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츠기 - 2024년 볼로냐 라가치상 대상작, 2024년 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 2024년 이탈리아 프레미오 안데르센상, 2024년 디픽터스가 뽑은 전 세계 눈에 띄는 그림책100권, 2024년 서울특별시교육청어린이도서관 겨울방학 권장도서 모두를 위한 그림책 79
이사 와타나베 지음, 황연재 옮김 / 책빛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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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작가 이사 와타나베가 상실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그림책을 지었다. 킨츠기는 깨진 도자기를 옻으로 이어 붙이고 금분으로 장식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공예 기법이다. 제목에서 우리는 작가가 말하려 하는 바를 이미 짐작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남은 사람이 깨어진 삶을 이어 붙이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 있어요. 그러나 이 작품이 진정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은 이 아름다운 방식이 새로워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작별했을 때 삶은 부서진다. 더욱이 그 삶이 더없이 빛나고 완벽에 가까웠다면 더더욱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느껴질 테다. 우리의 삶도 킨츠기처럼 아름답게 이어붙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순 없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삶은 예고도 없이 또 다른 잔을 깨뜨리기도 한다. 작가는 깨어진 잔을 이어 붙이는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그 대신 남은 이의 황망함을 이해하며 그의 걸음을 좇는다. 그가 어디까지 내려가는지를 보여준다.      


토끼에게는 사랑하는 빨강 새가 있었다. 어느 날 불현듯 빨강 새는 빛을 잃고 식탁보를 잡아끌며 날아가버린다. 행복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식탁은 온통 깨어지고 흩어졌다



토끼는 절망하며 새를 찾아서 심연으로 내려간다. 그곳은 죽음의 세계여서 모든 존재가 희다. 빨강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도 없다. 희게 변한 새조차도.     



사실, 토끼는 그곳에 남아있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새를 찾을 수 없다면 심연에 머무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토끼는 생각했던 것일까. 표지의 그림 속에서 토끼는 힘차게 두 팔을 뻗고 위로 올라간다. 그를 이끄는 것 혹은 그가 잡으려는 것은 빨강 새의 파란 잔이다. 깨지지 않고 온전한 파란 잔. 그림책 첫 장에서 토끼가 한 손에는 자기의 하얀 잔을 들고 한 손에는 빨강 새의 파란 잔을 들고 식탁으로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의 온전했던 파란 잔을 토끼는 깊은 심연에서 다시 본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위로 헤엄쳐 올라간다.  


빨강 새가 떠나버린 현실로 돌아와 보니 파란 잔은 여전히 깨져있다. 그것을 아무리 완벽하게 복원한다고 해도 빨강 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작가가 킨츠기라는 일본의 공예 기법을 떠올린 건 현실의 상실을 가장 아름답게 복원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서진 잔을 아름답게 이어 붙여서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작가는 온전한 파란 잔으로 손을 뻗으며 토끼가 위쪽으로 헤엄쳐 올라가게 그렸을 것이다. 


토끼를 이끈 온전한 파란 잔은 결심이 아니었을까. 빨강 새를 잊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결심. 혹은 사랑 그 자체였을지도. 하지만 나는 다른 가능성도 떠올린다. 부력이다. 살아있는 존재 안에 내재된 공기 방울들. 심연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우리를 위로 밀어 올리는 가볍고 강력한 힘 말이다.  


수영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테다. 손을 아래로 향하면 몸이 아래로 내려가고 손을 위로 향하면 뜬다는 걸. 아무리 물속에 가라앉아 있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 몸은 떠오른다. 불행 속에서 때로는 부력의 힘으로, 때로는 결심의 힘으로 끝내 우리는 심연에서 살아 나온다. 우리를 이끄는 온전한 파란 잔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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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가 있는 어린 남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사람'이라는 공통된 사실 하나만으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대단히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는 선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맹학교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던 날, 4학년 그 아이는 손에 작은 기계 하나를 들고 왔다. 글을 점자로 변환해 주는 점자단말기였는데, 음성 기능도 있어서 오디오북 역할도 했다. 기계 상단에 달린 작은 화면에는 글자가 떠서 그걸 통해 나는 아이와 글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나와 아이를 이어주는 건 화면의 글도 있었지만 당연히 서로 주고받는 말, 대화였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음성과 느낌으로도 우리는 연결돼 있었다. 서로의 미묘한 감정은 시각 기능과는 별개로 전달된다. 음성의 음조나 속도, 웃음의 다양한 변주들이 대화의 내용과 어떨 때는 합치되고 어떨 때는 부조화를 이뤘다. 마치 다성음악처럼 전혀 화음을 이루지 못한 채 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사람의 맨얼굴이 더 잘 보이는 법이어서 눈이 보이지 않은 아이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무안할 때가 많았다.


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난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는데 그즈음에는 명암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약하게 유지되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 체육관에서도 몸을 구르며 뛰어논다고 했다. 체육시간이 참 좋다고 아이는 말했다. 책 읽기도 좋아해서 미하엘 엔데의 짐 크노프 시리즈를 재밌게 읽었던 참이고 자연스럽게 국어와 영어도 재밌어했다. 수학이 어렵다고 했지만, 활짝 웃는 명랑한 아이의 모습은 몇 가지 힘들고 싫은 것 빼고는 세상 모든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와 만날 때 아이는 싱싱하고 푸릇했다.


그러나 미래의 꿈이 비행사라는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이와 걸을 때 어떻게 방향을 인도해야 하는지 몰라서 망설였다. 영어로 길 묻기 놀이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공간을 이용해야 할지 막막했다. 밥을 먹을 때 반찬을 고를 수 없다는 것도, 학교에서 집까지 너무 먼 거리를 통학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아주 뒤늦게야 알았다.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집에 데려왔을 때 아이가 여기저기 가구에 부딪히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몸 둘 바를 몰랐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만났을 때, 내가 여전히 진부하디 진부한 조언을 쏟아냈다는 사실이 뒤돌아서니 명료하게 보여서 낯이 뜨거웠다. 한 마디로, 나는 하늘 아래 이렇게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과거에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언니가 동생 얘기를 한다. 자기에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동생이 있고, 그런 동생은 드물고 특별하다고. 이 동생은 피아노를 칠 줄 알고 피아노가 우릉우릉 울리는 느낌을 좋아하지만 노래를 부를 순 없다. 동생은 춤도 추고 뛰고 구르기를 좋아하지만 조심하라는 외침을 듣지는 못한다. 언니와 동생은 사슴을 뒤쫓는 놀이도 하는데, 언니는 사슴의 아주 작은 소리를 듣고 동생은 언니 뒤를 밟으며 풀밭의 아주 작은 움직임을 보면서 사슴 자취를 찾는다. 동생은 입술 읽는 법과 말하는 법을 배웠지만 발음이 분명하지 않아서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은 충분히 알아듣지 못하고, 동생은 언니의 마음을 정확히 읽기 위해서 손가락과 입술만이 아니라 언니의 눈빛까지 들여다보길 원한다.    


아이들은 직설적으로 묻는다. "소리를 못 들으면 귀가 아프니?" 그러면 언니는 대답해 준다. "아니, 귀는 안 아파. 하지만 사람들이 이해해 주지 않을 때, 마음이 아프단다." 동생은 귀가 들리는 사람들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기도 하다.  


"방 저쪽에 있는 내 동생이 나를 보게 하려면, 발을 쾅쾅 구르거나 손을 흔들어요. 그 애 옆으로 가서 팔에 손을 올리든지요. 내 동생은 발 구르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손 대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내가 손 흔드는 걸 힐끗 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내가 등 뒤로 가서 이름을 부르면, 그 애는 내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표지의 저 아이의 이름은 히르벨이다. 히르벨은 시립 아동 보호소에서 살고, 그곳 아이들은 모두들 히르벨을 아주 못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히르벨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히르벨은 병에 걸린 아이였으니까.


아무도 히르벨의 병명을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히르벨이 태어났을 때 의사 선생님이 히르벨을 엄마 몸에서 꺼내다가 집게로 머리를 잘못 건드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히르벨은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큰 아이들은 히르벨이 머리가 약간 돌았다고 말했다. 히르벨의 엄마는 히르벨을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아서, 가끔씩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 든 큰 봉지를 들고 찾아왔을 뿐이다. 그녀는 금방 다시 오겠노라고 히르벨에게 약속했지만 다시 두 손에 사탕과 초콜릿을 잔뜩 들고 찾아온 건 세 달이나 지나서였다. 히르벨은 엄마가 다녀간 다음부터 다시 찾아올 때까지 세 달 동안 내내 안달을 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히르벨은 병에 걸렸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고통도 알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은 수시로 히르벨을 괴롭혔고 귀도 아팠다. 종종 어지럼증에 시달렸으며 배도 아팠다. 사실 히르벨이 아프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러나 히르벨은 이리저리 뛰어다닐 수 있는 한, 두통이 너무 심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만 아니라면, 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히르벨은 두통이 너무나 심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방벽에다 머리를 짓찧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히르벨을 맡았던 위탁 가정의 양아버지는 그걸 보고는 그 아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 보고 히르벨을 오해했지만 히르벨을 세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히르벨이 매우 영리하며 선량하고 순수한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한 번은 보호소에서 소풍을 나갔다가 히르벨이 일행에서 떨어져 양 떼 속에 갇힌 적이 있었다. 히르벨은 양들과 함께 밤을 보냈는데, 양치기가 히르벨을 발견하고 보호소로 데려왔다. 양치기는 말했다.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귀여운 녀석이에요. 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게 어디 그 애 탓이겠습니까? 도시애들이란 게 다 그런 걸요." 아저씨는 히르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언제라도 놀러 오고 싶으면 와도 된다."


사람들은 히르벨에게 아무것도 배우는 게 없는 아이라고 항상 말했다. 하지만 히르벨은 머리가 아주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단지 배우는 게 힘들었을 뿐이다... 히르벨이 배운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히르벨은 아동 보호소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이 하는 검사에 나오는 그림들도 다 외우고 있었다. 히르벨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피할 줄도 알았으며,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들에 맞서 싸우는 법도 알았다. 또 머리가 아파도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법도 배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히르벨이 배운 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건 바로 아동 보호소와 병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삶 속에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많이 혼나거나 매 맞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히르벨은 그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작품 중에서 인용


히르벨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으며 말을 잘 하지 못했지만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목소리가 맑고 투명했다. 한 번 들은 노래는 절대 잊지 않았다.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 없이 부르는 히르벨의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 순간에 사람들 안에서 깨어난 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혹시 사람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진 보편적 사랑은 아니었을까.    

 

  












스즈는 자폐증이 있다. 스즈의 어머니는 딸이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 유치원 친구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종이 연극 그림책을 자비로 만들어 아이들 앞에서 낭독했는데, 그 작품이 출판사를 통해 그림책이 되어 나왔다.


어머니는 자폐를 앓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스즈의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 준다.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있고 운동이나 동작이 느리다는 것, 기억과 정보처리 구조가 달라서 뇌의 정보들이 시간 순서 없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갑자기 울거나 웃을 수 있다는 것, 마음의 안정을 취하거나 즐기려고 하는 반복적 행동을 한다는 것 등을 알려준다. 특히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소리와 빛, 냄새, 맛, 피부 자극으로 들어오는 감각에 과민하다는 부분도 유념할 만하다. 그래서 귀를 막거나 이어폰을 끼기도 하고, 감각 과민과 체온 조절을 못하는 불쾌감 때문에 소리를 지르거나 자해나 가해 행위를 하고 패닉에 빠지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모든 게 뇌의 문제이다.


"스즈의 뇌는 한가운데 부분이 태어날 때부터 조금 다르게 작동해서 "삐잇삐, 삐이이이이"하고 여러분과 다른 명령을 내릴 때가 있대요."


스즈의 어머니는 스즈를 대신해서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헤어져도 스즈의 뇌에는 그들과의 추억이 가득하다고. 갑자기 그 기억이 표면으로 떠오르면 스즈가 기분이 좋아져서 웃을 거라고. 우연히 만나면 몰라볼지 모르지만 함께 했던 시간들을 뇌의 어딘가에 분명히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얘기할 거라고 말이다. "고마워! 너희들과 지낼 수 있어서 좋았어. 너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


스즈의 어머니는 유치원의 친구들을 '어린 이해자'로 호칭했다. 그림책 후반부에 덧붙인 설명글에서 들려주는 일화는 아이들이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느 날 유치원에 등원해서 어머니가 사물함에 스즈의 짐을 넣고 있는데 스즈가 화내는 소리가 들렸고 그런데 그 소리가 금방 그치기에 어린이집 마당을 내다보니 친구들이 스즈를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스즈는 무표정해 보였지만 눈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친구들도 활짝 웃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너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규범에 대한 지식과 가치관, 자아 개념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두터운 벽을 세우는 일이기도 해서 너그러움은 절대 들이지 않는 우물처럼 편협하고 좁은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사는 하늘 아래 참으로 많은 다른 세상들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하늘을 하나씩 이고 있다. 내 하늘이 무너질 때 다른 사람들의 하늘이 멀쩡한 걸 보고 충격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내 머리 위의 저 하늘이 내가 이고 있던 하늘이었을 뿐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 하늘을 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단지 장애만 아니라 세상사 모든 고통과 불행이 각자의 하늘 날씨를 바꾼다. 그렇게 해서 흐린 하늘이 있고, 무너지는 하늘이 있고, 천둥과 번개와 폭우가 치는 하늘이 생긴다.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 같다.


그러나 유난히 더 요동치는 하늘이 있다. 그런 하늘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체로 잘 모르며, 모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오해하고, 불편해하며, 종종 무례를 범한다. 우리는 비슷하며 또한 비슷하지 않아서, 어떤 삶의 양태는 특별히 더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 나의 하늘 옆에 다른 하늘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면, 스즈 어머니가 말하는 어린 이해자처럼 너그러운 이해자가 되려고 애써 본다면, 나의 하늘이 맑고 투명해도 누군가의 하늘에서는 비바람이 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가 이고 있는 하늘이 더 가벼워지고 우리 모두를 두르고 있는 하늘이 경계 없이 무한하게 확장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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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작가는 나무 시장에서 앙상하고 구부정한 나무 한 그루를 데려왔다. 과실수도 아니고 꽃이 예쁜 벚나무도 아니어서 아무에게도 눈길을 받지 못하는 특징 없는 나무였다. 작가는 이 나무에 신선한 흙을 덮고 흠뻑 물을 주었다.


나무는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깊은 겨울밤을 보내고, 연둣빛 이파리가 반짝이고 새들이 떠들썩하게 날아다니는 깊은 봄을 보냈다. 태풍이 온 산을 할퀴고 지나간 여름과 작은 별무리가 강물처럼 흐르고 풀벌레가 우는 가을밤도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겨울. 그렇게 수많은 날과 달이 흐른 뒤, 나무는 문득 마당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어 있었다.


바람은 나무에게 "너는 천년을 사는 나무란다." 하고 속삭였지만 나무에게 천 년이라는 시간은 무의미한 관념에 불과했다. 나무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라는 구체적 시간을 살았다. 어느 날 달빛이 나무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니?" 나무가 대답했다. "별과 구름, 해와 달, 그리고 바람과 함께 춤추는 나는 나무입니다."


나무는 그저 나무라고 했다. "나는 나무입니다." 분류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인간이 붙여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림책 마지막 장에서 봄 민들레가 나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느티야?"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와 신학자가 나름의 답을 했고, 더 많은 문학인들도 '나'를 주어로 하는 이야기를 썼다. 사람들은 이 짧은 생을 지탱하기가 힘겨워서 '나'를 붙들고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고, 모두들 "나는..." 하고 얘기를 시작하지만 '나'는 영원한 수수께끼며 영영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한 존재다. 그러니 '나'를 괄호 속에 넣고 말을 시작하는 게 그나마 합리적이지 않을까. 영어는 주어가 없는 문장을 비문으로 치는데 한국어에서는 주어 없는 문장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한국어의 세계관으로 생각한다면, '나'란 내가 그렇게 매달려야 할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때 비로소 찾게 되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헤세도 나무를 사랑했다. 그는 나무에게서 배운다고 했다. 심지어 경외심을 느낀다고도 했다. 헤세는 나무의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나무를 최고의 설교자라고 불렀으니까. 조용히 나무 곁에 서서 헤세는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아주 조용히.  


"그들은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을 실현하는 일, 즉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힘쓴다. 강하고 아름다운 나무보다 더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헤세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이었으리라. 종교인이든 아니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사람들이 모두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것.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 번뇌가 다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점까지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으로 통하는 어느 길목에서 이것을 실현할 수 있기를  나는 꿈꾼다.   


일 년 된 작은 살구나무 묘목을 심었다. 어린 나무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 테다. 다만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고 햇살을 받고 어두운 밤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보내고 그렇게 수많은 계절들을 보내며 꽃과 잎을 내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인간은 나무에 이름표를 붙여주기를 좋아하지만 나무는 그저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만 집중한다. 본연의 일에 충실해서 살구나무는 살구나무로 자라고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로 자란다. 헤세의 말처럼,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살구나무의 소리 없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나무 곁으로 다가간다. 마음의 다른 모든 소리를 끄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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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뜻밖의 여정
선우 지음 / 푸른사상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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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키우는 일과 아이를 키우는 일은 닮았다. 그걸 인식하며 둘 사이를 지혜롭게 오고 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자폐아를 키우는 이 기록에는 치열한 사랑이 가득하다. 식물은 느리지만 그 어떤 생명체보다 강하다. 이 모성을 식물 같은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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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 - 숲으로 걸어간 할머니, 엠마 게이트우드의 놀라운 여정
벤 몽고메리 지음, 우진하 옮김 / 수오서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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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장거리 트레일인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게이트우드 할머니는 67세에 종주했다. 이후 80세가 넘도록 그녀는 여기저기를 계속해서 걸었다. 저자의 말처럼 그녀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걸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냥 걷고 싶었다고만 했고 그러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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