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파편
이토 준지 지음, 고현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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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이 심심치 않게 소개되면 한권씩 사서 소장하는 유일한 만화 작가인데, 그동안 신간 소식이 없어서 이 작가가 절필을 했나? 아니면 그런 요상한 이야기를 만들다 못해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건 아닌가 걱정을 했는데 나름 작품 활동을 쭉 해오고 있었단다. 꽤 오랜 기간 동안 공포 만화를 그리지 않던 그는 인연 깊은 담당 편집자의 죽음과 아끼던 애완묘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일 등을 겪으며 슬럼프 아닌 슬럼프를 겪고 다시 공포 만화로 컴백했다. 꽤 오랜만에 내는 공포 만화 단편집이라 본인 스스로도 감이 많이 떨어졌음을 통감했다고 후기에 적고 있다.

 

정말 그래서 그런지, 8편의 단편 중에 인상적인 단편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토미오, 붉은 터틀넥」이나 「해부중독자」같은 경우는 소재가 어딘가에서 많이 듣던 이야기라 이제는 무섭지도 않고 식상하기만 한, ‘도시 괴담’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미안하게 세련되지 못해서, 그야말로 ‘공포 특급’스러워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 였달까? 물론 이토 준지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작가라서 식상한 이야긴들 만화로 풀어내니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면 참 아쉽다.

 

「나나쿠세 나나미」나 「귓속말하는 여자」같은 경우는 설정은 독특한데 얘기가 결국 그렇게 되겠구나 예상이 가능 수준이었고, 「이불」이나 「목조 괴담」같은 경우는 왠지 그림 빨로 때운 것 같다는 인상이 강했으니……. 다 이랬으면 엄청 실망스러웠겠지만,

 

「검은 새」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 어쩐지 정체모를 괴생명체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대부분 만족스러웠는데, 「토미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굉장한 캐릭터가 나온다. 대사 한줄 없이 마성의 매력을 마구 뿜어주시는데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다른 이야기들처럼 종결되는 결말이 아니라, 뭐 결말은 나지만 그게 끝없이 반복되고 이어질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게 그야말로 소름이 돋았다. 검은 새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애초에 친절하게 설명 하는 분이 아니지만) 왠지 태고부터 존재했을 것 같은 무언가인데, 게다가 엄청나게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 능력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뭐 없지만, 그래서 더 소름 돋게 인상적이었다. 재미있는 캐릭터지만, 속편이 나올 것 같지는 않고. 하지만 여튼 대단한 이야기다.

 

「느린 이별」은 다른 의미로 대단한 게, 내가 이토 준지 만화를 보다가 감동에 젖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이 단편이 상당히 의외성이 있다. 반전도 있고, 결말도 훈훈해서 그냥 계속 생각나는 이야기다. 자극적인 설정이나 인체훼손같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은 없지만 이야기 전개가 참 괜찮다. 아마 공포 만화 공백기 동안 인연 깊은 담당 편집자를 잃고, 애정을 쏟았던 고양이를 떠나보낸 경험을 해서 그런지, 죽음이나 죽은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남은 이들에 대해 작가가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망한 친족을 염원으로 되살려내(비록 완전한 부활은 아니지만) 되돌아온 망자가 소멸되기까지 수년에서 수십 년을 유족들은 애도하고 조금씩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는 설정은 정말, 기발하게 슬프다.

 

전체적으로 8개 단편 중에 2편은 아주 괜찮고 2편은 그저 그렇고, 4편은 그저 지면을 채우겠다는 생각뿐이었나 싶을 정도로 별로라서 총평하자면 좋은 점수는 못 주겠지만 말이다. 이미 이 책을 사서 볼 사람은 다 사서 봤을 것이고, 우연하게 표지에 끌려 이 책으로 이토 준지의 세계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역량이 겨우 이정도인 작가가 아니니 다른 작품을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한동안 쉬었으니 공포 만화 좀 열심히 그려서 다음 작품도 만날 수 있기를. 그저 오랜만에 신작이라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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