마 태워주겠다는 약속만을 남긴 채 전쟁터로 끌러갔더란다. 그러나 만득이가 돌아오기도 전에 마을마다 결혼 안 한 젊은 처자들만 골라서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하는 수없이 곱단이네는 서른 넘은 아이 셋 달린 홀아비에게 울며 불며 안 가겠다는 곱단이의 등을 떠밀어 시집을 보내버렸더란다. 살아돌아온 만득이는 곱단이가 시집갔다는 신의주쪽을 향해 목놓아 곱단이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 만득이는 하는 수없이 순애라는 마을의 또다른 처자와 얼떨결에 결혼을 하고는 서울로 도망치듯 이사를 나왔단다.


또다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 중국 단체 관광으로 압록강 유람선을 처음 타본 만득이는 압록강 푸른 물을 바라보다가 그만 '엉엉' 목놓아 통곡을 하고 말았단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직도 곱단이를 잊지 못해 그러냐고 시샘어린 한마디를 쏘아부쳤단다. 



 

웬지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사연이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부모님 혹은 우리 조부모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나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차고 넘치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만득이과 곱단이라는 젊은 남여의 슬픈 사랑 이야기지만, 이 작품은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사실적이고, 피해자의 피맺힌 고통뿐만 아니라 피해를 면한 자의 억울한 슬픔까지 담아낸 역사 그 자체다.    



 

비록 곱단이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곱단이가 딴 데로 시집가면서 느꼈을 분하고 억울하고 절망적인 심정을요. 나는 정신대 할머니처럼 직접 당한 사람들의 원한에다 그걸 면한 사람들의 한까지 보태고 싶어요.  당한 사람이나 면한 사람이나 똑같이 그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였다고 생각해요. 면하긴 했지만 면하기 위해 어떻게들 했나요?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십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나요?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기쁨, 그 향기로운 숨결을 모조리 질식시켜버리니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죠.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 알겠어요? 장만득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 『그 여자네 집』 213~214쪽-


'아!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마음'이라니...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지 30 년이 다 되어가고 1992년부터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건만, 일본의 정식 사과는 커녕 일본 정부의 악의적인 역사 왜곡과 일본 국민의 무책임한 역사 외면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당한 자의 한조차 미처 풀어주지 못하고 있거늘 무슨 여력이 있어 면한 자의 슬픔까지 어루만져 줄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나는 당한 자의 고통에 머물러 있었을 뿐 면한 자의 슬픔같은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 인식의 한계는 고작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역시, 박완서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전부 섭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속에선 언제나 그 누가 뭐래도 그녀의 대표작은 『나목』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 여자네 집』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이란 처음 읽던 다시 읽던 누구나 '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웬지 처음 읽는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읽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처음 읽어도 언젠가 한번은 읽었던 작품처럼 느껴지는 게 또한 고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박완서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고전이라 하겠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읽는다고 말하면 아직도 읽지 않았느냐는 핀잔을 받을 것만 같고, 처음 읽어도 언젠가 읽었던 것처럼 낯설지 않고 익숙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바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에게 일어났었고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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