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는 안녕했다. 오늘은 안녕할까? 내일, 모레는? 나이가 들어도 내 불안감은 여전한 것 같다. 어릴 때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내 능력에 자신이 없어서 두려웠고 늙어가는 지금은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크다. 하지만 내용은 변해도 내 두려움은 하나로 정리된다. 과연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내 상상력과 자기 불신은 과해서 살면서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현실의 내 발목을 붙잡아서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갈 수 없게 했고, 현실의 내 눈을 가려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하게 했다. 막상 문을 열고 나서면 세상은 내 생각과 아주 많이 다를 때가 아주 많았는데도 집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상상의 세상을 지어내서 그 안에 틀어박히곤 했다.

     

어떤 화가 선생님은 독신으로 고양이와 사는 육십 대 중반 여성인데, 젊을 때부터 외지고 거친 곳에서 살았지만 그림만 있으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그림만 있으면'이라니! 어떤 젊은 여성 소설가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폐교를 고쳐 만든 한 문학관에 입주 작가로 들어갔는데 그 당시 그곳에 입주한 작가가 아무도 없어서 텅 빈 폐교 건물에 달랑 혼자 머물렀던 모양이다. 어떤 미친년이 혼자 거기서 글을 쓴다는 얘길 듣고 그 문학관을 운영하는 선배 소설가가 호기심에 자기를 찾아오기까지 했다나. 그 여성 작가 역시 써야 할 이야기만 있다면 귀신도 강도도 무섭지 않았나 보다.    

 

저 화가와 소설가는 배포가 큰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낯선 곳에 머물 수 있었던 건 그들에게 그림과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들이라고 나처럼 상상력이 없었겠나. 예술가들이니 상상력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 그걸 찾아야 할 것 같다. 그걸 찾으면 새 집에서의 내 불안과 공포 혹은 자기 의심을 해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자아이 아이린이 눈보라 속에서 큰 상자를 들고 간다. 상자 속에는 아이린의 엄마가 만든 공작부인의 무도회 드레스가 들어있는데, 무도회는 바로 오늘 저녁이고 엄마는 병이 나서 아이린이 대신 드레스를 공작부인의 집에 가져가는 중이다. 날씨가 거칠어서 엄마는 아이린을 걱정했지만 아이린은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엄마가 만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드레스가 무용지물이 되는 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엄마를 침대에 눕게 하고 누비이불을 두 장이나 꼭꼭 덮어준 뒤에 발치에 담요까지 하나 더 얹어주었다. 그리고 꿀을 넣은 레몬차를 끓여 놓고 난로에 장작도 한가득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옷을 단단히 껴입고 눈발이 휘몰아치는 길로 나섰다. 밖은 아주 추웠고 눈이 쉬지 않고 내렸다. 바람은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서 내던지고 허공으로 눈을 퍼 올려서 마구 흩뿌렸다. 바람은 아이린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았지만 아이린은 물러서지 않고 뒤로 돌아서서 등으로 바람을 밀면서 계속 걸어갔다. 입술을 꼭 깨물고서 말이다. 아이린은 정말 중요한 심부름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집으로 가라, 아이린! 집으로 돌아가란 말이다아아아..."
"싫어! 난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 못된 바람아!"
"집으로 돌아가라니까아아아아!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니까아아아아. 내 말 안 들었다가는..."

 

아이린은 바람과 계속 싸우다가 그만 상자를 뺏기고 말았다. 바람은 상자 뚜껑을 홱 열어젖혔고 무도회 드레스는 너풀너풀 일어나 빙글빙글 춤을 추며 날아갔다. 아이린은 눈물이 솟구쳐 속눈썹이 얼어붙어 버렸다.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겨우 이렇게 날려 보내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재고, 자르고, 시침질을 하고, 한 땀 한 땀 꿰맸단 말이야? 공작부인은 또 어떻고? 가엾은 공작부인!"

 

아이린은 빈 상자라도 들고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작부인에게 얘기하기로 결심했다. 집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아이린의 여정은 이미 험난했지만 공작부인의 집으로 가는 길은 더 험난했다. 눈은 끝도 없이 내려 점점 깊이 쌓였고, 바람은 울부짖었고, 아이린은 구덩이에 발이 빠져서 발목까지 접질렸다. 짧은 겨울 해는 저물어서 이윽고 밤이 되었고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아이린은 길을 잃고 말았다.

 

작은 꼬마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서 산비탈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온몸이 눈 속에 파묻혔다. 살려달라고 해봤자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아이린은 추위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그때 아이린은 생각했다.

 

"그래, 그냥 이대로 얼어 죽자. 그럼 이 고생도 끝이잖아?"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는 사랑하는 엄마 생각에 아이린은 팔다리를 마구 휘저어서 눈구덩이에서 빠져나왔고 끝내 공작부인의 집에 도착했다. 무도회 드레스는 훨훨 날아서 기적적으로 공작부인의 집 근처 나무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새 드레스를 입은 공작부인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웠다.  

 

용기가 필요할 때 나는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는 아이린의 모습을 종종 떠올렸고 그러면 아이린의 용기가 내게도 솟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확실히 용감한 아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이린을 통해서 그 이상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린은 거센 눈바람을 맞으며 품에 상자를 꼭 껴안고 걸어가는데, 그 안에는 엄마가 공작부인을 위해 만든 무도회 드레스가 들어있다. 마치 화가의 그림과 소설가의 이야기처럼 아이린에게도 엄마의 드레스가 있고, 그 덕분에 혹은 그 때문에 아이린은 눈보라가 거세게 치는 집밖으로 용감하게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드레스의 진짜 의미는 따로 있다. 그것은 드레스가 바람에 날아간 뒤에 분명해진다. 드레스가 바람에 날아가버려도 상자의 빈자리는 비어있지 않다. 거기에는 아이린의 마음이 있다. 엄마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려는 마음, 엄마에 대한 따뜻한 사랑, 공작부인에 대한 존중, 더 나아가 드레스로 상징되는 예술에 대한 추앙이 드레스가 날아가고 나서 비로소 보인다. 아이린이 빈 상자를 버리지 않고 공작부인에게 가는 건 그 안에 소중한 가치가 들어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그림책은 단순히 용감한 꼬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을 용감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다.

 

무서움을 잊게 만들 정도로 소중한 것이 있다면 참 좋겠다. 화가의 그림, 소설가의 이야기, 아이의 엄마 사랑 같이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싸고 화려한 게 아니어도 보물 같을 것이다.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 한 송이 꽃,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의 반짝이는 두 눈동자와 코, 내 옆의 식구나 친구, 조용히 차를 마시는 순간 같은 것. 용감해지는 건 먼저 소중한 걸 찾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일이다. 용기란 그걸 지키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솟는 것이니까. 옷이 날아간 빈 옷상자 속에 있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지키고 싶어서 말이다.

 

한편으로, 아이린이 공작부인의 집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미리 세세히 알았더라면 집밖으로 나설 수 있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바람한테 드레스를 빼앗기고, 눈구덩이 속에 빠져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할 지경까지 가리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아이린은 대담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아서 어쩌면 아이린은 집안에서 난롯불을 더 피우고 "어차피 옷은 못 전해드려요. 공작부인도 이해하실 거예요" 하고 엄마를 위로하고 보살피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일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견고하게 내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는 법이다. 화가가 아무리 용감해도 외진 작업실로 가는 길이 때로는 무섭고 외로울 때가 있었을 테고, 소설가가 아무리 굉장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가득 담고 있어도 큰 폐교 건물의 검은 공간에 압도될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림만 있으면, 이야기만 있으면, 드레스만 있으면 하나도 무섭지 않아서 용감하게 길을 나섰지만 여정이 너무 험난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땐 어쩌나. 이렇게 앞일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나에게 누가 얘기해 주었다. "무슨 일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하는 거지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표지의 저 곰은 어느 날 문득 그냥 궁금해서 강을 따라가 봤다. 그러다가 그만 강에 빠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곰은 어떻게 했을까?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수밖에. 그러다가 우연히 통나무 위에 올라탔고 그다음에는 개구리와 거북이와 비버와 너구리 같은 여러 친구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강에 빠지기 전까지는 몰랐다. 외로웠지만 실은 친구가 많은 줄, 통나무배 타기가 위험하지만 재밌는 줄, 강이 일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 꺾이는 줄.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 모두 몰랐다, 강줄기가 끊기며 강이 느닷없이 폭포로 바뀌는 줄을.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 쇳덩이 같은 손아귀로 내 발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후회할 일 천지고 내가 실패자 같아서 마음이 처지는 날들이 있다. 앞으로 올 시간은 어디로 나를 이끌고 갈지 몰라서 두렵다. 곰처럼 호기심에서 강물에 살짝 발을 담가봤다가 예상치 못하게 빠진 일이 수없이 많아서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실행할 때면 이번에도 내가 허튼짓을 했나 의심하곤 한다. 하지만 그림책의 저 곰처럼 강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기로 했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건 매우 수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적극적이기도 한 삶의 역설적 태도가 아닐까 싶다. 

 

흘러가다 보면, 걸어가다 보면 끝에 이르겠지. 이 길과 강은 숨기고 있던 새로운 만남과 풍경을 펼쳐주겠지. 나서지 않고 빠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내가 모르던 세상을 보여주겠지. 눈구덩이에도 빠지겠지만 아이린처럼 팔다리를 휘휘 저어 빠져나올 수 있겠지. 아무튼 닥치면 닥치는 대로,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겠지. 용감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용기를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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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무엇이 부족할까, 무엇이 빠져있을까를 심각히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오래된 고민이고 지금도 여전한 고민이지만 그래도 점점 나는 나 자신과 조화롭게 타협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림책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반쪽이>는 결핍과 관련된 재미있는 옛이야기이다.














이 그림책은 안 본 아이가 드물 것 같다. 무려 1997년에 발표되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이야기와 그림이 찰떡궁합이고,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옛이야기의 반복적 운율을 참 잘 살려냈다. 재치 있는 글맛, 흥미로운 장면 구성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낡은 느낌이 없고 오히려 현대적이기까지 하다.

 

주인공 반쪽이는 이름 그대로 반쪽 인간인데, 입도 코도 눈도 귀도 팔도 다리도 모두 하나씩밖에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엄마의 실수 때문이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한계 때문일 수도, 불가항력이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자신이 벌인 일을 끝까지 매조지 못한 신령님의 게으름을 탓해도 좋으리라.

 

옛날 깊은 산골에 어떤 아주머니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서 신령님께 지극정성으로 빌었더니, 뒤뜰 우물에 잉어 세 마리를 내려줄 테니 구워 먹으라고 신령님이 알려주신다. 아주머니기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우물가로 갔더니 정말 우물에 큰 잉어 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주머니는 신령님의 말대로 잉어를 구워서 먹었는데, 두 마리 반을 먹고 배가 불러서 잠깐 쉬는 사이에 고양이가 남은 반쪽을 한입에 날름 먹어버렸다. 아주머니는 성의가 없지 않았다. 한 마리는 한입에 꿀꺽 삼키고 또 한 마리는 꼭꼭 씹어 먹었으며 마지막 한 마리는 배가 부른대도 '꾸역꾸역' 먹으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반쪽을 남겼던 까닭은 아주머니가 신령님을 무시해서도 아니고, 불성실해서도, 교만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위장의 용량이 세 마리의 잉어를 모두 감당해 낼 수 없었을 뿐이다.

 

아무튼 얼마 뒤에 아주머니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마지막 잉어를 반쪽만 먹은 탓에 셋째 아들이 그만 반쪽 인간이 되었다. 아들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어느덧 첫째와 둘째 아들이 과거를 보러 가게 되는데, 형들은 반쪽이가 따라오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형들은 반쪽이랑 같이 가기 싫었대.
사람들이 놀릴 테니 말이야."

 

그래서 반쪽이를 큰 바위에 묶고 큰 나무에 묶어서 따라오지 못하게 했는데, 그때마다 반쪽이는 바위를 번쩍 들어서 집 마당에 쿵 내려놓고 나무도 쑥 뽑아서 집 마당에 털썩 내려놓았다. 반쪽이는 힘이 장사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따라오는 동생에게 약이 오른 형들은 반쪽이를 밧줄로 꽁꽁 묶어 호랑이가 나오는 깊은 산속에 던져버렸고, 당연히 반쪽이는 밧줄을 툭툭 끊어내고 호랑이를 다섯 마리나 잡았다.

 

반쪽이는 호랑이 가죽을 벗겨서 집에 돌아가다가 그것을 탐내는 부잣집 영감을 만났고, 영감은 반쪽이에게 호랑이 가죽과 자기 딸을 내기로 걸고 장기 세 판을 두자고 했다. 반쪽이가 장기에서 이기자 영감은 딸을 못 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럼 내가 오늘 밤 (영감님 딸을) 업어 갈 테요."

 

영감네 집에서는 딸을 지키려고 야단이 났는데 반쪽이는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밤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았다. 세 번째 밤이 됐을 때는 모두 지쳐서 쿨쿨 잠이 들었다. 반쪽이는 다 계획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떡시루를 씌우고 상투를 서로 묶고 북이랑 꽹과리를 손에 잡아매고 영감 수염에 유황을 바른 다음, 딸 방에 벼룩을 술술 뿌려서 딸이 따가워하며 방에서 뛰어나왔을 때 딸을 냉큼 업고 달아나며 냅다 소리를 지른 것이다.   

 

"반쪽이가 영감 딸 업어 간다."

 

고함소리에 모두 잠을 화다닥 깼는데, 유황을 바른 영감 수염에는 불이 붙었고 사람들의 상투는 묶였고 머리에는 떡시루를 썼고 손에서는 북 꽹과리가 둥둥 꽹꽹 정신없이 울렸다는 얘기. 반쪽이는 영감 딸을 색시로 삼아 호호백발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살았다.

 

반쪽이 이야기는 재미로 읽어도 충분하다. 아이들은 무조건 이 이야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뭔가 크게 결핍된 주인공에게 아이들은 끌리게 마련이다. 반쪽이는 게다가 제일 어린 막내이기까지 하다. 아이들은 그저 천진하기만 하고 세상 걱정거리가 없어 보이지만 막상 아이들도 그렇게 느낄까? 아이들은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이 큰 세상에 방금 온 어린아이들은 모든 게 모르는 것투성이고 모든 게 서툴다. 워낙 쑥쑥 자라니 아이들의 반년이나 일 년은 어른들 세계에서 이삼 십 년을 맞먹는 것 같다. 그래서 형누나들에게도 열등감을 심하게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속에 감추고 있을 무력감을 위로하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 주인공이 필요해진다. 반쪽이 이야기는 심리적인 결핍감을 신체적인 결핍으로 보여준다. 입도 눈도 팔도 다리도 하나씩밖에 없는 반쪽이. 그런데 이 반쪽이가 힘도 장사고 꾀도 많고 호호백발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살았다니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가!

 

그런데 결핍은 반쪽이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이야기 속 아주머니에게는 남편이 없다. 그러니까 반쪽이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다. 아주머니는 신령님이 점지해 주신 덕분에 아들을 셋이나 얻는다. 전해져 내려오는 영웅담을 보면 평범하게 태어나는 경우가 드물어서, 반쪽이의 영웅성을 강조하려고 평범한 남자 대신 신령님이 등장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옛이야기에서 완전수를 상징하는 3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잉어 세 마리, 아들 삼 형제, 셋째 아들, 바위와 나무와 호랑이로 이어지는 형들과의 세 번의 힘대결-남편 혹은 아버지의 부재를 그렇게 해석해도 완전히 엉뚱하지는 않을 것 같다.

 

흥미로운 건, 반쪽이는 바위와 나무를 계속 늙은 어머니에게 갖다 주는데 이야기의 결말은 어리고 예쁜 색시와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반쪽이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어리고 부족한 아이에서 사회적으로 완전한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어머니는 그 단계에서 아이의 무대에서 퇴장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반쪽이는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반쪽이다. 눈과 코와 입고 팔다리가 제대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이 옛이야기가 진짜로 하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어떻게 생겼든,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온전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지. 너는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야, 하고 옛이야기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너무 세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아이들은 은연중에 다 알아들을 것만 같다. 이야기를 읽으며 유쾌하게 웃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지는데 아마도 그 순간, 잠시, 나도 나의 온전함을 살짝 경험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전에는 많은 게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것 때문에 열등감이 심했다. 결핍을 채우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지만 나의 결함을 보정하고 채우려고 할수록 부족한 구멍은 더 커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핍감이 무조건 나쁘기만 할까? 그것은 사람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힘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보러 가는 형들을 따라가는 반쪽이가 바위와 나무를 번쩍번쩍 드는 건 어쩌면 질투의 힘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정상적인 몸으로 정상적인 궤도를 따라 사회로 진입하는 형들을 보며 반쪽이가 심한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으리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자신을 밀어내는 형들을 기어코 쫓아가려고 했겠지 싶다. 하지만 결핍감에서 비롯된 이른바 질투의 힘으로 반쪽이는 죽죽 앞으로 나아가서 결국에는 색시를 얻는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온전한 존재였구나! 그래서 반쪽이는 영원히 반쪽이로 남는다. 그것은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적극적인 결심이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아무튼 시인 기형도도 바로 이 질투의 힘으로 멋진 시를 썼으니 결핌과 질투는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결핍과 그것으로 인한 질투는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장의 걸음을 추동시키는, 인간 내면의 중요한 동력일지 모르겠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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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은 상상의 친구를 만든다고 한다. 나도 꽤 공상을 하는 어린이였지만 상상의 친구를 만든 기억은 없다. 그러나 책 속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큰 기쁨과 위로를 선사받았다. 어린이를 소재로 하거나 어린이를 위해 만든 문학이나 영화를 보면 상상의 친구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은데, 그런 걸 보면 아이들에게는 평범한 현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깊고 생생한 욕구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혹은 현실이 아이들에게 너무 버거워서 그들을 도와줄 보조적 수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토끼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소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외로운 아이다. 텔레비전도 보고 책과 장난감도 많고 가끔 엄마랑 놀이터도 가고 외식도 하지만, 그럴 때는 정말 신이 나지만, 그러고 나면 소녀는 '다시 혼자'가 된다. 소녀는 거친 현실 세상 속에서 너무나 작고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소녀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그래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느낀다. 그 친구 이름이 알도다. 알도는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찾아와 도와주는데, 아이들이 소녀를 발로 차고 때렸을 때도 알도가 나타나서 걔네들을 쫓아줬고 무서운 꿈을 꿨을 때도 책을 들고 와서 읽어줬다. 다행히 소녀는 알도와만 놀지 않고 알도를 까맣게 잊고 지내는 날도 있다. 그런 날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다. 그것도 알도 덕분인 것으로 어렴풋이 짐작된다. 혼자 지내는 버거운 하루하루를 알도가 같이 있어줬기에 소녀는 조금씩 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는 여전히 어리고 여리다. 그래서 소녀에게는 여전히 알도가 필요하고, 여전히 알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나에게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
알도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여기에 외로운 아이가 또 있다. 그림책이 아니라 글밥이 꽤 되는 저학년 동화인데, 아이들용이라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잘 쓰인 판타지 문학이다.  

 

  


 

 













주인공 아이는 햇볕도 안 드는 지하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산다. 엄마는 식당 일을 마치고 밤늦게야 돌아오고 친구들은 아이가 다리를 절뚝거린다고 놀린다. 아이는 학교 준비물을 잘 챙겨가지 않아서 선생님한테 자주 혼이 나고 주인집 개는 너무 무섭다. 아이는 스스로를 '꼬마 여자애'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꼬마''여자'애가 약점이라고 단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아이들 세계에서도 여자가 약점이 되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이야기는 이 두 약점을 약점이 아니라 선언하듯, 주인공 아이를 여왕님이 아닌 임금님으로 등장시킨다. 일단은 아이의 이름이 임금님이다. 성이 ''이고 이름이 '금님'이다.

 

금님이는 빈 집에서 외롭고 심심하고 슬프다.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아서 자주 한숨을 쉬곤 해서 엄마에게 타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날 중 어느 하루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금님이는 평소처럼 혼자 빈 집에서 어두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그런 생각은 그만하자고 마음을 먹고 다리를 쭉 펴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발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두 발 사이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두 발 사이에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놀랍게도 그건 바로 호리병이었어요!"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그다음에 벌어졌다. 호리병 안에서 개미만큼 작은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빙 둘러서 에워싸고는 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임금님이세요?"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름이 임금님이니까. 작은 사람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드디어 임금님을 만났다고 기뻐했다.

 

", 세상에! 드디어 임금님을 만났네요. 저희들은 임금님의 백성이에요."

 

외롭고 불행한 아이에게 나타난 판타지의 세계다. 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이렇게 심심하고 외롭고 불행하고 슬플 때 열린다. 작은 사람들은 판타지 문학의 중요한 모티브인데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들을 아이의 두 발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호리병 속에서 나오게 했다. (두 발을 닿지 않을 거리로 가까이 대보면 꼭 호리병 같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아이는 이제 이름만 아니라 진짜 임금님이 된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보살피는 임금님 말이다. 작은 사람들은 임금님에게 자신들이 몹시 굶주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때 마침 아이도 배가 고픈 참이었다. 엄마 없이 혼자 있을 때 아이는 밥을 잘 챙겨 먹지 않기 때문이다. 금님이는 작은 사람들을 위해서 밥을 차려주었고 작은 사람들이 말했다. "임금님이 드셔야 우리도 먹을 수 있어요." 하고. 그래서 금님이는 엄마가 만들어놓은 감자조림 반찬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다.

 

판타지의 세계 속에서 아이는 좋은 임금님이 되는 법을 배운다. 작은 사람들은 임금님이 행복해야 백성이 행복하고 임금님이 불행하면 백성도 함께 불행하다고 말했고, 아이에게 지금 왜 불행한지를 물었다. 아이는 자신의 결핍을 돌아본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면 기쁘고 흐뭇하시겠어요? 어떤 일이 생기기를 원하세요?"

 

금님이가 행복해지려면 결핍이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건, 무엇이 결핍인지, 결핍을 직면하는 일이다. 그건 아이 어른 누구에게나 그럴 테다. 아이는 진짜 임금님처럼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자신 곁에서 든든하게 보살펴주는 하인들이 있기를 바랐다. 아이는 다리를 절뚝거리지 않고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었다. 아이는 수염이 까칠까칠하고 목말을 태워주고 휘파람을 부는 아빠를 갖고 싶었고, 팔짱을 끼는 친구를 원했다. 주인집 개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용기도.

 

이 모든 현실 인식과 욕구 충족이 두 발 사이에서 생겨난 호리병 속에서 나온 작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물론 다 상상 속에서. 하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결핍감이 채워지면 나면 마음이 좀 위로받지 않을까? 위로를 받으면 자연히 힘이 나는 법이다. 실제로 금님이는 백성들에게 밥을 차려주면서 자기도 엄마가 해준 감자조림 반찬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고, 무서운 개를 만났을 때 백성들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보았다. 친구들이 놀릴 때도 백성들을 생각해서 당당해져 보았다. 그렇게 해서 금님이의 현실이 조금씩 바뀌어나간다. 그건 금님이가 현실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나간 덕분이기도 하다. 아동문학 평론가 김서정은 이 상호작용을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의 따뜻하면서도 힘찬 포옹'이라고 했다.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임금님처럼 다리가 아픈 아이가 또 있다. 이 아이는 금님이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다리가 아파서 일 년째 침대에 누워만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영영 못 걷게 될 것 같다. 이 아이의 이름은 예란. 예란은 엄마 아빠가 자신의 다리를 두고 하는 얘기를 몰래 들었던 날, 판타지의 세계를 만난다. 이성적인 현실주의자는 주인공이 판타지의 세계로 도망쳤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판타지의 세계가 예란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아이의 무의식이 혹은 아이의 영혼이 아이를 감싸주려 나섰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고 본다.

 

  


 

 











그 충격적이고 절망스러웠던 날, 예란 앞에 어스름 나라의 백합줄기 아저씨가 찾아왔다. 이층 집의 닫힌 창문으로 불쑥 나타난 작은 아저씨는 예란을 어스름 나라로 데려간다. 어스름 나라는 '허깨비 나라'라고도 불린다는 걸 예란은 알고 있다. 자신도 그게 상상인지 안다는 얘기다.

 

어스름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창문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다리가 아파도 걷고 날고 춤을 출 수 있다. 주스를 뿌리며 장난을 쳐도 괜찮고 전차도 운전할 수 있다. 예란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어려움과 불가능과 제약을 벗어난 세계를 예란은 꿈꾼다. 그런 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세계를.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알도>의 존 버닝햄과 <나는 임금님이에요>의 이미현, <어스름 나라에서>의 린드그렌은 아이를 판타지 속에 얼마나 머물게 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아이로 하여금 판타지 세계를 완전히 떠나게 하지는 않는다.    

 

임금님이 어려움을 하나씩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서 현실 속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그러니까 바쁜 엄마를 도와 설거지와 청소도 해놓고 학교 준비물도 챙기고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느라 바빠서 백성들을 잘 만나지 못할 즈음, 백성들이 임금님에게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임금님 덕분에 자신들도 평화롭고 행복해졌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늘 임금님 곁에 있다고, 그러니 언제나 저희를 잊지 말라고 얘기한다.

 

백성들은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호리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호리병은 점점 연해지다가 투명하게 변하더니 마침내 환한 빛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환한 빛은 내 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어요. 발이 따뜻해지고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빛은 남김없이 내 양쪽 발로 빨려 들어가 다리를 타고 배와 가슴으로 가더니 머리까지 가득 차올랐어요.
내 몸이 빛으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어요.
나는 가만히 내 몸을 감싸 안았어요.
빛이 된 백성들이 내 안에 함께 있는 것만 같았지요. 백성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늘 임금님 곁에 있답니다."

 

린드그렌 작가의 백합줄기 아저씨는 어스름 나라 여행을 끝내고 헤어질 때면,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임금님의 작은 사람들과 다르게 언제나 이렇게 인사한다.

 

"내일 어스름 녘에 다시 만나자."

 

예란은 영영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서 그랬을까? 예란은 침대에서 보낸 일 년을 잘 버틴 아이다. 그런데 앞으로 더 힘든 시간이 예란 앞에 놓여있는 것 같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이 단단해질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단순하게 보자면, 아이는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없는 매일의 낮을 견뎌낸 보상을 어스름 녘에 누릴 권리가 있다고도 말하고 싶다. 린드그렌 작가는 아이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작품을 포함해서 몇몇 작품이 거의 파격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판타지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 <그리운 순난앵>이란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현실로 돌아오는 문을 아예 닫아버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충분히 그 안에서 위로받아야 한다는 듯이. 때가 되면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믿는 것 같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너를 언제나 지지하고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일본의 정신분석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판타지를 '영혼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생각할 때 어느 쪽에도 포함될 수 없는 것, 또는 몸과 마음을 통합하여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어려움에 놓인 아이들, 그러니까 알도의 소녀와 임금님과 예란 같은 아이들이 힘을 내고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건 그들의 영혼 덕분일 것이라고 하야오는 말한다. 영혼이 아이들을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타지는 영혼이 아이들과 또 우리 어른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반대로, 영혼이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판타지가 마음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혼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지만, 영혼은 늘 우리 주위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판타지는 그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여 남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 가와이 하야오

 

아이들에게는 환상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환상 속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어른의 세계는 거칠고 무정할 때가 많고, 아이들끼리의 세계는 더 야만적일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이 맞닥뜨리는 현실의 장애와 위험과 갈등을 판타지 세계 속에서 살아내 보는 게 필요하다. 상상의 존재에게 위로받고 의지하고 화를 내고 망쳐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현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터득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는 어려운 시기를 넘어갈 수 있다. 그럭저럭, 잘 하든 못 하든.  

 

그런데 나는 똑같은 말을 문학 일반에도 대입하고 싶다. 특히 좋은 소설 속에서 나는, 하야오 식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은,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풀려난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라고 나는 말하게 된다. 문학은 그것이 판타지든 사실주의든 실존주의든 SF든 다 통틀어서 판타지가 아닐까. 어차피 현실은 아니라는 점에서. 회화가 구상과 추상으로 더는 나뉘지 않고 구상이 곧 추상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말이다. 문학을 읽는 우리는 발을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걸친 채 두 세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것일지 모르겠다. 현실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은연 중에 모두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

 

 

 

인용 자료

그리운 순난앵,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홍재웅 옮김, 열린어린이, 2010.

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김서정, ()학교도서관저널, 2021.

판타지 책을 읽는다, 가와이 하야오, 햇살과나무꾼 옮김, 비룡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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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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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이야기가 극도로 절제된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술된다. 인물들의 삶은 녹록치 않고, 그들이 자기 자리에서 어떻게 삶을 버티어내고 있는지를 작가는 그저 보여줄 뿐인데, 순수히 정제되어 본질만 담아낸 이야기들이 우리가 처한 삶을 이해와 연민으로 감싸는 듯하다. 번역은 어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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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금님이야 난 책읽기가 좋아
이미현 지음, 이지선 그림 / 비룡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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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멋진 판타지다. 아이의 외로운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때만 나올 수 있는 문학이다. 결코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무겁고 어둡지도 않은 서술, 차분하고 단단한 문체, 독자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세상의 밝은 쪽으로 이끄는 이야기에 어른 독자도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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