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무엇이 부족할까, 무엇이 빠져있을까를 심각히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오래된 고민이고 지금도 여전한 고민이지만 그래도 점점 나는 나 자신과 조화롭게 타협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림책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반쪽이>는 결핍과 관련된 재미있는 옛이야기이다.














이 그림책은 안 본 아이가 드물 것 같다. 무려 1997년에 발표되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이야기와 그림이 찰떡궁합이고,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옛이야기의 반복적 운율을 참 잘 살려냈다. 재치 있는 글맛, 흥미로운 장면 구성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낡은 느낌이 없고 오히려 현대적이기까지 하다.

 

주인공 반쪽이는 이름 그대로 반쪽 인간인데, 입도 코도 눈도 귀도 팔도 다리도 모두 하나씩밖에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엄마의 실수 때문이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한계 때문일 수도, 불가항력이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자신이 벌인 일을 끝까지 매조지 못한 신령님의 게으름을 탓해도 좋으리라.

 

옛날 깊은 산골에 어떤 아주머니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서 신령님께 지극정성으로 빌었더니, 뒤뜰 우물에 잉어 세 마리를 내려줄 테니 구워 먹으라고 신령님이 알려주신다. 아주머니기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우물가로 갔더니 정말 우물에 큰 잉어 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주머니는 신령님의 말대로 잉어를 구워서 먹었는데, 두 마리 반을 먹고 배가 불러서 잠깐 쉬는 사이에 고양이가 남은 반쪽을 한입에 날름 먹어버렸다. 아주머니는 성의가 없지 않았다. 한 마리는 한입에 꿀꺽 삼키고 또 한 마리는 꼭꼭 씹어 먹었으며 마지막 한 마리는 배가 부른대도 '꾸역꾸역' 먹으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반쪽을 남겼던 까닭은 아주머니가 신령님을 무시해서도 아니고, 불성실해서도, 교만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위장의 용량이 세 마리의 잉어를 모두 감당해 낼 수 없었을 뿐이다.

 

아무튼 얼마 뒤에 아주머니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마지막 잉어를 반쪽만 먹은 탓에 셋째 아들이 그만 반쪽 인간이 되었다. 아들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어느덧 첫째와 둘째 아들이 과거를 보러 가게 되는데, 형들은 반쪽이가 따라오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형들은 반쪽이랑 같이 가기 싫었대.
사람들이 놀릴 테니 말이야."

 

그래서 반쪽이를 큰 바위에 묶고 큰 나무에 묶어서 따라오지 못하게 했는데, 그때마다 반쪽이는 바위를 번쩍 들어서 집 마당에 쿵 내려놓고 나무도 쑥 뽑아서 집 마당에 털썩 내려놓았다. 반쪽이는 힘이 장사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따라오는 동생에게 약이 오른 형들은 반쪽이를 밧줄로 꽁꽁 묶어 호랑이가 나오는 깊은 산속에 던져버렸고, 당연히 반쪽이는 밧줄을 툭툭 끊어내고 호랑이를 다섯 마리나 잡았다.

 

반쪽이는 호랑이 가죽을 벗겨서 집에 돌아가다가 그것을 탐내는 부잣집 영감을 만났고, 영감은 반쪽이에게 호랑이 가죽과 자기 딸을 내기로 걸고 장기 세 판을 두자고 했다. 반쪽이가 장기에서 이기자 영감은 딸을 못 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럼 내가 오늘 밤 (영감님 딸을) 업어 갈 테요."

 

영감네 집에서는 딸을 지키려고 야단이 났는데 반쪽이는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밤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았다. 세 번째 밤이 됐을 때는 모두 지쳐서 쿨쿨 잠이 들었다. 반쪽이는 다 계획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떡시루를 씌우고 상투를 서로 묶고 북이랑 꽹과리를 손에 잡아매고 영감 수염에 유황을 바른 다음, 딸 방에 벼룩을 술술 뿌려서 딸이 따가워하며 방에서 뛰어나왔을 때 딸을 냉큼 업고 달아나며 냅다 소리를 지른 것이다.   

 

"반쪽이가 영감 딸 업어 간다."

 

고함소리에 모두 잠을 화다닥 깼는데, 유황을 바른 영감 수염에는 불이 붙었고 사람들의 상투는 묶였고 머리에는 떡시루를 썼고 손에서는 북 꽹과리가 둥둥 꽹꽹 정신없이 울렸다는 얘기. 반쪽이는 영감 딸을 색시로 삼아 호호백발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살았다.

 

반쪽이 이야기는 재미로 읽어도 충분하다. 아이들은 무조건 이 이야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뭔가 크게 결핍된 주인공에게 아이들은 끌리게 마련이다. 반쪽이는 게다가 제일 어린 막내이기까지 하다. 아이들은 그저 천진하기만 하고 세상 걱정거리가 없어 보이지만 막상 아이들도 그렇게 느낄까? 아이들은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이 큰 세상에 방금 온 어린아이들은 모든 게 모르는 것투성이고 모든 게 서툴다. 워낙 쑥쑥 자라니 아이들의 반년이나 일 년은 어른들 세계에서 이삼 십 년을 맞먹는 것 같다. 그래서 형누나들에게도 열등감을 심하게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속에 감추고 있을 무력감을 위로하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 주인공이 필요해진다. 반쪽이 이야기는 심리적인 결핍감을 신체적인 결핍으로 보여준다. 입도 눈도 팔도 다리도 하나씩밖에 없는 반쪽이. 그런데 이 반쪽이가 힘도 장사고 꾀도 많고 호호백발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살았다니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가!

 

그런데 결핍은 반쪽이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이야기 속 아주머니에게는 남편이 없다. 그러니까 반쪽이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다. 아주머니는 신령님이 점지해 주신 덕분에 아들을 셋이나 얻는다. 전해져 내려오는 영웅담을 보면 평범하게 태어나는 경우가 드물어서, 반쪽이의 영웅성을 강조하려고 평범한 남자 대신 신령님이 등장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옛이야기에서 완전수를 상징하는 3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잉어 세 마리, 아들 삼 형제, 셋째 아들, 바위와 나무와 호랑이로 이어지는 형들과의 세 번의 힘대결-남편 혹은 아버지의 부재를 그렇게 해석해도 완전히 엉뚱하지는 않을 것 같다.

 

흥미로운 건, 반쪽이는 바위와 나무를 계속 늙은 어머니에게 갖다 주는데 이야기의 결말은 어리고 예쁜 색시와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반쪽이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어리고 부족한 아이에서 사회적으로 완전한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어머니는 그 단계에서 아이의 무대에서 퇴장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반쪽이는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반쪽이다. 눈과 코와 입고 팔다리가 제대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이 옛이야기가 진짜로 하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어떻게 생겼든,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온전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지. 너는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야, 하고 옛이야기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너무 세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아이들은 은연중에 다 알아들을 것만 같다. 이야기를 읽으며 유쾌하게 웃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지는데 아마도 그 순간, 잠시, 나도 나의 온전함을 살짝 경험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전에는 많은 게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것 때문에 열등감이 심했다. 결핍을 채우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지만 나의 결함을 보정하고 채우려고 할수록 부족한 구멍은 더 커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핍감이 무조건 나쁘기만 할까? 그것은 사람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힘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보러 가는 형들을 따라가는 반쪽이가 바위와 나무를 번쩍번쩍 드는 건 어쩌면 질투의 힘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정상적인 몸으로 정상적인 궤도를 따라 사회로 진입하는 형들을 보며 반쪽이가 심한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으리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자신을 밀어내는 형들을 기어코 쫓아가려고 했겠지 싶다. 하지만 결핍감에서 비롯된 이른바 질투의 힘으로 반쪽이는 죽죽 앞으로 나아가서 결국에는 색시를 얻는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온전한 존재였구나! 그래서 반쪽이는 영원히 반쪽이로 남는다. 그것은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적극적인 결심이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아무튼 시인 기형도도 바로 이 질투의 힘으로 멋진 시를 썼으니 결핌과 질투는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결핍과 그것으로 인한 질투는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장의 걸음을 추동시키는, 인간 내면의 중요한 동력일지 모르겠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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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은 상상의 친구를 만든다고 한다. 나도 꽤 공상을 하는 어린이였지만 상상의 친구를 만든 기억은 없다. 그러나 책 속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큰 기쁨과 위로를 선사받았다. 어린이를 소재로 하거나 어린이를 위해 만든 문학이나 영화를 보면 상상의 친구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은데, 그런 걸 보면 아이들에게는 평범한 현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깊고 생생한 욕구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혹은 현실이 아이들에게 너무 버거워서 그들을 도와줄 보조적 수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토끼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소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외로운 아이다. 텔레비전도 보고 책과 장난감도 많고 가끔 엄마랑 놀이터도 가고 외식도 하지만, 그럴 때는 정말 신이 나지만, 그러고 나면 소녀는 '다시 혼자'가 된다. 소녀는 거친 현실 세상 속에서 너무나 작고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소녀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그래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느낀다. 그 친구 이름이 알도다. 알도는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찾아와 도와주는데, 아이들이 소녀를 발로 차고 때렸을 때도 알도가 나타나서 걔네들을 쫓아줬고 무서운 꿈을 꿨을 때도 책을 들고 와서 읽어줬다. 다행히 소녀는 알도와만 놀지 않고 알도를 까맣게 잊고 지내는 날도 있다. 그런 날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다. 그것도 알도 덕분인 것으로 어렴풋이 짐작된다. 혼자 지내는 버거운 하루하루를 알도가 같이 있어줬기에 소녀는 조금씩 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는 여전히 어리고 여리다. 그래서 소녀에게는 여전히 알도가 필요하고, 여전히 알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나에게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
알도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여기에 외로운 아이가 또 있다. 그림책이 아니라 글밥이 꽤 되는 저학년 동화인데, 아이들용이라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잘 쓰인 판타지 문학이다.  

 

  


 

 













주인공 아이는 햇볕도 안 드는 지하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산다. 엄마는 식당 일을 마치고 밤늦게야 돌아오고 친구들은 아이가 다리를 절뚝거린다고 놀린다. 아이는 학교 준비물을 잘 챙겨가지 않아서 선생님한테 자주 혼이 나고 주인집 개는 너무 무섭다. 아이는 스스로를 '꼬마 여자애'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꼬마''여자'애가 약점이라고 단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아이들 세계에서도 여자가 약점이 되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이야기는 이 두 약점을 약점이 아니라 선언하듯, 주인공 아이를 여왕님이 아닌 임금님으로 등장시킨다. 일단은 아이의 이름이 임금님이다. 성이 ''이고 이름이 '금님'이다.

 

금님이는 빈 집에서 외롭고 심심하고 슬프다.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아서 자주 한숨을 쉬곤 해서 엄마에게 타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날 중 어느 하루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금님이는 평소처럼 혼자 빈 집에서 어두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그런 생각은 그만하자고 마음을 먹고 다리를 쭉 펴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발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두 발 사이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두 발 사이에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놀랍게도 그건 바로 호리병이었어요!"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그다음에 벌어졌다. 호리병 안에서 개미만큼 작은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빙 둘러서 에워싸고는 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임금님이세요?"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름이 임금님이니까. 작은 사람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드디어 임금님을 만났다고 기뻐했다.

 

", 세상에! 드디어 임금님을 만났네요. 저희들은 임금님의 백성이에요."

 

외롭고 불행한 아이에게 나타난 판타지의 세계다. 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이렇게 심심하고 외롭고 불행하고 슬플 때 열린다. 작은 사람들은 판타지 문학의 중요한 모티브인데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들을 아이의 두 발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호리병 속에서 나오게 했다. (두 발을 닿지 않을 거리로 가까이 대보면 꼭 호리병 같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아이는 이제 이름만 아니라 진짜 임금님이 된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보살피는 임금님 말이다. 작은 사람들은 임금님에게 자신들이 몹시 굶주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때 마침 아이도 배가 고픈 참이었다. 엄마 없이 혼자 있을 때 아이는 밥을 잘 챙겨 먹지 않기 때문이다. 금님이는 작은 사람들을 위해서 밥을 차려주었고 작은 사람들이 말했다. "임금님이 드셔야 우리도 먹을 수 있어요." 하고. 그래서 금님이는 엄마가 만들어놓은 감자조림 반찬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다.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아이는 좋은 임금님이 되는 법을 배운다. 작은 사람들은 임금님이 행복해야 백성이 행복하고 임금님이 불행하면 백성도 함께 불행하다고 말했고, 아이에게 지금 왜 불행한지를 물었다. 아이는 자신의 결핍을 돌아본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면 기쁘고 흐뭇하시겠어요? 어떤 일이 생기기를 원하세요?"

 

금님이가 행복해지려면 결핍이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건, 무엇이 결핍인지, 결핍을 직면하는 일이다. 그건 아이 어른 누구에게나 그럴 테다. 아이는 진짜 임금님처럼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자신 곁에서 든든하게 보살펴주는 하인들이 있기를 바랐다. 아이는 다리를 절뚝거리지 않고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었다. 아이는 수염이 까칠까칠하고 목말을 태워주고 휘파람을 부는 아빠를 갖고 싶었고, 팔짱을 끼는 친구를 원했다. 주인집 개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용기도.

 

이 모든 현실 인식과 욕구 충족이 두 발 사이에서 생겨난 호리병 속에서 나온 작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물론 다 상상 속에서. 하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결핍감이 채워지면 나면 마음이 좀 위로받지 않을까? 위로를 받으면 자연히 힘이 나는 법이다. 실제로 금님이는 백성들에게 밥을 차려주면서 자기도 엄마가 해준 감자조림 반찬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고, 무서운 개를 만났을 때 백성들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보았다. 친구들이 놀릴 때도 백성들을 생각해서 당당해져 보았다. 그렇게 해서 금님이의 현실이 조금씩 바뀌어나간다. 그건 금님이가 현실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나간 덕분이기도 하다. 아동문학 평론가 김서정은 이 상호작용을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의 따뜻하면서도 힘찬 포옹'이라고 했다.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임금님처럼 다리가 아픈 아이가 또 있다. 이 아이는 금님이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다리가 아파서 일 년째 침대에 누워만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영영 못 걷게 될 것 같다. 이 아이의 이름은 예란. 예란은 엄마 아빠가 자신의 다리를 두고 하는 얘기를 몰래 들었던 날, 판타지의 세계를 만난다. 이성적인 현실주의자는 주인공이 판타지의 세계로 도망쳤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판타지의 세계가 예란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아이의 무의식이 혹은 아이의 영혼이 아이를 감싸주려 나섰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고 본다.

 

  


 

 











그 충격적이고 절망스러웠던 날, 예란 앞에 어스름 나라의 백합줄기 아저씨가 찾아왔다. 이층 집의 닫힌 창문으로 불쑥 나타난 작은 아저씨는 예란을 어스름 나라로 데려간다. 어스름 나라는 '허깨비 나라'라고도 불린다는 걸 예란은 알고 있다. 자신도 그게 상상인지 안다는 얘기다.

 

어스름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창문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다리가 아파도 걷고 날고 춤을 출 수 있다. 주스를 뿌리며 장난을 쳐도 괜찮고 전차도 운전할 수 있다. 예란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어려움과 불가능과 제약을 벗어난 세계를 예란은 꿈꾼다. 그런 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세계를.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알도>의 존 버닝햄과 <나는 임금님이에요>의 이미현, <어스름 나라에서>의 린드그렌은 아이를 판타지 속에 얼마나 머물게 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아이로 하여금 판타지 세계를 완전히 떠나게 하지는 않는다.    

 

임금님이 어려움을 하나씩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서 현실 속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그러니까 바쁜 엄마를 도와 설거지와 청소도 해놓고 학교 준비물도 챙기고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느라 바빠서 백성들을 잘 만나지 못할 즈음, 백성들이 임금님에게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임금님 덕분에 자신들도 평화롭고 행복해졌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늘 임금님 곁에 있다고, 그러니 언제나 저희를 잊지 말라고 얘기한다.

 

백성들은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호리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호리병은 점점 연해지다가 투명하게 변하더니 마침내 환한 빛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환한 빛은 내 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어요. 발이 따뜻해지고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빛은 남김없이 내 양쪽 발로 빨려 들어가 다리를 타고 배와 가슴으로 가더니 머리까지 가득 차올랐어요.
내 몸이 빛으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어요.
나는 가만히 내 몸을 감싸 안았어요.
빛이 된 백성들이 내 안에 함께 있는 것만 같았지요. 백성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늘 임금님 곁에 있답니다."

 

린드그렌 작가의 백합줄기 아저씨는 어스름 나라 여행을 끝내고 헤어질 때면,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임금님의 작은 사람들과 다르게 언제나 이렇게 인사한다.

 

"내일 어스름 녘에 다시 만나자."

 

예란은 영영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서 그랬을까? 예란은 침대에서 보낸 일 년을 잘 버틴 아이다. 그런데 앞으로 더 힘든 시간이 예란 앞에 놓여있는 것 같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이 단단해질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단순하게 보자면, 아이는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없는 매일의 낮을 견뎌낸 보상을 어스름 녘에 누릴 권리가 있다고도 말하고 싶다. 린드그렌 작가는 아이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작품을 포함해서 몇몇 작품이 거의 파격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판타지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 <그리운 순난앵>이란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현실로 돌아오는 문을 아예 닫아버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충분히 그 안에서 위로받아야 한다는 듯이. 때가 되면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믿는 것 같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너를 언제나 지지하고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일본의 정신분석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판타지를 '영혼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생각할 때 어느 쪽에도 포함될 수 없는 것, 또는 몸과 마음을 통합하여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어려움에 놓인 아이들, 그러니까 알도의 소녀와 임금님과 예란 같은 아이들이 힘을 내고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건 그들의 영혼 덕분일 것이라고 하야오는 말한다. 영혼이 아이들을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타지는 영혼이 아이들과 또 우리 어른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반대로, 영혼이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판타지가 마음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혼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지만, 영혼은 늘 우리 주위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판타지는 그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여 남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 가와이 하야오

 

아이들에게는 환상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환상 속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어른의 세계는 거칠고 무정할 때가 많고, 아이들끼리의 세계는 더 야만적일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이 맞닥뜨리는 현실의 장애와 위험과 갈등을 판타지 세계 속에서 살아내 보는 게 필요하다. 상상의 존재에게 위로받고 의지하고 화를 내고 망쳐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현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터득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는 어려운 시기를 넘어갈 수 있다. 그럭저럭, 잘 하든 못 하든.  

 

그런데 나는 똑같은 말을 문학 일반에도 대입하고 싶다. 특히 좋은 소설 속에서 나는, 하야오 식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은,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풀려난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라고 나는 말하게 된다. 문학은 그것이 판타지든 사실주의든 실존주의든 SF든 다 통틀어서 판타지가 아닐까. 어차피 현실은 아니라는 점에서. 회화가 구상과 추상으로 더는 나뉘지 않고 구상이 곧 추상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말이다. 문학을 읽는 우리는 발을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걸친 채 두 세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것일지 모르겠다. 현실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은연 중에 모두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

 

 

 

인용 자료

그리운 순난앵,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홍재웅 옮김, 열린어린이, 2010.

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김서정, ()학교도서관저널, 2021.

판타지 책을 읽는다, 가와이 하야오, 햇살과나무꾼 옮김, 비룡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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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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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이야기가 극도로 절제된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술된다. 인물들의 삶은 녹록치 않고, 그들이 자기 자리에서 어떻게 삶을 버티어내고 있는지를 작가는 그저 보여줄 뿐인데, 순수히 정제되어 본질만 담아낸 이야기들이 우리가 처한 삶을 이해와 연민으로 감싸는 듯하다. 번역은 어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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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금님이야 난 책읽기가 좋아
이미현 지음, 이지선 그림 / 비룡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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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멋진 판타지다. 아이의 외로운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때만 나올 수 있는 문학이다. 결코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무겁고 어둡지도 않은 서술, 차분하고 단단한 문체, 독자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세상의 밝은 쪽으로 이끄는 이야기에 어른 독자도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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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다른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건 가능할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서 두 사람은 맺어질 수 있다고 믿고, 그러기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 우정이 오래가려면 전제가 있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사랑이 깊으면 다름이 문제 되지 않는데 사랑이 얕을 때 두 친구는 고민이 깊어진다. 다르다는 사실이 큰 걸림돌이 된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수 없어서 두 친구는 괴롭다. 한편으로 다른 전제가 더 있을 것 같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제는 다를 텐데 그림책 작가 윌리엄 스타이그는 뭐라고 생각했을까?  













민담이나 설화, 전설을 간단히 옛날이야기라고 치자. 이것들은 형식상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모두 상징적이고 비유적이란 점은 공통된 것 같다. 옛날이야기는 재미를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인간과 인간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생과 사라든가 선과 악,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것, 삶이 향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극복해야 할 것 같은 문제들이 가장 빠르고 간결한 지름길을 통해서 핵심으로 달려간다. 그림책도 옛날이야기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문학 장르로 보자면 시만큼이나 압축적이다. 꼭 필요한 얘기만 하고, 때로는 말을 삼켜서-시인 나태주의 표현-생략된 부분을 우리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아모스와 보리스>도 옛날이야기처럼 읽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지금부터 할 테니 그런 줄 알고 들어주세요, 하는 작가의 웃음이 담뿍 밴 첫 문장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옛날에 어떤 바다에 생쥐 한 마리가 살고 있었어. 그 생쥐의 이름은 아모스였지."


아모스는 육지에 사는 작디작은 생쥐인데 바다가 좋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 부서지는 파도 소리, 조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가는 소리를 사랑했고, 바다 저 멀리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낮에는 배를 만들고 밤에는 배 타는 법을 공부해서 드디어 항해를 떠났다.  



아모스는 즐겁게 항해했다. 삶에 대한 사랑으로 아모스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검푸른 밤바다에서 발견하는 거대한 우주, 그 안의 작은 생명체로서의 자신, 만물과 하나가 되는 감동에 젖었다. 그러다가 아뿔싸!


"아모스는 온갖 생명체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취해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갑판에서 떨어져 바다로 빠지고 말았어."


로우던트라고 이름까지 붙여준 배는 무정하게도 돛을 활짝 펴더니 아모스를 버리고 멀어졌고, 아모스는 망망대해에 혼자 외로이 남았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고 비가 오고 다시 날이 개었다. 아모스는 지치고 힘이 점점 빠져서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까? 그저 무섭기만 할까? 내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갈까? 하늘나라에는 다른 쥐들도 있을까? 아모스가 이렇게 끔찍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데 물속에서 큰 머리통이 불쑥 치솟아 올랐다. 고래였다.  


"넌 무슨 물고기니? 너, 물고기 맞지!"

" 난 물고기가 아니야. 난 생쥐라고. 고등 동물인 포유류에 속하지."

"난 뭍에서 살아."

"아니 세상에! 바다에서 살긴 하지만 나도 포유류란다. 내 이름은 보리스야."


'귀찮지 않다면'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아모스의 부탁에 보리스는 기꺼이 아모스를 등에 태워주었다. 집까지 가는 데는 일주일이 걸렸고, 두 포유류는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헤엄을 치며 나아갔는데, 그러는 동안 둘은 서로에게 깊이 감동하게 됐다. 보리스는 아모스의 가냘픔과 떨리는 듯한 섬세함, 가벼운 촉감, 작은 목소리,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에 감동했고, 아모스는 보리스의 거대한 몸집과 위험, 힘, 의지, 굵은 목소리, 끝없는 친절에 감동했다.


이 과정이 둘을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보리스와 아모스는 서로의 생활과 꿈을 이야기하고 깊이 감춰두었던 비밀을 나누었다. 고래는 육지 생활을 신기해했고 아모스는 바닷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반했다. 해변에 도착했을 때 둘은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슬펐지만 서로를 영원한 친구라고 불렀다. 그리고 덧붙였다.


"난 절대로 널 잊지 않을 거야."


아모스가 보리스에게, 목숨을 구해줘서 늘 감사할 테고 도움이 필요할 때 기쁘게 도와줄 거라고 하자 보리스는 바다로 돌아가며 혼자 웃었다. "저렇게 작은 생쥐가 어떻게 나를 돕겠어?"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아모스는 마음이 아주 따뜻해, 난 아모스를 사랑해, 정말 보고 싶을 거야."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하듯, 이야기는 이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지게 했다. 허리케인 때문에 해변으로 떠밀려온 고래 보리스를 아모스가 발견하고, 마음씨 고운 큰 코끼리 두 마리를 데려와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어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한번 아모스와 보리스는 헤어지게 되었다.




"거대한 고래의 두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지.
조그만 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고.
아모스가 찍찍댔어. "안녕, 보리스!!"
보리스도 천둥처럼 소리를 질렀어. "안녕, 아모스!"
보리스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어.
아모스와 보리스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서로를 절대로 잊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어."



이 그림책을 부러 찾아 읽었다. 친구가 무척 그리웠구나,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들여다보는 나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오랜 친구와 헤어져야 할 것 같아서, 관계를 더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동안 마음을 많이 앓았더랬다.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의 깨끗한 우정을 누리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건 상대의 잘못이라기보다 내가, 친구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가치관이 뚜렷해지고 시간에 쫓기고 현실의 문제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일까? 이런저런 이유들을 더 떠올려보다가 문득 이러는 건 무익하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정을 이어주는 것, 너무나 다른 두 친구가 서로 영원히 친구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대해 저 사람 좋은 윌리엄 스타이그는 진솔하게 답한다. "그건 잊지 않는 거야." 만날 순 없지만 잊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의 첫 만남과 우리가 나눴던 마음속 이야기들, 비밀들, 그리고 그럴 일이 생긴다면 꼭 도와주겠노라 약속하는 따뜻한 마음, 그 모든 걸 잊지 않는 거라고.


사람에게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에 대해 약간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동의했었다. 그러나 사람은 물건이 아니고, 유통기한이란 말을 사람에 붙이는 순간 사람은 숭고한 존재에서 물건으로 끌어내려진다. 유통기한 대신 쓸 수 있는 더 좋은 말은 없을까? 그건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풀어서 얘기해야 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가 영원히 친구로 남게 되면 좋겠다. 우린 영원히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함께 있을 순 없어. 너는 육지에서 살아야 하고, 나는 바다에서 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난 절대로 널 잊지 않을 거야."


우정이란 지금 이 순간의 관계만 가리키는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어느 순간들, 그때의 그 바다, 그 밤과 그 낮의 일주일, 그때의 보리스와 아모스로, 그 순간과 그 순간 속에 놓였던 우리로 영원히 기억해 주는 일이 우정을 존재하게 한다. 내가 그렇게 기억할 때 친구는 영원한 친구가 된다. 마치 우리 내면에 순수한 아이가 언제나 살아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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