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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두리 없는 거울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박현미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귀신은 홀로 있을 때만 나타난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고독이 잡념을 부르고, 잡념이 망상을 낳고, 망상이 귀신으로 변태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독한 것은 그렇게 형태를 갖춘 귀신은 바이러스 같은 것이어서, 어리고 여린 사람일수록 쉽게 감염되고, 때문에 지독하게 앓게 되고 만다. 『테두리가 없는 거울』은 그런 이야기다. 어느 순간 누군가의 고독으로 인해 탄생한 귀신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외로운 아이의 외로운 망령 - 계단의 하나꼬
어느 학교에나 존재한다는 학교 괴담, 그중에서도 흔하디흔한 하나꼬 이야기다. 이 학교의 하나꼬는 화장실이 아닌 계단에 산다. 하나꼬와 만나고 싶으면 하나꼬가 사는 계단을 진심을 다해 청소해야 한다. 하나꼬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고, 하나꼬의 질문에 거짓을 말해도 저주 받는다. 하나꼬가 주는 상자도 받아서도 안 된다. 하나꼬에게 부탁할 때는 하나꼬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하며, 이 금기들을 어길 시에는 벌을 받는다. 그것은 계단에 갇히는 무한 계단의 형벌이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지독한 따돌림으로 괴로워하던 외톨이 소녀 사유리가 자살을 한다. 그 사건은 사유리의 학교 선생들과 아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남는다. 그녀가 어째서 모질게도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유리의 죽음을 계단의 하나꼬라는 괴담과 연결하며 그 잔혹한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이다. 예상 가능한 반전이지만 생각지 못한 복선이 이야기를 맛깔나게 살렸다.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아 불러낸 귀신 - 그네를 타는 다리
친구와 잘 어울리지 못하던 미노리는 우연치 않게 소위 잘나가는 아이들의 그룹에 끼게 된다.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 작지만 지독한 계급제 사회였다. 하루아침에 잘나가는 아이가 되어 인기인이 된 소녀. 하지만 미노리는 그네를 타다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아이와 어울렸던 다른 아이들은 미노리가 귀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수군거렸다.
귀신을 불러내는 놀이인 분신사바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어느 누구도 귀신을 불러 낼 수 없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미노리는 귀신을 불러낼 수 있었다. 미노리의 죽음은 귀신의 저주라고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노리와 같은 마음이 된 또 다른 소녀 아카네만은 미노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망령든 노인이 만들어낸 망령들 - 아빠, 시체가 있어요
치매가 든 외할머니의 집을 치워주기 위해 주말마다 쓰쓰지는 부모님과 함께 외가를 찾는다. 그런데 정말 곤란하게도 집을 치우기 위해 여기 저기 들쑤시자 알 수 없는 시체들이 쏟아져 나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쓰쓰지의 외할머니 댁은 외진 산골 깊은 데에 있다. 찾아올 사람도 자식들 외에는 거의 없고 참견할 이웃도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시체들이 어디서 어떻게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조용히 처리하면 시끄러워 질 일은 없을 것이다. 힘들게 시체들을 치우고, 후에 다시 외가를 방문한 쓰쓰지는 경악한다. 또다시 시체들이 외가에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부모와 상의하고 싶지만, 부모는 시체를 같이 치운 기억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상당히 독특한 얘기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룬 단편이 있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단편집 『싫은 소설』에서 「싫은 조상」이라는 단편이 그렇다. 껄렁하고 왠지 싫은 후배에게서 덜컥 불단을 맡아버린 주인공. 불단에는 고무인형 같은 ‘살아있지 않은’ 사람이 들어차 있다. 그것도 기괴한데 그 고무인형 같은 것들이 매일 매일 그 숫자를 불리고 있다. 기괴하게 겹쳐져 있는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도 불단에 모셔지는 후배의 조상들인 듯하다. 어떻게든 그 기분 나쁜 불단을 후배에게 다시 되돌려 주고 싶은데 후배는 자꾸 피하기만 한다. 그렇게 불단과 함께 생활하기를 수 일, 결국은 어떤 이유로 불단을 후배에게 돌려주지 못하게 돼 버리고 만다는 아주 기괴한 이야기다. 죽은 사람이 어디선가 계속해서 튀어나온다는 설정이 비슷한데, 교고쿠 나츠히코의 단편에서는 결말을 아주 깔끔하게 지어준데 비해 츠지무라 미즈키의 책에서는 아주 모호하게 끝내 버린다.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데 내가 나름대로 읽기에는 이렇다.
외할머니 집에서 나타나는 시체들은 대게 훼손되고 반쯤 부패되어 있어서 신원 확인이 불가능 한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외할머니 댁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 주변에 실종된 여자아이, 이웃집 여자 같은 한번쯤 외할머니와 교류했을 법한 이웃이다. 외할머니는 자식들의 왕래도 드문데다가 이웃과도 멀리 살고 있어서 외로운 지경이었다. 게다가 병까지 걸렸다. 그런 외할머니의 고독이 교류했던 사람들의 잔영과 결함하여 어떤 실체를 만들어 냈다. 그러니까 그 실체화된 시체들의 정체는 외할머니의 지독한 고독인 것이다. 외할머니의 자식들이 그 실체화된 것을 마주하고 만지고 치우기까지 하게 되는 것은 그들 내면에 자리한 죄책감이 때문이 아닐까? 때문에 집을 치우고 시체를 치우고 난 후(이런 봉사를 통해 홀로 방치한 노모에 대한 죄책감이 해소된 것이다) 그 기괴한 경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손녀 쓰쓰지 만은 외할머니 집에서 만난 시체들에 대한 기억을 똑똑히 갖고 있는데, 이는 실연을 한 그녀가 그 상실감으로 인한 외할머니와 같이 고독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무리하게 끼워 맞추자면 그런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뭐 결론은 아주 애매하게도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는 손녀의 환상으로 마무리 지어지는데, 흥미진진한 전개에 비해 결말이 매우 아쉽다.
고독과 망상과 현실의 뒤섞임 - 테두리 없는 거울
가나코는 클럽에서 색소폰을 부는 도야를 짝사랑 하고 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그와의 미래를 유행한다는 거울 점을 통해 보려고 한다. 거울 점으로 보게 된 건 도야를 닮은 듯, 그녀 자신을 닮은 듯 한 소녀의 모습이다. 가나코는 거울 속 소녀가 도야와 자신의 미래의 아이라고 굳게 믿게 된다.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지만 거울 점으로 그녀의 미래의 아이를 마주한 이후로 꾸는 꿈들이 심상치가 않다. 과연 도야와 가나코는 미래에 행복할 수 있을까?
거울 속에서 미래를 보고, 현실이 불안정해 지더니 결국은 거울속의 미래가 현실을 잡아먹더라. 그런 이야기였다면 아마 조금은 뻔했겠지만 대단한 반전이 있다. 적당히 기괴하고 신비스럽고 애잔하다가 무시무시해진다. 미래의 행복을 바라며 헛된 꿈을 꾸던 여자의 현실은 아주 처참하게 망가져 버린다. 이 이야기는 앞도 없고 뒤도 없다. 표제작이 될 만하다.
상상속의 친구가 현실로 걸어 나오다 - 8월의 천재지변
나름 한때는 반에서 인기 있던 중심인물이었는데 어느새 친구 없는 찌질이로 중심에서 밀려나도 한참 밀려나 있다. 신지는 병약한 친구 교스케를 돌보느라 다른 친구들과 멀어졌다. 완전히 주변인이 되 버린 지 오래다. 걸핏하면 친구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다. 처음에는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 였다. 너희들은 나를 우습게 알고 무시하지만 나에게는 너희와는 비교도 안 될 멋진 친구가 있다. 그러니까 너희가 나를 어떻게 대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게 신지는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내고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거짓말은 결국 탄로나 버리고 오히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제발 신이 있다면 천재지변이라도 일으켜 주길, 그래서 나와 상상속의 친구 유짱의 세계를 연결시켜 주길 바라던 그때, 느닷없이 상상속의 친구 유짱이 나타난다. 신지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 전까지의 단편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이야기이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것 같은 충격을 받아서, 정말 한동안 멍하니 그저 앉아만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그래서 항상 친구를 찾지만 아무리 잘 맞는 친구라도 사소한 오해와 다툼으로 쉽게 헤어져 버리기도 한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상상속의 친구는 어린 신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배려한다. 누가 봐도 멋진 친구다. 하지만 그는 분명 상상속의 인물이다. 현실에 있을 수 없다. 그는 누구일까? 언제까지 나와 함께 해 줄 수 있을까? 뜻밖의 사고로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교스케에게서 듣게 되는 상상속의 친구 유짱의 정체는 쓰리고 아프다.
5편의 단편 모두 고독한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너무나도 고독하고 외로운 나머지 귀신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환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비극을 맞는 이도 있고 구원 받은 이도 있다. 고독은 아주 원초적인 감정이다. 남녀노소 어떠한 사정이나 상황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고독을 느낀다. 그래서 한번쯤은 경험해 봤을 감정일 것이다. 여기 이 책의 이야기들 속에 모두 들어있다. 그래서 하나같이 무섭고, 쓰리고, 아프고, 슬프고,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