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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을 어떻게 정의할지 고심했다. 모두가 동의하는 보편적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어린이 같고 어린이다운 마음, 실체로서의 동심이란 게 존재할 거라 막연히 믿었다. 하지만 적확하게 정의내리라고 하면 동심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동심이 실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평균 키나 평균 체중처럼 '평균'이라는 개념이 흔하게 쓰이지만 실제로는 평균 키나 평균 체중이 허상이듯 동심도 그런 게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동심을 만난다. 하루 종일 식당에서 일한 엄마가 아픈 다리를 펴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안락의자를 사드리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동심이 아니면 무얼까.  












 

아이의 집은 일 년 전 화재로 모든 걸 잃었다.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했고 다정한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은 식기와 침대 같은 살림살이를 나눠주었고 음식도 가져와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락의자는 마련하지 못했다. 아이의 엄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늘 발이 아프다고 했고 할머니도 딱딱한 부엌 의자에 앉아야 했다. 그래서 안락의자를 사기 위해 어느 날 엄마는 식당에서 가장 큰 유리병을 가져와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의 식당에서 소금통, 후추통을 씻고 병에 케첩을 채우고 양파를 까는 소소한 일을 했고 그러면 식당 주인인 조세핀 아줌마가 돈을 줬다. 그중 절반을 아이는 유리병에 넣었다. 엄마도 팁으로 받은 잔돈을 유리병에 넣었고, 할머니도 물건을 싸게 사고 남은 동전을 넣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동전을 꼬박꼬박 모은 끝에 유리병이 동전으로 꽉 차는 날이 왔다. 세 사람은 식당이 쉬는 날 안락의자를 사러 간다. 은행에서 동전을 지폐로 바꾼 다음,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서 그들은 가구점을 네 군데나 돌아다니며 온갖 의자에 다 앉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꿈꾸어 온 의자를 발견했다. 이야기의 서두에서 아이가 꿈꿨던 바로 그 의자를!

 

그래요, 의자요. 멋있고, 아름답고, 푹신하고, 아늑한 안락의자 말이에요.
우린 벨벳 바탕에 장미꽃무늬가 가득한 의자를 사려고 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자를 요.


이제 엄마는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화사한 장미꽃무늬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쉬고, 낮에는 할머니가 이 의자에 앉아 창밖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가 저녁을 먹고 안락의자에서 엄마 무릎에 안겨 잠이 들면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로 팔을 뻗어 불을 끌 수도 있다. 아이가 바라는 건 오로지 엄마를 쉬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아이의 마음은 순전히 그랬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또 어떨까. 경제 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을 만큼 가계가 힘들어지자 부모는 아이를 도시에 사는 외삼촌에게 보내기로 한다. 시골의 넓은 초원에서 할머니와 꽃을 키우고 밭을 일구던 여자아이는 느닷없이 익숙한 집을 떠나 삭막한 도시, 거대하고 황량한 기차역에 혼자 내린다. 엄마가 자신의 옷을 줄여서 만든 파란 원피스를 입고서.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씩씩하다. 낯선 장소 낯선 관계를 다정하게 대한다. 아이는 무뚝뚝한 외삼촌의 빵집에서 열심히 일을 도우며 크리스마스에는 외삼촌에게 시를 선물하고, 빵집에서 일하는 엠마 아줌마에게 꽃씨 이름을 가르쳐주는 대신 빵 반죽하는 법을 배우면서 틈틈이 꽃을 키운다.  














삭막한 도시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 할머니가 보내준 씨앗, 흙을 담을 화분, 햇빛과 물만 있다면.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이 있으면 더 풍성하게 피울 수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원예사 아가씨라고 불린 이 아이는 빵집 건물의 내버려진 옥상을 꽃밭으로 꾸미기로 마음을 먹는다. 엄마를 위해 동전을 모으던 아이처럼 이 아이도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마침내 건물 옥상에 멋진 정원을 완성했고 그걸 외삼촌에게 선물했다.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꽃 정원을 완성해서가 아니라 외삼촌에게 그걸 선물해서 아이는 행복했다. 선물은 꽃 정원이 아니었어도 좋으리라. 사랑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걸 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선물을 받아 들고 활짝 웃고 행복할 수 있다면 나도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 마음이 사랑이다.  

 













여기에 또 한 아이가 있다. 아픈 할머니 때문에 놀이 공원을 가지 못해 화가 난 아이. 엄마 아빠는 아픈 할머니를 모시느라 아이의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다. 두 사람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홍시를 냉장고에 쟁여놓고 할머니의 병시중을 하는 데만 온통 신경이 가 있다. 아이는 방에 누워만 있는 할머니가 원망스럽다. 엄마 아빠가 많이 밉다.

 

다래는 방문을 쾅 닫았어.
할머니는 왜 맨날 누워만 있는 거야?
맨날 누워 있는 할머니 생각만 하고
다래 생각은 하나도 안 해주는
엄마 아빠가 너무너무 미웠어.
다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꽉 감았어.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할머니가 다래를 깨웠다. 다래, 아직 안 일어났니? 그리고는 놀이공원에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 아빠가 피곤할 테니 둘만 살짝 다녀오자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얼려 놓은 홍시까지 챙겨놓았다. 다리가 아플까 봐 놀이공원 입구에서 자기를 업어주는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아이는 할머니에게 홍시를 먹여드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머니가 자꾸만 젊어졌다. 공원 입구에서는 엄마만큼 젊어지고 은하철도를 탈 때는 언니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무지개 아이스 바를 먹으며 할머니가 자기만 한 친구가 된 뒤에야 아이는 할머니 이름을 알게 되는데...  

 

"다래, 넌 나만 쳐다볼 거니?"
다래는 그때서야 아이스 바를 받아 들었어.
", 그럼 네가..."
"그래, 명애. 내 이름도 몰랐어?"

 

  

놀이공원의 정글짐 꼭대기에서 둘은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며 약속했다. 가을이 오면 나무들이 울긋불긋 정말 예쁘겠다. 우리 그때 또 놀러 오자.

 

명애와 다래는 해가 질 때까지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하철 안에서 할머니는 그새 동생이 되어있었다. 아이는 할머니를 등에 업었지만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살금살금 할머니 방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더 작아져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 명애를 조심조심 바닥에 눕히고 곁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다래는 자기 방에서 깜짝 놀라서 깼다. 엄마는 네가 홍시를 먹었냐며 냉장고에서 홍시를 찾고 있었다. 할머니 방에 들어가보니 할머니는 방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아이는 쭈글쭈글한 할머니 얼굴에 대고 속삭인다.

 

"명애야...
가을이 오면 우리 꼭 다시 놀러 가자."



동심을 꿈꾼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모두가 나와 똑같은 마음일 거라 오해하면서 나는 동심을 꿈꾼다. 아름다움과 선함과 진실함은 질료나 행동이나 이야기 같은 구체성으로밖에 잡을 수 없고 그걸 욕심껏 잡으려 하면 어느새 허망하게 사라지듯이-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리라-동심도 그런 것 같다. 엄마의 아픈 다리를 쉬게 해주고 싶은 안타까움, 활짝 핀 꽃으로 외삼촌을 웃게 만들고 싶은 다정함, 아픈 할머니를 아이로 돌려놓고 싶은 한없는 연민에서 나는 동심을 본다. 보드라운 아이의 웃음에서, 다정하게 잡아주는 손에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에서, 의심 않고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믿음에서, 자기를 활짝 연 품에서.  

 

달리 표현해 보자면, 사심 없는 마음이 동심의 얼굴 같다. 나를 생각하지 않고, 남을 의심하지 않고, 내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남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 어른도 가끔 그런 마음이 되는 찰나가 있다. 오래 유지하기는 도저히 어려운 아주 짧은 동안에만 어른도 그럴 수 있다. 어른은 그 순간을 드물게 만나지만 아이는 그 순간을 아예 사는 것만 같다. 그건 누구보다도 우선 아이 자신에게 최고로 좋은 일이어서, 아이들은 모두 행운아다. 자라면서 우리는 행운을 하나씩 하나씩 길에 떨어뜨리며 잃어버렸다. 혹여 운이 좋다면 어떤 어린아이가 그걸 주워 우리에게 다가와 물을지 모른다. 이거 아저씨, 아줌마 거예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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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해 참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하게 되었다. 우리와 악연으로 맺어진 미운 이웃이라는 것 외에는 학교 국사시간에 배운 대강의 지식 밖에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안다'고만 생각했다.


TV에서 드문드문 보고 들은 일본인들의 모습은 정치적인 것을 뺀다면 -이것을 뺀다는 것은 애초애 무리이고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 모르겟으나-무척 흥미롭다.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미의식을 분석한 책을 읽고,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죽음이 항상 강하게 자리한다는 사실이 아주 새롭게 다가웠더랬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토토로>의 민담적 이야기도 우리 것과 무척 달랐다. 일본의 정원도 우리의 정원과 다르고, 그들의 문자 체계 역시 한글과 다르다.


그림은 또 어떨까. 우키요에는 우리의 민화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다.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는 보통 우리 것과 대응시켜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이해하기가 한층 쉽기도 하려니와 인류 문명은 보편성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세밀하게 들어가면 절대 대응되지 않는 그들만의 특수성이 있어서, 우키요에 역시 우리 문화 속에서는 대응시켜볼 수 있는 그림이 없는 것 같다. 


저자 오쿠보 준이치는 우키요에를 시대별로, 작가별로, 다양한 작품들을 정리해서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별로 반영했던 주제와 제작, 판매까지 섭렵한다. 아무튼 무척 잘 읽었고, 이제 좀 우키요에를 알 것 같은 느낌이고, 우키요에를 통해서 일본인들도 살짝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몇 가지를 얘기하자면:


우선 작품들이 정말 아름답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보통의 일본인들이 우키요에를 집에 붙여놓고 즐겼다는 사실이 무척 재밌다. 생활 속에 그림으로 이야기를 들여놓은 셈이다. 우키요에는 인물과 풍경과 이야기를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두번째로는, 그림 속에 주제를 숨겨놓았다(!)는 사실. 정치적으로 금지하는 주제들이 있을 때 우케요에 화가들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그리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독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들이 사회적 억압을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또 흥미로웠던 점은, 우키요에가 해학성으로도 정의될 수 있다는 대목이었다. 해학은 왠지 한국인들의 전용어인 것만 같고 해학을 즐길 줄 아는 한국인들의 지성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던 것도 사실인데, 일본인들에게도 해학이? 우키요에 안에는 여러 흐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희화'라고 불리는 것들로서, 골계미 즉 해학이 중심이 되는 그림들이다. 책 102쪽과 105쪽의 그림이 참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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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4탄: 창가의 토토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토토는 바로 전에 읽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영혼의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아이다. 기질적으로 너무나도 흡사한 두 아이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환경에 놓여있다. 노래하는 작은 새와 같았던 제제가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별처럼 빛났다면, 봄날의 나비 같은 토토는 너그럽고 호의적인 어른들 속에서 싱싱하게 자란다.

 

사람들은 인간이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는 얘기일 텐데, 기질은 옳고 그름에서 벗어난 생물학적인 자질임에도 사람들은 엉뚱하게 이것을 도덕적으로 정의하는 것 같다. 넌 나쁜 아이야, 넌 착한 아이야,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한번 나쁜 아이가 되면 계속 나쁜 아이로만 살 수 밖에 없다. 문화권, 시대, 부모에 따라서 아이는 나쁘거나 착하다고 판단되고, 이 판단은 '기질은 안 변해'라는 말로 영구히 굳어져 버린다.  

이렇게 해서 제제는 작은 악마가 되었고 토토는 '사실은 착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맞는 말처럼도 들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제가 다른 제제가 될 수 없고 토토 역시 다른 토토가 될 수 없으니까. 노래하는 작은 새가 불행히도 폭풍우를 만난다고 해도 뱀이 될 리 없다.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가슴이 아픈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순수하면서 너무나 연약하기에.     

   

하여간 <창가의 토토>를 읽으며 여러가지로 마음이 무거웠다. 20세기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생각났고, 그 속에서 아이를 키운 지난날들이 떠올랐고, 한없이 눈이 어두웠던 부모로서의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모와 내 아이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불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거기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지도 못했고, 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똑같은 그 열차가 선로를 달리고 있다.

 

그래서 부모가 될 사람이라면,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p.s. 번역에 마음이 갔다. 2000년을 코 앞에 둔 '1999년 저물어가는 한 해'에 옮긴이의 말을 썼다고 나와 있으니 번역한 지가 20년 전인데 그래서인지 옛스런 느낌이 살짝 났지만 그것조차도 정감이 느껴지는 참 자연스럽게 잘 옮겨진 번역문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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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3탄: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안 읽었는 줄 알았는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읽어서 좋았다. 

 

여섯 살이 채 안 된 아이, 제제의 세상은 너무나 선명하다.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투명하게 들여다본다. 현실과 마음의 바닥은 깨끗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혹은 정확히 볼 줄 몰라서, 대충 미화하거나 외면하지만 제제는 그럴 줄을 모른다.

 

제제가 묘사하는 어른들은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라 환경에 짓눌려 비틀어지고 신음하는 인간이다. 초등교사로 일하는 누구는 아이들을 교육하다보니 인간의 선함에 대해 회의적이 된다고 했다. 제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말에 수긍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아이든 어른이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기본적으로 악하게 세팅되어 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삶의 최극단에 몰리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발버둥칠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제제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외부적 환경에 너무나도 취약한 존재여서 일부러 제제를 괴롭힌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제제만 아니라 그 주변의 어른들 모두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 모두가 안쓰럽다. 

 

지금 내 옆에 혹시 또 다른 제제가 있을까? 나는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럴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저 아이는 문제아야, 쟤는 질이 나빠, 못됐어, 라는 말을 듣는 아이, 나를 실망시키고 나에게 대들고 형편없고 바보 같아 보이는 아이, 되바라지거나 토라진 아이, 다루기 힘든 이 모든 아이들이 그냥 제제니까. 특별한 눈이 있어서 제제를 알아보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아이가 제제니까. 

 

나를 비롯한 우리 모든 어른들도 한때는 제제였다. 지금도 그 아이는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 그럴 마음만 있다면 내 안의 그 아이부터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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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2탄: 켄즈케 왕국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무조건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마이클 모퍼고. 이 작가를 어째서 몰랐을까, 책을 읽으며 자책했다. (책꽂이에서 이 책을 볼 때마다 참 재미없겠다고 생각했던 건, 표지 탓이 99퍼센트다. 너무 유명해서 식상할대로 식상한 저 파도 그림이 책의 내용까지 선입견을 갖게 만든 것 같다.) 열두 살 소년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모험이야기를 나는 <파이이야기>와 <모비딕>의 어린이 버전으로 부르고 싶다. 

 

소년은 폭풍우 치는 밤에 바다에 빠지고, 죽음의 경계까지 다가간 소년에게 새로운 삶의 차원이 열린다. 이야기는 분명 허구지만 매우 사실적이고, 사실적 세계와 환상의 세계의 경계선에 미묘하게 걸쳐진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작가는 소년과 노인의 우정, 사십 년의 시간적 도약, 두 가지 삶 앞에서의 고통스러운 선택을 이야기한다.

 

이 모험이야기의 저변에서는 사랑의 감정이 흐른다. 그 사랑은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 너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데서 시작되어 작은 물줄기를 만들며 천천히 흘러 도달하게 되는 깊은 공감이 아닐까 한다.

 

나한테 네 이야기를 해줘. 네 이야기... 내가 들을게... 어쩌면 내 이야기도 해줄지 몰라...

 

우리는 대부분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백분의 일쯤을 겨우 알았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가능한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그렇게 느꼈다.

 

소설에서 노인은 남고 소년은 떠났지만, 나는 이 책을 내 서가에서 떠나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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