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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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글도 좋지만 책의 만듦새가 훌륭하다. 글과 그림의 배치가 조화롭고 적절하다. 표지와 본문 그림을 그린 한수정 작가의 그림이 헤세의 글을 더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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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기사에 이금이 작가가 소위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금이 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내게 더 반가웠던 건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의 글 작가 티모테 드 퐁벨도 최종후보자로 선정됐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 그럴 줄 알았지! 그의 이야기 세계와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이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책이 '작품'이 된 건 티모테 드 퐁벨의 글에 이렌 보나시나가 그림으로 완벽하게 화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펜으로 그린 헐렁한 선, 수채화의 맑은 색감, 넉넉한 여백이 아이의 자유로운 여름 방학을 더없이 잘 담아내고 있다. 가로 34센티미터 세로 24센티미터의 길고 큰 판형도 신의 한 수다. 책을 펼치는 순간, 화폭은 가로가 2배로 확장되면서 이야기 공간이 독자를 에워싼다. 100호가 넘는 대형 그림이 감상자에게 주는 효과, 아이맥스 영화관이 관객들에게 주는 바로 그 효과를 이 그림책도 노린 것이다. 글과 그림과 판형이 독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무한한 자유, 빛나는 자유다.      


여름이 되었다. 열두어 살 무렵의 남자아이는 집을 떠나 혼자 기차를 타고 삼촌 집으로 간다. 아이는 해마다 여름 방학을 삼촌 집에서 보내는 것 같다. 삼촌의 집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있고, 삼촌은 평생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집은 잡동사니로 꽉 차있다. 삼촌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카를 위해 책을 한 무더기 장만해 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넓은 옥수수밭 한가운데 잡동사니로 그득한 집에서 보내는 담백한 시간은 아이에게 자유를 허용한다. 아이는 무한대로 펼쳐지는 자유를 얻는다.   


"앞으로 펼쳐질 길고 긴 여름날을 생각했다.
너무나 아득해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여름날들."



아이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동네와 그 너머를 탐험한다. 삼촌의 집을 중심으로 아이는 나선을 그리면서 점점 더 멀리 나가본다. 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고 작가는 묘사한다. 이것은 영원의 이미지다.


그러던 어느 날, 밀 수확으로 길이 막혀서 아이를 나선형의 행로 밖으로 이탈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아이는 길을 잃고 낯선 모랫길로 들어간다. 길을 따라 넘어간 모래 언덕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가슴을 벅차 오르게 만드는 드넓은 바다가 출렁대는 세상, 그리고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 에스더 앤더슨이 있는 세상이.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이 떨렸다.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에스더 앤더슨을 불러본다. 다음 날은 비가 왔고, 비가 그친 그 다음날 아이는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바다에서 에스더 앤더슨을 만나려고. 거기로 가려면 길을 잃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길을 잃을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느슨한 탐색과 자유가 달팽이 집처럼 빙빙 나선을 그리고 이어진다. 어린아이는 안전한 보호자의 품 안에서 마음껏 자유롭다. 영원처럼 이어질 것 같았던 달팽이 집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이는 바깥세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전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은 충격이어서 아이는 입이 얼어붙고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 기꺼이 길을 잃을 줄 안다.



어릴 때 나는 때로 심심했다. 심심하다는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을 찾으라면 딱히 한 단어로는 안 될 것 같다. 어린 나는 심심한 그 시간이 버거웠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이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낮 시간, 무한하게 풀려나가는 실타래처럼 지루했던 시간들, 눅진하게 쌓여 어린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무료한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작은 언덕에 올라앉은 자그마한 우리 집에는 영원처럼 길고 긴 낮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루에서 마주 보이는 건너편의 야트막한 초록 언덕도 정적이었다. 앞마당에는 칸나가 뒷마당에서는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자라고 있었지만 식물들은 조용했다. 온 집이 죽은 듯이 고요했다. 뒷마당 광의 옥상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는 도로에는 장난감처럼 작은 차들이 달리고 하늘에는 푸름이 한가득, 흰 구름이 무료하게 모양을 바꾸며 떠 있었다. 그 모든 정적과 고요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진하고 거대했다. 해는 하늘 가운데 박아놓은 듯 기울지 않았고 언니며 오빠, 아버지가 돌아오고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느라 집이 북적대며 활기가 도는 저녁 시간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의 아이처럼 자전거를 타고 길을 빙빙 휘감으며 조금씩 더 멀리멀리 나아갈 생각을 왜 못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장소의 탓도 없지 않았을 듯싶다. 나는 익숙한 집에 있었고, 저 아이는 집과 부모를 떠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잡동사니로 가득한 집에서 활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사는 삼촌에게 갔으니까. 낯설면서도 안전한 그곳에는 발견과 해방감이 충만했다!     



어릴 때의 나처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 파스칼레.


















프랑스 소설가 앙리 보스코가 백 년도 전에 쓴 <아이와 강>의 주인공 아이는 시골의 들판 한가운데 외따로 떨어진 조그만 소작인 농가에 살고 있다. 밭과 나무 울타리, 식물, 멀리 떨어진 두셋의 농가 밖에 없는 단조로운 풍경에 갇혀서 아이는 쓸쓸하다. 그 풍경 너머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걸 파스칼레는 들어서 알고 있다. 강은 여름철이면 말라 버리지만 봄철에 알프스의 눈이 녹을 때면 큰 강으로 변해서 엄마 아빠는 파스칼레에게 절대로 강가로 가지 말라고 다짐시킨다. 강에는 사람이 빠지는 죽음의 구멍들이 있고 갈대숲에는 뱀이, 강가에는 위험한 집시들이 산다고. 파스칼레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료한 날,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딴 데 신경을 판 사이, 홀린 듯 집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조그만 오솔길들이 속삭이듯 나를 이끌었다.
'이리 와, 몇 걸음 더 나가 보는 거야. 어때? 첫 번째 모퉁이 길이 여기서 멀지 않아? 오베핀느 꽃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 된단다.'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새들이 가득히 올라앉고, 푸른 열매가 잔뜩 달린 두 줄의 나무들 사이로 꼬불꼬불 이어진 그 오솔길로 일단 발걸음이 내디뎌지고 난 뒤에 내가 어떻게 걸음을 멈출 수 있었겠는가?"


아이는 결국 강까지 걸어갔고 이끼가 덮인 부드러운 흙바닥에서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친척 할머니는 아이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


"야, 이 떠돌이야! 바람둥이야!"


할머니는 아이가 다시 집을 나가 강으로 갈까 봐 사흘 동안 감시했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다시 자기 일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는 다시 몰래 집을 빠져나가 곧장 강으로 갔다. 강은 너무나 멋졌다. 파스칼레는 강기슭을 따라서 걷다가 말뚝에 매인 채 흔들리고 있는 나룻배를 발견한다.  


"배에는 노가 없었다. 삼으로 꼬아 만든 나룻배는 다 헐어빠진 밧줄로 비끄러매어져 있었다. 물이 어찌나 잔잔한지 밧줄은 강물 속에 가만히 잠겨 있었다. 이 고요함과 아늑한 분위기가 곧 내 마음을 끌어갔다. 나는 배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잠깐 망설이다가 발을 뱃전에 얹어 놓았다."


어떻게 해야 길을 잃는지 알았던 티모데 드 퐁벨의 남자아이처럼 앙리 보스코의 아이도 기꺼이 길을 잃는다. 절대 가지 말라는 강으로 가서 절대 타서는 안 될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퐁벨이 묘사하듯,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졌다. 배를 묶어놓았던 밧줄이 풀리고 표류를 하면서 파스칼레는 생전 가보지 않았던 강 중앙의 섬 모래밭에 내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생적이고 매혹적인 소년 가쪼를 만나 위험천만하고 가슴 뛰는 모험을 한다.   


어린아이의 시간은 영원처럼 펼쳐지고, 나뉠 수 없는 시간임에도 영원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길을 잃거나 '이리 와, 몇 걸음 더 나가보는 거야.'라는 오솔길의 속삭임을 들음으로써. 퐁벨의 묘사를 다시 빌리자면, 영원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훨씬 파격적이며 강력하고 풍부한 모험 이야기를 펼친다. 퐁벨의 아이와 보스코의 아이의 모험은 문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 이야기는 대단히 반문명적이며 냉소적이다. 영원 같은 여름 방학에 바다와 첫사랑을 만나고, 오솔길의 유혹에 넘어가 어른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넘어가 집시들이 사는 위험한 강을 향해 갔던 아이들이 이제 허클베리에 이르러서는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며 어른들의 세계, 문명 세계와 정면으로 대결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나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라는 허클베리 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허클베리는 술에 취해서 아이를 때리는 아빠 밑에서 방치된 채 숲에서 살다가 어느 날 아빠로 추정되는 익사체가 발견되면서 한 과부댁의 양자로 들어간다. 과부는 허클베리를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그러나 허클베리는 교양을 위한 모든 규범이 견딜 수 없다. 집 안에서 지내고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단정하게 옷을 입는 것, 식탁 예절을 지키는 것, 성경을 읽고 학교를 다니는 것 등등. 허클베리는 담배를 피우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없으며, 마크 트웨인이 창조한 또 다른 아이 톰 소여와 갱단을 만들 비밀스러운 작당을 하는 아이다. 허클베리가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배우고 구구단을 육 단까지 외울 수 있었던 건, 다시 말해서 학교를 참을 만하게 여기게 됐던 건 선생의 구타 덕분이었는데, 이 대목은 이른바 교양을 자랑하는 서구 문명의 위선을 향한 마크 트웨인의 조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학교가 견딜 수 없이 싫어질 때에는 땡땡이쳤고, 그다음 날 얻어맞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갈수록 학교 가는 일이 점점 쉬워지게 되었죠."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악당 아빠가 돌아왔다. 허클베리는 다시 숲에서 아빠와 함께 살게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강에서 표류하는 카누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당연히 모험으로 이어진다. 허클베리는 카누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도망을 치고, 동행하는 친구도 생겼다.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친 흑인 노예 짐이었다. 도망 노예를 숨겨주는 건 위법이지만 허클베리는 짐을 노예가 아니라 사람으로 볼 줄 안다.  


도망치는 이 두 사람은 밤이면 배로 이동하고 낮이면 강어귀에 배를 숨겨놓고 마을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목격한다. 교양 있는 자들의 위선, 인간의 잔인하고 어리석은 본성, 그것이 빚어내는 비극, 또 인간의 선함까지.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을 통해서 노예제도 또한 통렬하게 비판한다.


허클베리의 모험 이야기는 솔직하고 명민하며 거칠면서 인간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강을 따라 흘러간다. 한 강변 마을에 들러 이런 일을 겪고 다른 강변 마을에서 저런 일을 겪으면서 허클베리와 짐은 줄곧 강으로 돌아오고 강으로 도망친다. 인간들의 모순적인 사회에서 자연의 너른 품으로. 인간은 이성이 있으나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신을 믿으나 신을 배반하며 선하나 동시에 악을 행한다.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있다. 인간의 희비극은 육지에서 벌어지고 강으로도 흘러들지만 강은 그저 무심하다. 두 사람은 완전한 자유가 있는 곳, 강에서 안심한다.     


"어느 곳에서도 아무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습니다-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지요-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만 어쩌다 먹개구리가 울어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 위를 저 끝까지 바라다보고 있으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선 같은 것뿐이었습니다-그것은 저쪽 강둑에 있는 숲이었지요-그 밖엔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다음 하늘에 뿌연 곳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다음 하늘에 뿌연 곳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다음 강이 저 멀리서 뿌옇게 밝아져 검은색은 찾아볼 수 없이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낮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어린 나도 모험을 꿈꿨다. 모험은 골목길과 산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책과 상상 속에서 이뤄졌다. 꽝꽝 언 강을 따라 스케이트를 타고 내려오는 북유럽 동화를 읽으며 나도 주인공처럼 뺨이 얼얼해진 채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열차 도둑을 잡는 소년을 따라가며 가슴을 졸였다. 모험 이야기들은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었다. 소설 속 누구처럼 나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내 진짜 엄마가 있어서 나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고, 내가 죽어서 식구들이 뒤늦게 후회하고 미안해하며 울었으면 좋겠고, 뭐 그런 상상을 하며 청승을 떨었다. 나는 썩 활기 넘치는 아이가 아니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곧장 숙제부터 하고 노는 얌전하고 모범적인 아이였다. 그래서인가 보다. 모험과 일탈에 여전히 은근하게 마음이 기운다.


어린 시절의 그 많던 시간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어릴 때는 영원을 알았다. 영원의 느낌을. 그런데 나이가 들며 그 느낌이 슬며시 사라지고 그 대신 단락 단락 끊긴 시간들을 살게 되었다. 풀린 실타래 같던 시간의 그 지루한 느낌들은 잊어갔다. 허공으로 끝간 데 없이 펴지는 광대한 시간들에 대한 기미를 어린 나는 느꼈으나 지금의 나는 관념으로만 이해한다.


우주의 시간은 영원하나 인간의 시간은 유년 청년 장년 노년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한하고 뻔한 전개를 따라간다. 영원은 곧 무한이다. 우리는 어릴 적 영원을 살았다. 불가능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이야기들은 영원을 글로써 잡아놓았다. 그래서 이야기 안에는 영원이 존재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하는 영원, 마음과 꿈과 상상에서만 가능한 영원의 시간이 이야기 속에서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 가운데에는 집이 있었다. 나는 나선형 원을 그리면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까지 가려고 애썼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밀밭에서 수확이 한창이라 교차로를 지날 수 없었다. 두 시간이나 더 멀리 돌아 자전거를 타야 했다. 소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고, 잡초 사이로 난 모랫길이 하늘로 향했다. 바퀴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처음 와 본 곳이었다.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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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부터 오늘까지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있다. 화가 났고 화를 터뜨리고 싶었다. 아주 실컷! 그런데 마음이 점점 괴로워졌다. 미워하면서 화를 품을수록 더 심하게 괴로워졌다. 미움의 눈덩이가 경사진 언덕을 굴러내려가며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작은 불이 큰 산불로 번지면서 그와 나 사이에 놓인 다리를 활활 불태웠다. 다정한 계곡에 놓인 소박하고 오래된 그 다리를. 이 모든 상황이 내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벌어지는 풍경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괴롭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든 미움은 우선 나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워서 괴로운 게 아닌 것 같다. 실은, 사랑하지 못해서 괴로운 게 아닐까. 오래전부터 막연히 짐작해 왔는데 왠지 그 짐작이 맞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이 잘 안 돼서 괴롭나?

 

우리말에는 화 대신 쓸 수 있는, 왠지 모르게 귀여운 표현이 있다. 삐지다. 이 말은 특히 어린아이를 향해서 잘 쓰인다. "쟤가 화났어."라고 하는 대신 ", 삐졌어." 하고 속삭대며 우리는 응큼하게 웃는다. 장난스럽게 들리는 '삐졌다'는 표현은 '화났다'는 표현과 다르게 상황을 덜 심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리가. 어린아이의 화는 절대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 아이는 진심으로 속이 상하기 때문이다.

 

 


 

 









풀밭에서 잔뜩 화가 난 저 아이의 이름은 스핑키. 스핑키는 엄마, 아빠, 누나, 형에게 무지막지하게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핑키를 화나게 만든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것 같다.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만 화가 난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차례로 마당으로 나가 스핑키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스핑키는 절대 한 명도 용서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오래 묵은 화가 틀림없다. 

 

스핑키는 대략 여덟, 아홉 살쯤 돼 보이는데 그 나이에는 별일도 아닌 일에 잘 삐진다. 툭하면 서운해하고 화를 낸다. 아마도 자의식이 싹트는 나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새싹처럼 돋아나는 이때의 자의식은 아직 연약해서 쉽게 상처를 입는다. 아이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 화를 낸다. 화를 '내야만' 하고 '낼 수밖에' 없다. 아이는 자신을 위협하는 유형무형의 적들과 싸우는 고독한 전사 같다.

 

우리의 스핑키는 이 이야기 속에서 실컷 화풀이를 한다. 형과 누나와 엄마가 아무리 빌고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아빠가 설교를 하고 친구들이 놀자고 해도, 그들의 호의를 내팽개친다. 작가 윌리엄 스타이그는 그림책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을 29쪽에 이를 때까지 스핑키에게 복수할 기회를 무궁무진하게 베풀어주고 나서 단 3쪽으로 상황을 간단히 마무리해 버린다. 스핑키에게 속이 후련해질 만큼 실컷 화를 내게 해준 것이다. 무릇 화풀이는 이렇게 해야 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실컷.

 

살아보니, 마음의 앙금을 풀어내려면 실제 경험했던 부당함에 대해 딱 그만큼만 되갚아주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다. 반갑게도 스타이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밉살스러운 누나가 꽃을-팽개쳐버릴 꽃을-따주고  거만한 형이 무릎을 꿇고-백번을 꿇어도 용서 못할 테지만-사랑하는 엄마-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더 서운한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멋지게 차려줘도 끝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복수는 유혹적이다.  

 

윌리엄 스타이그는 스핑키를 심하게 편애해서 아이가 원하는 만큼 복수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건 그림책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현실의 가족은 스핑키의 가족처럼 다정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설사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해도 가족 가운데 한두 명쯤은 쌀쌀맞거나 인색하거나 무심하다. 아이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사랑의 말을 해주는 가족과 친구는 아주 드물지 싶다. 그래서 작가는 그림책 속에서나마 후련하게 화풀이를 할 수 있게 아이에게 멍석을 펼쳐준다. 연약한 아이들에게. 바깥세상에서는 이렇게까지 못하지. 아무렴. 여기서나 실컷 화풀이해. 난 네 편이야 하면서. 누구는 그랬다, 편애란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난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화난 아이가 또 한 명 있다. 맥스다. 맥스는 늑대 옷을 입고 벽에 못을 박고 포크를 휘두르며 개를 위협하며 놀다가 엄마한테 이 괴물딱지 같은 녀석이란 말을 듣는다. 맥스는 엄마한테 맞받아쳤다.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버릴 거야. 엄마는 저녁밥도 안 주고 맥스를 방에 가둬버렸다. 바로 그날 밤 맥스의 방에서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큰 바다가 열려서 아이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간다.

 

 


 

 








맥스는 이 나라에서 괴물들의 왕이 되어 마음껏 놀았다. 스핑키가 실컷 화를 터뜨렸던 것처럼 맥스도 괴물들의 나라에서 실컷 못되게 놀았다. 부정적 감정을 풀어놓고 야생적인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지칠 때까지 놀고 나자 맥스는 문득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지 말라고 말리는 괴물들을 뿌리치고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니, 엄마가 가만히 놓고 간 저녁밥이 있었다. 밥은 아직 따뜻했다.

 

작가 모리스 샌닥도 아이에게 무척 너그럽다. 엄마에게 괴물딱지 같은 녀석이란 말을 들은 아이 마음은 무사할 수 없다. 괴물딱지라니! 그래서 맥스에게 용기를 듬뿍 불어넣어서 엄마한테 지지 않고 소리치게 해 줬다.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버릴 거야. 스핑키의 아빠는 스핑키가 나잇값을 못 하고 어린애처럼 군다고 설교를 했는데 윌리엄 스타이그는 그걸 허튼소리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스핑키를 이렇게 변호해 준다.  

 

사실, 아빠가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데, 스핑키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주 정상적인 아이랍니다.

 

 

맥스의 세계도 역시 그림책이니까 가능하다. 괴물딱지 같은 녀석잡아먹어버릴 거야라는 말싸움은 현실 속에서 잘 벌어지지 않는다. 화난 감정을 거리낌없이 말로 내뱉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현실 엄마는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 아이가 엄마한테 잡아먹어버린다고 말하는 상황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더 큰 반격을 불러올 걸 알기에 아이들은 겁이 나서 그런 말을 쉽사리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다. 대신 속에 담아둔다. 언어화되지 못한 채 어떤 검은 감정의 덩어리로. 어린 독자들이 스핑키와 맥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그건 두 아이가 자기 대신 어른들에게 실컷 화를 내고 복수를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제 스핑키와 맥스는 속이 후련해졌다. 마음이 누그러졌다. 스핑키의 가족은 인내심이 바닥나서 슬슬 약이 오를 참인데 이 절묘한 순간에 스핑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식구들이 잘 몰라서 그랬는지도 몰라. 지금은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식구들이 나한테 그렇게 군 게 꼭 식구들만의 잘못일까? 화를 풀면서도 우스운 꼴이 되지 않으려고 스핑키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을 위해서 밥상을 근사하게 차렸다. 맥스 또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가서 진짜 괴물이 될 뻔했는데 다행히 엄마가 따뜻한 저녁밥으로 맥스를 무사히 그 나라로부터 데려왔다.

 

이 두 작가의 그림책 세계 속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있다. 사랑이 핵심이다. 사랑이 아이의 화난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고 원초적인 괴물들의 세계로부터 불러들인다.     

 

특히 윌리엄 스타이그는 우리가 언제 너그러워지는지를 잘 아는 것 같다. 아이들은-사람은-사랑을 받으면 너그러워진다. 하루 삼시세끼 밥을 먹어야 몸에 활기가 있듯이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마음에 힘이 생기고 넉넉해진다. 삼시세끼 밥이 굳이 진수성찬일 필요가 없듯이 사랑도 대단하고 위대한 어떤 것일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한없이 자비로운 사랑, 얼음산을 넘어 눈바람을 뚫고 약초를 구해오는 효심 같은 어마어마한 사랑은 받기도 힘들고 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니까. 산다는 일이 배가 고프고 부르고의 연속이듯이 마음의 일도 고프고 부르고의 연속이어서 소소한 사랑으로 매일 우리를 먹여줘야 하는 걸지 모른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혹시 우리의 무의식은 무한히 깊고 큰 사랑을 원하고 있진 않을까? 그래서 내가 가진 사랑이, 내가 줄 수 있는 사랑과 상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너무 초라하고 너무 섭섭한 건 아닐까? 내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나서 속을 끓이는 까닭, 미움과 분노로 내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 소중한 관계의 다리를 불태우고 끊어버리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혹시 그래서는 아닐까? 불경에서는 만족할 줄 알라고 했는데.

 

미움과 분노와 화라는 표현을 삐졌다, 부루퉁해졌다, 골을 낸다는 말로 바꿔보면 좀 나아지려나 하는 유치한 꿍꿍이도 해보면서, 이 두 그림책에 환호하는 어린 독자들처럼 나도 그림책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부드럽게 녹으며 좀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용서로 가는 길은 이렇게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인가도 싶다. 상대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내 자신을 이해하고 내 마음과 화해가 이루어질 때 나는 마침내 용서라는 문을 열고 자유로워지리라 기대한다. 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문 자체가 사라지는 걸 경험하게 될 거라고. 그런 경험을 하길 희망한다. 내 생각은 아직 내가 못 이른 그곳에 이미 가 있다. 이제 나의 마음이 생각을 따라 가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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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네버랜드 클래식 48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허버트 포즈 그림, 김주경 옮김 / 시공주니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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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알고 푸는 수학문제처럼 이 작품도 그렇다. 풀이 과정에 놀라운 발견이 있듯이 이 이야기도 정답에 이르는 과정에 진짜 재미와 의미가 있다. 가끔 뻔하고 엉뚱한 구시대적 발상을 만나지만 상징과 상상이 깊고 다채로워서 그 정도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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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의 세계 - 아동청소년문학의 사유와 감각
김재복 지음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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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에 대한 성실한 사랑이 느껴지는 평론집이다. 소설 평론들은 평론가와 일부 작가만 이해할 수 있을 ‘닫힌‘ 글 같다.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까? 저자의 동시 평론들은 그렇기 때문이다. 동시를 얘기할 때 저자의 글은 살아숨쉬고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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