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를 읽기 위해 십 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작가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책을 버릴 수도 없었는데,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내면의 요구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서가에 꽂힌 책은 내게 최악을 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최악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건 진실을 알고 싶다는 욕구와 닿아있지 않을까 싶다. 진실은 최악과 최선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테니까. 혹은 그 둘을 모두 아우르는 전체 스펙트럼 자체가 진실일지도 모른다.
무엇에 대한 진실이냐고 묻는다면, 세상과 인간의 본질, 인간의 맨 얼굴, 세상이 굴러가는 법칙 같은 애매하고 추상적 대답을 할 것 같다. 딱히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막연한 물음이지만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한 물음이다. 우리는 그런 물음을 묻는다. 삶이 이상하게 굴러갈 때, 하늘에 대고 묻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하늘에 대고 내뱉는 절규 같은 것. 코맥 맥카시는 가장 극단적 상황을 설정해 놓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인간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어때야만 하는 존재인가. 작가는 상상 실험을 하는 것 같다. 자신을 재앙 후의 세상에 던져 넣고(코맥 맥카시는 열 살 언저리 어린 아들과 여행을 갔을 때 자고 있는 아들을 보며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때 작가의 나이는 칠십을 넘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 채로 자기 안에서 대답을 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강이 있는 골짜기 건너편에서 길은 완전히 검게 타버린 곳을 통과했다. 가지를 잃은 채 숯이 돼버린 나무줄기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길 위에서 재가 움직였다. 검게 변한 전신주에서 뻗어 나온 늘어진 손 같은 눈먼 전선들이 바람에 가늘게 훌쩍였다. 빈터에는 불에 탄 집 한 채. 그 너머는 잿빛의 삭막한 초원. Pp.12-13
재앙이 벌어진 후, 세상 모든 것이 불에 타고 재로 덮였다.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공기 속에서 아빠와 아들은 살아남은 한 줌의 인간들을 경계하며 도시를 통과하고 숲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고 들판을 건넌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을 길에서 찾아 카트에 담고 남자는 아들을 데리고 간다. 남쪽으로. 남쪽에 무엇이 있길래. 소설에서는 끝내 답을 주지 않고, 우리는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아마도 희망적인 것이리라. 아빠는 낡아 해진 지도를 보며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한다. 도처가 죽음이어서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 되는 폐허 속에서 남자는 필사적으로 아들을 지키고자 한다.
재앙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지쳐서이기도 하고 두려워서이기도 하고 미쳐서이기도 하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잡아먹거나 먹힌다. 야만의 세계도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은 극악의 상태. 작가의 상상력은 극단적인데, 그것을 더 밀어붙여서 끝내는 아기를 구워 먹는 상황까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 눈앞에 들이밀며 이것이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그 대목을 읽으며 끔찍했지만 인간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납득이 되려고 하는 나의 상상력이 실은 더 공포스럽다.
작가는 아빠와 아들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름은 이미 의미가 없으므로. 그들은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다. 그리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지극한 정성으로 보호한다. 보호받는 아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두 사람이 향하는 '남쪽'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지향점은 또 무엇일까? 짐작하기로는 아빠와 아들의 대화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말속에 답이 있는 것 같다.
아빠, 우리는 좋은 사람이에요?
응, 우리는 좋은 사람이야.
아빠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의 집을 뒤지고 죽은 사람의 옷과 음식을 훔치고 불쌍한 노인과 아이를 외면한다. 그때마다 아들은 아빠에게 거듭 묻는다. 아빠, 우리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들은 굶주린 노인을 돕고 싶어 하고 길 잃은 아이가 영영 길을 잃고 헤맬까 걱정하고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반응한다. 아빠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아들인데 그의 눈에 아들은 천사다. 그는 신을 부정하지만 여전히 신앙을 품은 사람 같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깊이 사랑하고 깊이 믿기 때문이다. 아들의 선량함을, 혹은 선량한 아들을. 혹은 인간의 선함을. 인육을 먹지 않는 사람, 굶주린 노인을 도와주는 사람, 길 잃은 어린아이와 동행하고 싶은 사람, 선량한 사람이고 싶어 하는 아들을 목숨을 다해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그는 궁극적으로 인간다움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도착한 남쪽에서 두 사람은 그것을 찾았을까?
저 멀리 잿빛 해변이 보였다. 둔한 납빛 물결이 느릿느릿 밀려왔다. 멀리서 소리도 들렸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세계의 해변에서 부서지는 어떤 이질적인 바다처럼 황량했다. 저 바깥 갯벌에는 반쯤 기울어진 유조선이 있었다. 그 너머 바다는 광대하고 차가웠다. 광석 찌꺼기가 든 큰 통이 천천히 들썩이듯이 무겁게 움직이는 바다. 그리고 재가 그리는 잿빛의 스콜 선. 남자는 소년을 보았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파란색이 아니어서 미안하구나. 남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소년이 말했다. Pp.244-245
아빠는 생각한다.
어쩌면 수의처럼 덮인 저 거대한 파도 너머에서 정말로 다른 남자가 다른 아이를 데리고 죽음의 잿빛 모래 위를 걷고 있을지도 몰라. 불과 바다 하나 건너 세상의 씁쓸한 재에 둘러싸인 또 다른 해변에서 잠을 자거나 혹은 이곳과 다름없이 무심한 태양에 정신을 판 채 누더기를 걸치고 서 있을지도. Pp.248-249
남쪽도 폐허일 수 있음을 남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남자는 걸어서 이곳에 이른다. 걷는 행위는 우리를 아무 데도 아닌 곳, 다시 말해 무의미로 데리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걷는 것. 작가가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걸음, 걷는 행위, 걸어감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어떤 신성함이 아닐까? 무엇에 이르기 위해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걸음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어딘가에 당도한 것일지 모른다.
소설에서 아들이 아빠에게 거듭 확인하는 또 하나는 그들이 불을 운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불을 피울 뿐이지 운반하고 있지는 않은데 아들은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거죠?"라고 끊임없이 묻고 아빠는 그렇다고 매번 대답한다.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하고, 인간의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불을 운반한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다움을 지키겠다는 필사적이고 결연한 결심으로 읽힌다. 아빠는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말한다. 계속 가라고.
넌 계속 가야 돼. 나는 같이 못 가. 하지만 넌 계속 가야 돼. 길을 따라가다 보면 뭐가 나올지 몰라. 그렇지만 우리는 늘 운이 좋았어. 너도 운이 좋을 거야. 가보면 알아. 그냥 가. 괜찮을 거야.
(...)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
제발.
안 돼. 너는 불을 운반해야 돼.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요.
모르긴 왜 몰라.
그게 진짠가요. 불이?
그럼 진짜지.
어디 있죠?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왜 몰라. 네 안에 있어. 늘 거기 있었어. 내 눈에는 보이는데. Pp.313-314
손에서 손으로 횃불을 넘겨주듯이 그렇게 아빠는 아들을 인도한다. 길로 나선 아들이 낯선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됐다. 아들은 낯선이에게 묻는다.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낯선 남자는 대답한다. 알 수 없지. 그냥 운에 맡겨야지 뭐.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코맥 맥카시는 아마도 발견했지 싶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아들을 지키는 아빠의 사랑을 통해서. 아빠가 필사적으로 향하는 남쪽에서. 사랑은 남쪽을 향하는가보다. 남쪽은 인간에 내재한 선함의 자리일 것이다. 그곳에 아들을 데려다 놓는 것. 아들은 이미 선함 그 자체이지만 불은 꺼지기 쉬운 것이기도 하니까. 그것을 위해 남자는 걷는다. 세상이 아무리 황폐할지라도 인간은 걸어간다. 지도를 들고서. 인간은 보잘 것 없고 연약하지만 걷는 행위를 통해 위대해진다고 말하고 싶다.
난파된 배에서 아빠가 육분의를 발견하는 장면은 그래서 무척 상징적이다. 항해사는 육분의로 태양의 고도를 재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한다. 망망한 바다에서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그 귀중한 것을 우리도 이 삶에서 찾아내고 알아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끝까지 인간답기 위해서 말이다.
남자는 그것을 들어보는 순간 무게를 느끼고 무엇인지 알았다. 부식돼 가는 빗장을 열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황동 육분의가 있었다. 백 년은 된 물건 같았다. 남자는 상자에서 육분의를 꺼내 손에 들어보았다. 아름다웠다. 황동은 칙칙했고 전에 그것을 쥐었던 다른 사람의 손자국이 녹색으로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는 완벽했다. 남자는 밑판에서 녹청을 닦아냈다. 런던, 헤자닌스. 눈높이로 들어 올리고 바퀴를 돌려보았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물건을 본 것이다. 남자는 육분의를 잠시 손에 들고 있다가 파란 베이즈천이 깔린 상자에 도로 집어넣고는 뚜껑을 닫고 빗장을 채운 다음 로커에 넣고 문을 닫았다. pp.25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