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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해 참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하게 되었다. 우리와 악연으로 맺어진 미운 이웃이라는 것 외에는 학교 국사시간에 배운 대강의 지식 밖에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안다'고만 생각했다.


TV에서 드문드문 보고 들은 일본인들의 모습은 정치적인 것을 뺀다면 -이것을 뺀다는 것은 애초애 무리이고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 모르겟으나-무척 흥미롭다.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미의식을 분석한 책을 읽고,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죽음이 항상 강하게 자리한다는 사실이 아주 새롭게 다가웠더랬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토토로>의 민담적 이야기도 우리 것과 무척 달랐다. 일본의 정원도 우리의 정원과 다르고, 그들의 문자 체계 역시 한글과 다르다.


그림은 또 어떨까. 우키요에는 우리의 민화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다.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는 보통 우리 것과 대응시켜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이해하기가 한층 쉽기도 하려니와 인류 문명은 보편성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세밀하게 들어가면 절대 대응되지 않는 그들만의 특수성이 있어서, 우키요에 역시 우리 문화 속에서는 대응시켜볼 수 있는 그림이 없는 것 같다. 


저자 오쿠보 준이치는 우키요에를 시대별로, 작가별로, 다양한 작품들을 정리해서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별로 반영했던 주제와 제작, 판매까지 섭렵한다. 아무튼 무척 잘 읽었고, 이제 좀 우키요에를 알 것 같은 느낌이고, 우키요에를 통해서 일본인들도 살짝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몇 가지를 얘기하자면:


우선 작품들이 정말 아름답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보통의 일본인들이 우키요에를 집에 붙여놓고 즐겼다는 사실이 무척 재밌다. 생활 속에 그림으로 이야기를 들여놓은 셈이다. 우키요에는 인물과 풍경과 이야기를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두번째로는, 그림 속에 주제를 숨겨놓았다(!)는 사실. 정치적으로 금지하는 주제들이 있을 때 우케요에 화가들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그리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독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들이 사회적 억압을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또 흥미로웠던 점은, 우키요에가 해학성으로도 정의될 수 있다는 대목이었다. 해학은 왠지 한국인들의 전용어인 것만 같고 해학을 즐길 줄 아는 한국인들의 지성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던 것도 사실인데, 일본인들에게도 해학이? 우키요에 안에는 여러 흐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희화'라고 불리는 것들로서, 골계미 즉 해학이 중심이 되는 그림들이다. 책 102쪽과 105쪽의 그림이 참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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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4탄: 창가의 토토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토토는 바로 전에 읽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영혼의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아이다. 기질적으로 너무나도 흡사한 두 아이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환경에 놓여있다. 노래하는 작은 새와 같았던 제제가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별처럼 빛났다면, 봄날의 나비 같은 토토는 너그럽고 호의적인 어른들 속에서 싱싱하게 자란다.

 

사람들은 인간이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는 얘기일 텐데, 기질은 옳고 그름에서 벗어난 생물학적인 자질임에도 사람들은 엉뚱하게 이것을 도덕적으로 정의하는 것 같다. 넌 나쁜 아이야, 넌 착한 아이야,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한번 나쁜 아이가 되면 계속 나쁜 아이로만 살 수 밖에 없다. 문화권, 시대, 부모에 따라서 아이는 나쁘거나 착하다고 판단되고, 이 판단은 '기질은 안 변해'라는 말로 영구히 굳어져 버린다.  

이렇게 해서 제제는 작은 악마가 되었고 토토는 '사실은 착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맞는 말처럼도 들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제가 다른 제제가 될 수 없고 토토 역시 다른 토토가 될 수 없으니까. 노래하는 작은 새가 불행히도 폭풍우를 만난다고 해도 뱀이 될 리 없다.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가슴이 아픈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순수하면서 너무나 연약하기에.     

   

하여간 <창가의 토토>를 읽으며 여러가지로 마음이 무거웠다. 20세기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생각났고, 그 속에서 아이를 키운 지난날들이 떠올랐고, 한없이 눈이 어두웠던 부모로서의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모와 내 아이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불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거기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지도 못했고, 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똑같은 그 열차가 선로를 달리고 있다.

 

그래서 부모가 될 사람이라면,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p.s. 번역에 마음이 갔다. 2000년을 코 앞에 둔 '1999년 저물어가는 한 해'에 옮긴이의 말을 썼다고 나와 있으니 번역한 지가 20년 전인데 그래서인지 옛스런 느낌이 살짝 났지만 그것조차도 정감이 느껴지는 참 자연스럽게 잘 옮겨진 번역문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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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3탄: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안 읽었는 줄 알았는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읽어서 좋았다. 

 

여섯 살이 채 안 된 아이, 제제의 세상은 너무나 선명하다.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투명하게 들여다본다. 현실과 마음의 바닥은 깨끗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혹은 정확히 볼 줄 몰라서, 대충 미화하거나 외면하지만 제제는 그럴 줄을 모른다.

 

제제가 묘사하는 어른들은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라 환경에 짓눌려 비틀어지고 신음하는 인간이다. 초등교사로 일하는 누구는 아이들을 교육하다보니 인간의 선함에 대해 회의적이 된다고 했다. 제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말에 수긍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아이든 어른이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기본적으로 악하게 세팅되어 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삶의 최극단에 몰리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발버둥칠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제제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외부적 환경에 너무나도 취약한 존재여서 일부러 제제를 괴롭힌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제제만 아니라 그 주변의 어른들 모두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 모두가 안쓰럽다. 

 

지금 내 옆에 혹시 또 다른 제제가 있을까? 나는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럴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저 아이는 문제아야, 쟤는 질이 나빠, 못됐어, 라는 말을 듣는 아이, 나를 실망시키고 나에게 대들고 형편없고 바보 같아 보이는 아이, 되바라지거나 토라진 아이, 다루기 힘든 이 모든 아이들이 그냥 제제니까. 특별한 눈이 있어서 제제를 알아보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아이가 제제니까. 

 

나를 비롯한 우리 모든 어른들도 한때는 제제였다. 지금도 그 아이는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 그럴 마음만 있다면 내 안의 그 아이부터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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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2탄: 켄즈케 왕국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무조건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마이클 모퍼고. 이 작가를 어째서 몰랐을까, 책을 읽으며 자책했다. (책꽂이에서 이 책을 볼 때마다 참 재미없겠다고 생각했던 건, 표지 탓이 99퍼센트다. 너무 유명해서 식상할대로 식상한 저 파도 그림이 책의 내용까지 선입견을 갖게 만든 것 같다.) 열두 살 소년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모험이야기를 나는 <파이이야기>와 <모비딕>의 어린이 버전으로 부르고 싶다. 

 

소년은 폭풍우 치는 밤에 바다에 빠지고, 죽음의 경계까지 다가간 소년에게 새로운 삶의 차원이 열린다. 이야기는 분명 허구지만 매우 사실적이고, 사실적 세계와 환상의 세계의 경계선에 미묘하게 걸쳐진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작가는 소년과 노인의 우정, 사십 년의 시간적 도약, 두 가지 삶 앞에서의 고통스러운 선택을 이야기한다.

 

이 모험이야기의 저변에서는 사랑의 감정이 흐른다. 그 사랑은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 너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데서 시작되어 작은 물줄기를 만들며 천천히 흘러 도달하게 되는 깊은 공감이 아닐까 한다.

 

나한테 네 이야기를 해줘. 네 이야기... 내가 들을게... 어쩌면 내 이야기도 해줄지 몰라...

 

우리는 대부분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백분의 일쯤을 겨우 알았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가능한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그렇게 느꼈다.

 

소설에서 노인은 남고 소년은 떠났지만, 나는 이 책을 내 서가에서 떠나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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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1탄: 독수리의 눈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무조건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호주 문학은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것 같다. 주로 영미, 스페인, 프랑스, 독일, 그리고 일본과 중국 문학만 알고 있다. 호주로 어학 연수도 가고 여행도 가고 이민도 꽤 가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호주는 낯선 나라가 아닌데도 그쪽의 문화며 문학이며 역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독수리의 눈>은 호주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시기는 아마도 백인이 호주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무렵인 것 같다. 작은 원주민 공동체가 백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겨우 살아남은 아이 두 명, 구답과 유달이 주인공이다. 아이들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전한다. 그러다가 다른 부족과 다행히 합류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백인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총을 가진 백인들의 힘은 원시적인 창으로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 그 부족도 결국 백인들에게 몰살당하고 구답과 유달은 또다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백인을 피해 더 메마른 지역으로 숨어든다. 아이들은 거의 죽음에까지 이르렀지만 기적적으로 샘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두 아이와 그 원주민 가족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작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안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50개 부족 100만 명 정도였던 호주의 원주민이 현재는 호주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한 29만 명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호주의 역사를 찾아보니 아메리카 대륙의 백인 점령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주의 원주민들도 아메리카인디언들이 겪은 불행한 역사를 고스란히 겪었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992년 마보 판결을 통해서 유럽인들의 토지 점유가 원주민들의 후순위로 결정됐고, 호주의 원주민들이 땅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증거가 있지 않는 한 토지 소유권은 원주민들에게 있다고 공표됐다는 점이다. 이 판결이 얼마나 포괄적으로 현 호주 사회에서 적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부당한 역사를 뒤늦게나마 바로잡았다는 점에서는 참 다행이다 싶다. 

 

이 소설은 고발 문학으로서는 분명 가치가 있지만 여러가지로 아쉬운 점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은 호주 원주민들의 진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들은 종교적 전통을 지켰고 훌륭한 예술품들을 남겼으며 발전된 교육 제도가 있었고 세대에서 세대로 지혜를 전수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소설 속 원주민들은 상당히 '원시적'이다. 이들의 무기는 석기시대마냥 돌칼과 창이고, 야생동물들을 사냥해서 생존을 해결하는 일이 전부인 듯 보이며, 백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양을 우리와 나눠야 한다'는 일차원적인 주문이다. 그저 무방비의 선량한 원주민이 포악하고 선진적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백인들에게 희생당했다는 사실만 부각되고 원주민들의 삶과 사회와 정신 세계는 서술되지 않는다. 자연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 정도가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언급되지만, 내 것과 네 것을 놓고 싸우는 유아들에게 '장난감은 같이 갖고 노는 거야'라고 타이르는 식의 단순한 말이 현대를 사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어느 정도 공감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인간의 소유 의식은 본능이라고 할만큼 근원적이고 그 역사도 길어서 백인과 원주민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어느 쪽의 옳고 그름으로 단정짓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의 증언을 넘어 더 깊은 사유를 작품 속에서 읽을 수 없어서 독자로서 아쉬웠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역사를 얘기하다보니 이야기가 단순해져버렸다고 하는 것은 아이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일 테고.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필연적으로 염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뉴스가 사건 사고만 보도하듯 역사책에 기록된 일들도 부당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은 종말로 미친 듯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의의 힘이 어두운 역사의 흐름을 같은 힘으로 밀어내고 있기에 아직도 세상은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닐까. 다만, 이미 저질러진 학살 앞에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처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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