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작가는 나무 시장에서 앙상하고 구부정한 나무 한 그루를 데려왔다. 과실수도 아니고 꽃이 예쁜 벚나무도 아니어서 아무에게도 눈길을 받지 못하는 특징 없는 나무였다. 작가는 이 나무에 신선한 흙을 덮고 흠뻑 물을 주었다.
나무는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깊은 겨울밤을 보내고, 연둣빛 이파리가 반짝이고 새들이 떠들썩하게 날아다니는 깊은 봄을 보냈다. 태풍이 온 산을 할퀴고 지나간 여름과 작은 별무리가 강물처럼 흐르고 풀벌레가 우는 가을밤도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겨울. 그렇게 수많은 날과 달이 흐른 뒤, 나무는 문득 마당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어 있었다.
바람은 나무에게 "너는 천년을 사는 나무란다." 하고 속삭였지만 나무에게 천 년이라는 시간은 무의미한 관념에 불과했다. 나무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라는 구체적 시간을 살았다. 어느 날 달빛이 나무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니?" 나무가 대답했다. "별과 구름, 해와 달, 그리고 바람과 함께 춤추는 나는 나무입니다."
나무는 그저 나무라고 했다. "나는 나무입니다." 분류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인간이 붙여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림책 마지막 장에서 봄 민들레가 나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느티야?"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와 신학자가 나름의 답을 했고, 더 많은 문학인들도 '나'를 주어로 하는 이야기를 썼다. 사람들은 이 짧은 생을 지탱하기가 힘겨워서 '나'를 붙들고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고, 모두들 "나는..." 하고 얘기를 시작하지만 '나'는 영원한 수수께끼며 영영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한 존재다. 그러니 '나'를 괄호 속에 넣고 말을 시작하는 게 그나마 합리적이지 않을까. 영어는 주어가 없는 문장을 비문으로 치는데 한국어에서는 주어 없는 문장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한국어의 세계관으로 생각한다면, '나'란 내가 그렇게 매달려야 할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때 비로소 찾게 되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헤세도 나무를 사랑했다. 그는 나무에게서 배운다고 했다. 심지어 경외심을 느낀다고도 했다. 헤세는 나무의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나무를 최고의 설교자라고 불렀으니까. 조용히 나무 곁에 서서 헤세는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아주 조용히.
"그들은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을 실현하는 일, 즉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힘쓴다. 강하고 아름다운 나무보다 더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헤세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이었으리라. 종교인이든 아니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사람들이 모두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것.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 번뇌가 다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점까지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으로 통하는 어느 길목에서 이것을 실현할 수 있기를 나는 꿈꾼다.
일 년 된 작은 살구나무 묘목을 심었다. 어린 나무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 테다. 다만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고 햇살을 받고 어두운 밤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보내고 그렇게 수많은 계절들을 보내며 꽃과 잎을 내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인간은 나무에 이름표를 붙여주기를 좋아하지만 나무는 그저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만 집중한다. 본연의 일에 충실해서 살구나무는 살구나무로 자라고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로 자란다. 헤세의 말처럼,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살구나무의 소리 없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나무 곁으로 다가간다. 마음의 다른 모든 소리를 끄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