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봄날
김정희 지음 / 봄날의산책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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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단정하고 그림은 대범하다. 언뜻 한 사람에게서 공존하기 힘들 것 같은 두 가지 면을 보는 재미가 있다. 영농일지를 쓰는 아버지,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찾아간 팽나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외갓집 가는 길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그것들이 마치 나의 추억인 듯 눈앞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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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음악 - 음악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제러미 아이클러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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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예술이 세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연대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은 세상에 대해 증언할 의무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아도르노의 이 말을 음악에 특정해서 살펴본다. 음악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본질적인 정신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과거와 연결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우리가 역사에 무엇인가를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작곡가가 곡을 만들고 세상에 내보내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연주자와 청자는 매번 다른 의미를 거기에 더하고 위대한 음악 작품은 그 자체가 대중의 기억을 담은 방대한 보관소가 된다.’ 하지만 음악 속의 기억들을 제대로 들어내는 일은 다른 문제다. 저자는 여기에는 깊은 청취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깊은 청취가 없다면 과거의 목소리를 허공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게 한 사건으로 온 인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음악은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통과하여 깊은 상처를 입은 채로 여기 우리에게 와서 암흑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저자는 네 명의 작곡가와 그들의 작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예술가가 놓였던 역사적 시대적 상황이 어떻게 작품에 투영되었는지를 살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역사서와 평전의 중간쯤에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

슈트라우스는 모순적이며 많은 것을 감춘 인물이었는데, 그의 <메타모르포젠>도 그렇다. 그는 독일의 제3 제국 시절에 상황을 심각하게 오판했고 문화정책 분야에서 나치에 협력함으로써 명성에 영원한 오점을 남겼다. <메타모르포젠>은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진 뒤에 작곡되었다. 슈트라우스가 깊이 공감하여 음악으로 만든 괴테의 시는 자기 인식의 한계를 토로하는 내용이다. 괴테의 시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네의 전문은 이렇다.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네,

내면의 존재와 멀어지니.

그럼에도 그는 매일 알게 되네,

마침내 바깥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을.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였는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했는지.

 

슈트라우스는 <메타모르포젠>이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밝히지 않고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저자는 이 침묵을 청자들이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 넣어주기를 바란다. ‘요동치는 소리에 새로운 기억을 불어넣고, 음악이 가리키는 범위를 넓히고, 도덕적 관심사의 폭을 넓히고, 슬픔의 각도를 작곡가 주위에서 벌어졌지만 그는 생전에 겪지 못했을 고통으로 향하게 두고 싶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듣고 카를 린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애타게 갈구했던 음악이라고 느꼈다. 이 느낌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 이렇다는 것이었다. 쇤베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대를 최전선에서 맞닥뜨리고 통과한 사람이었다.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전통에서 멀었던 쇤베르크는 개인적 경험의 결과로서 12음 기법의 불협화음으로 유대인의 고통을 진실되게 표현해냈다.

7분 길이의 이 곡은 쇤베르크가 직접 쓴 텍스트로 작곡되었다. 1부에서는 생존자 역할을 하는 해설자가 유대인 수감자의 참혹한 장면을 설명하고, 2부에서는 남성 합창단이 수감자의 역할을 맡아서 유대교의 주요 기도문인 세마 이스라엘을 힘차게 노래한다. 다음은 1부의 내용 일부이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시간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다만 장엄한 순간만큼은 기억한다.

오랫동안 소홀히 했던 옛 기도문을

다들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르기 시작한 순간을. 잊었던 신앙 고백을!

하지만 내가 바르샤바의 하수관에서 오랜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날도 평소처럼 시작했다. 아직 날이 어두울 때 기상나팔이 울렸다.

밖으로 나와! 당신이 자고 있었든 걱정으로 밤을 꼬박 새웠든 상관없다.

당신은 자식, 아내, 부모에게서 떨어져 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잘 수 있겠는가?

트럼펫이 다시 울렷다.

밖으로 나와! 하사관이 화낼라!

그들은 나왔다. 늙은 자들과 병든 자들은 느릿느릿 나왔고, 불안해서 잽싸게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하사관을 두려워했다. 최선을 다해 서둘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소음이 난무하고, 분주한 움직임이 난무했다. 그럼에도 충분히 빠르지 않았다!

하사관이 소리쳤다. [독일어로]“차려! 서둘러! 내 개머리판의 맛을 보고 싶나”? 좋아, 원한다면 해주지.“

 

합창단이 히브리어로 부르는 세마 이스라엘은 신명기 64~7절의 내용이다:

 

들어라, 오 이스라엘아, 우리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오늘 내가 너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의 마음에 새겨라.

그리고 너의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말하라.

집에 앉아 있을 때도

길을 갈 때도

자리에 눕거나 일어날 때도.

 

무분별한 폭력과 희생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 우려와 회의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그의 음악에서 무엇을 어떻게 듣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바르샤바의 생존자>와 같은 음악적 기념물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평소와 다른 청취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일부 음악에 대해서 우리는 즐기려고 듣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목격하려고 듣는다. 생존자의 증언, 작곡가의 증언, 죽임을 당할 집단의 증언을 듣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그 안에서 들어내야 한다.

 

벤저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전쟁 레퀴엠>은 청자가 안이하게 명복을 빌고 위안에 빠지게 허락하지 않는다.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가 그렇듯이 이 곡도 죽은 자를 아프게 기억하게 만든다. 평화로운 고별인사는 어쩌면 그들을 잊기 위한 핑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름다운 음악과 몹시 불안한 음악이 교차하는 식으로 긴장을 끌고 간다. 국가들이 무분별한 전쟁을 멈추지 않는 한, 죽은 자들이 안식하는 평화는 얄팍하고 임시적이고 계속해서 불협화음을 낼 것이라고 브리튼의 음악은 말한다.

한편, 브리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쟁 레퀴엠>을 보편적 진술로 만들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특정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와 같은 회피는 그 자체로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 영국 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제1차 세계대전보다 의미 있게 다루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고 홀로코스트에 대해 무관심하고 반감까지 갖고 있었다. 브리튼의 음악은 자신이 속했던 사회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정직하게 반영했던 것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은 소비에트의 삶을 가장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으로서, 유대인 학살을 증언하는 예브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에서 영감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시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바비 야르>를 읽고 나서 뭔가가 되살아났다는 기분이 들었소... 다시 빚을, 양심의 빚을 지게 되었소. 내가 꼭 갚아야 하는 빚이오...<교향곡 13>을 마무리하면 내가 음악가에서 양심의 문제를 표현하도록 도와준 그대에게 크게 고개를 숙이겠소.”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고발이자, 그 사건에 대한 기억까지 억압하고자 했던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저자에 따르면, 음악은 기억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의 음악을 현재로 가져와 연주하고 들으면서 우리는 잃어버린 과거의 시간을 만난다. 음악은 다른 시대가 기록하고 듣고 꿈꾸고 희망하고 애도했던 것을 지금 여기로 불러낸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고 올바른 세계에 대한 전망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재난의 역사에서 특정한 순간들을 떠올리는데, 이런 기억은 우리가 미래로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 가치들을 선택할 때 영향을 미친다. 베토벤의 음악이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에 똑같이 들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깊이 들을 것을 요구한다. 깊이 듣는다는 것은 음악 속에 담긴 과거의 반향을 의식하면서 듣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파울 첼란의 말이 인상 깊다. 파울 첼란은 시가 여전히 시간을 거쳐, 역사를 거쳐-이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여-우리에게 온다고 했다. 시간을 통과하여 오는 이 여행에서 예술 작품이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을 수는 없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은 음악이 상처를 입으면서 끝내 기억하는 것을 우리는 들어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일 테다:

 

교향곡 9번을 들으면서 그 사이 여러 세기가 입힌 상처를 듣지 않는다면, 여기에 담긴 신실한 이상주의를 그저 기분 좋은 자유의 외침으로 바꾸는 셈이다. 요점은 이런 이상주의를 부정하거나 철회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오기까지 (첼란의 표현으로) ‘천 개의 암흑을 지나왔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런 기억은 미래로, 현재의 행동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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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자락을 담근 조용한 호수, 사위가 어슴푸레한 이른 새벽이다. 두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다. 푸른 산 그림자가 드리운 물은 하늘빛을 받아 살짝 보랏빛을 띠었다. 물 표면은 거울처럼 매끈하고 대기는 싸늘하다.  












유리 슐레비츠는 이 그림책에 글을 최소한만 남겨놓았다. 그림책의 첫 장을 열면 하늘도 짙고 푸르고 물도 그렇다. 장을 넘기면 새벽빛은 조금씩 밝아지고, 산 등성이와 호수가 점점 뚜렷해진다. 호수에는 산 그림자가 비치고, 호숫가 나무 아래 할아버지와 손자가 잠들어 있다. 하늘에는 달빛이 환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데, 문득 실바람이 불어 호숫물을 살짝 흔들며 하루를 깨운다. 느릿하고 나른하게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박쥐 한 마리가 외로이 허공을 맴돌며 개구리가 한 마리 또 한 마리 물에 뛰어든다. 새가 지저귀고 어디선가 다른 새가 화답하듯 지저귄다. 이제 사람도 잠이 깰 시간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깨우고 모닥불을 피워서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두 사람은 담요를 개고 잠자리를 정리한 뒤에 호수에 배를 띄운다. 배는 작고 낡았다. 삐걱 삐걱 노를 젓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배는 호수의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고 한순간 산과 호수는 초록이 된다. 


새벽에 대한 기억이 있다. 검푸른 새벽의 색깔, 코와 피부로 느껴지는 싸늘한 새벽의 기운, 잠이 덜 깬 몸의 찌뿌둥함, 갈라지는 목소리와 뻑뻑한 눈꺼풀, 무거운 발에 신발을 꿰어 신고 문을 나설 때 만나는 익숙한 길의 낯선 느낌, 온 세상이 모두 깊은 잠에 빠진 것만 같았는데 도로에는 차가 다니고 버스에도 부스스한 얼굴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 같은 것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깨끗하고 경건한 새벽의 느낌을 기억한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묵직한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득 걱정과 투쟁과 계산의 아우성이 그치며 마치 영원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어둑하고 고요한 공간이 열리듯, 새벽도 그렇다. 나는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 안긴다. 아우성은 아직 잠들어있다. 새벽은 한없이 고요하고 깨끗해서 신성이 머무는 시간이다.


새벽은 사람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언어를 초월한 모습으로 그이는 찾아온다. 사랑의 열병으로 들뜬 젊은 연인에게 새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 이로 찾아온다. 연인의 뜨거운 이마를 찬 손으로 짚어주려고 새벽은 푸르게 찾아온다.


밤은 창 너머에서 소멸하고

대지는 또다시 숨을 멈추었다

이 창 너머 낯선 누군가가

그대와 나를 향하고 있다

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 이여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에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포루그 파로흐자드) 일부


  

푸른 새벽은 아프게 온다. 한 계절을 더 피 흘려도 좋겠다고 결심하는 이 새벽은 결연하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새벽에 들은 노래 3(한강) 일부



새벽은 끝내 찾아오는 시간이다. 죽어 가는 이도 살아가는 이도 낮과 밤의 긴 시간을 밀고 나가서 맞이하는 해방의 시간이다.


다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새벽이 올 때까지(윤동주) 전문

      


새벽은 모두에게 다르게 온다. 그러나 반드시 온다. 푸르고 차고 고요하게. 빛으로 온다. 공기로 온다. 어머니가 아픈 아이의 뜨거운 이마를 차가운 손으로 덮어주듯, 번뇌로 끓는 우리의 이마를 찬 손으로 식혀주러 새벽은 온다. 아직 자는 이는 편안한 잠의 세계 속에 조금 더 머물라고 가만히 이불을 당겨준다. 잠 깬 이는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귀를 덮어주며 푸르고 고요한 품으로 감싸안는다. 새벽은 그렇게 온다. 언제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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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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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는 이 소설에서 냉소적이고 고약한 영국식 유머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기억은 곧 정체성이며, 독창성을 잃을 때 작가는 글쓰기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 책의 기조는 줄곧 가벼운 농담조지만 그가 진지하고 고통스럽게 이 주제를 놓고 씨름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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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츠기 - 2024년 볼로냐 라가치상 대상작, 2024년 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 2024년 이탈리아 프레미오 안데르센상, 2024년 디픽터스가 뽑은 전 세계 눈에 띄는 그림책100권, 2024년 서울특별시교육청어린이도서관 겨울방학 권장도서 모두를 위한 그림책 79
이사 와타나베 지음, 황연재 옮김 / 책빛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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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작가 이사 와타나베가 상실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그림책을 지었다. 킨츠기는 깨진 도자기를 옻으로 이어 붙이고 금분으로 장식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공예 기법이다. 제목에서 우리는 작가가 말하려 하는 바를 이미 짐작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남은 사람이 깨어진 삶을 이어 붙이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 있어요. 그러나 이 작품이 진정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은 이 아름다운 방식이 새로워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작별했을 때 삶은 부서진다. 더욱이 그 삶이 더없이 빛나고 완벽에 가까웠다면 더더욱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느껴질 테다. 우리의 삶도 킨츠기처럼 아름답게 이어붙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순 없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삶은 예고도 없이 또 다른 잔을 깨뜨리기도 한다. 작가는 깨어진 잔을 이어 붙이는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그 대신 남은 이의 황망함을 이해하며 그의 걸음을 좇는다. 그가 어디까지 내려가는지를 보여준다.      


토끼에게는 사랑하는 빨강 새가 있었다. 어느 날 불현듯 빨강 새는 빛을 잃고 식탁보를 잡아끌며 날아가버린다. 행복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식탁은 온통 깨어지고 흩어졌다



토끼는 절망하며 새를 찾아서 심연으로 내려간다. 그곳은 죽음의 세계여서 모든 존재가 희다. 빨강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도 없다. 희게 변한 새조차도.     



사실, 토끼는 그곳에 남아있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새를 찾을 수 없다면 심연에 머무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토끼는 생각했던 것일까. 표지의 그림 속에서 토끼는 힘차게 두 팔을 뻗고 위로 올라간다. 그를 이끄는 것 혹은 그가 잡으려는 것은 빨강 새의 파란 잔이다. 깨지지 않고 온전한 파란 잔. 그림책 첫 장에서 토끼가 한 손에는 자기의 하얀 잔을 들고 한 손에는 빨강 새의 파란 잔을 들고 식탁으로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의 온전했던 파란 잔을 토끼는 깊은 심연에서 다시 본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위로 헤엄쳐 올라간다.  


빨강 새가 떠나버린 현실로 돌아와 보니 파란 잔은 여전히 깨져있다. 그것을 아무리 완벽하게 복원한다고 해도 빨강 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작가가 킨츠기라는 일본의 공예 기법을 떠올린 건 현실의 상실을 가장 아름답게 복원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서진 잔을 아름답게 이어 붙여서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작가는 온전한 파란 잔으로 손을 뻗으며 토끼가 위쪽으로 헤엄쳐 올라가게 그렸을 것이다. 


토끼를 이끈 온전한 파란 잔은 결심이 아니었을까. 빨강 새를 잊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결심. 혹은 사랑 그 자체였을지도. 하지만 나는 다른 가능성도 떠올린다. 부력이다. 살아있는 존재 안에 내재된 공기 방울들. 심연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우리를 위로 밀어 올리는 가볍고 강력한 힘 말이다.  


수영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테다. 손을 아래로 향하면 몸이 아래로 내려가고 손을 위로 향하면 뜬다는 걸. 아무리 물속에 가라앉아 있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 몸은 떠오른다. 불행 속에서 때로는 부력의 힘으로, 때로는 결심의 힘으로 끝내 우리는 심연에서 살아 나온다. 우리를 이끄는 온전한 파란 잔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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