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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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우리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미얀마로 여행을 가기로 작정하고 그곳에서 읽을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갔다.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유리 궁전>을 사서 계산대로 가려는데 검정 색 띠지를 두른 작은 책 한 권이 눈길을 끌었다. 제목이 <여자 없는 남자들>이다. 저자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아니 하루키가 언제 단편집을 냈지? 표지를 넘기니 내가 아는 그 하루키가 맞다. 습관대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첫 번째 단편인 드라이브 마이 카로 바로 돌진한다. 117쪽을 펼쳤다. (내 음력 생일이 117일이다. 그래서 어떤 책이든 117쪽을 꼭 읽어보고 산다)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가 너무도 부족한 탓에, 그 몫만큼 놀랍도록 기교적인 인생을 걷게 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중략) 그리고 어느 순간 어디선가 꽂혀 들어온 특별한 햇빛을 받아 그들이 자기 삶의 인공성을, 혹은 비자연성을 퍼뜩 깨달았을 때, 사태는 때로는 비통하고 또한 때로는 희극적인 국면을 맞이한다. (117-118)

 

어느 순간 저 문장이 내 심장 안으로 꽂혀 들어왔다. 당장 책을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치고 신촌에 있는문학다방 봄봄으로 향했다. 책을 읽기 위해 자주 들르는 곳이다. 그곳에서 커피를 리필 받아 마셔가며 소설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 읽는 것을 멈춘다면 그건 하루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니면 하루키 소설이 아니든지. <상실의 시대><1Q84>도 그렇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여자 혹은 남자가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떠나보낸 혹은 놓쳐버린상실을 다루고 있다. 특히사랑하는 잠자는 카프카의 <변신>에 하루키가 보내는 오마주다.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카쓰키는 분명 후자였다. (44)

 

술 대신에 여행을 넣는다면 나 역시 분명 후자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실크로드, 인도, 네팔, 티벳 등지를 들쑤시고 다닌 것도 어쩌면 뭔가를 지우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여행은 자주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 이름 모를 고장을 지나칠 때마다 낯선 전율과 흥분이 눈을 찌른다. 발걸음은 더뎌지고 감상은 농밀해진다. 때론 비어있는 자리가 더 많은 말을 건넨다. 기어코 휴지 한 장을 더 꺼내 비어 있는 옆자리까지 닦아낸다. 빈자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여행이다. 어깨를 빌려주고 옆구리를 내주는 사소한 사랑의 방식에도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여행은 불안과 주저와 한숨이 반을 차지한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중략)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327)

 

그렇다. 살다보면 사랑이 상실과 동의어가 될 때가 온다.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선택하는 경우다. 살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운명 앞에 놓인 그림자를 사랑할 뿐이다. 그렇게 한때를 서로의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여권을 챙기고 짐을 꾸렸다. 불룩해진 배낭에서 옷가지를 빼고 미얀마에서 읽을 책을 채워 넣었다. 밑줄을 그은 곳을 다시 읽기 위해 <여자 없는 남자들>도 챙겨 넣었다. 아시아나항공 OZ769편이 내일 나를 양곤에 내려주면 제일 먼저 쉐다곤 파고다로 가려고 한다. 거의 100m에 이르는 그 황금사원 꼭대기에서 내가 알던 그 여자에게 전파를 쏘아 올릴 것이다. 이 신호를 받지 못한다면 그 여자는 지구에 없는 것이다. 난 이제 그녀를 잊는다.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때로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여자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335-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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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 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
임흥준 지음 / 더퀘스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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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를 알면 비즈니스가 보인다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

임흥준 지, 더퀘스트, 2015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운다고?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요즘 장안의 화제다. 언젠가 이 드라마에서 직원 채용의 마지막 관문으로 프리젠테이션 발표를 함께 한 상대방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때 비즈니스 노하우가 빼곡하게 담겨 있는 '수첩'이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드라마를 보던 많은 초짜 비즈니스맨들은 현실에서도 그 수첩처럼 영업 필살기가 담긴 '비기(秘記)'가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을 것이다. 마침 비기를 담은 그 수첩만큼이나 비즈니스맨 생활을 시작하는 사회초년병들에게 지침이 될 만한 책이 나왔다. 미니 프린터 세계 2위 글로벌 기업인 빅솔론의 해외영업부장인 저자가 세계역사에서 배운 비즈니스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하고 있는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이다. 역사는 미래를 읽는 더없이 좋은 도구다. 월가의 인디아나 존스로 불리는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는 그의 책에서 투자와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역사를 세밀하게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역사지식이나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활용하는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나는 세계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는 책에서 배운 역사적 지식을 비즈니스 현장에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계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저자가 체험한 비즈니스 사례와 짝을 이루어 소개하기 때문이다. 빅솔론은 국내 최초로 미니 프린터 개발에 성공한 삼성전기에서 20031월에 분사한 기업이다. 미니 프린터는 가게나 식당에서 영수증을 인쇄하거나 바코드를 찍는데 사용되는 작은 사이즈의 프린터다. 매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제품의 특성상 높은 품질을 갖춰야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빅솔론이 뒤늦게 동종업계에 뛰어들었을 당시에는 이미 엡손·시티즌·스타 같은 유명한 일본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빅솔론은 분사 10년 만인 2013년 세계 2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3년 기준으로 매출 840억 원, 영업이익 150억 원을 달성해 코스닥 히든챔피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지구를 50번 일주할 만큼의 거리를 비행했고 전 세계 60개국 이상을 발로 밟았다.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다. 그렇다고 저자가 처음부터 프로 비즈니스맨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은행원으로 잠시 일했을 뿐 영업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안정적이지만 보수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온 것은 순전히 그의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던 해외영업에 대한 도전의식이었다. 그가 새로 들어간 삼성전기는 20031, 미니프린터를 생산판매하는 팀을 분사했다. 저자에게는 또다시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삼성이라는 커다란 조직에 계속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회사와 함께 모험해 볼 것인가였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영업 경험이 전무한 초짜 비즈니스맨이었던 저자에게는 도움을 받을 선배나 그럴듯한 매뉴얼은 물론 찾아갈 거래처도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영어 학원과 중국어 학원을 동시에 다니면서 어학 실력을 쌓는 것은 물론이고, 구할 수 있는 모든 미니 프린터를 직접 분해조립해보면서 제품의 작동 원리를 깨우쳐 나갔다. 그러나 수시로 크고 작은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영업 감각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로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있을 때 불현 듯 대학 시절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경영학의 많은 용어들이 군사 용어에서 유래됐다. 전략·캠페인·게릴라 마케팅 등이다. 비즈니스도 전쟁도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기계적인 인과관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시장과 고객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업자에게 성공은 요단강 너머에 있는 신기루에 불과한 법이다. 역사를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로 되살려내서 생생하게 숨 쉬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영업의 기본은 사람이라는 깨달음이 섬광처럼 찾아온 것이 바로 그때다. 이때부터 저자는 역사서, 특히 전쟁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비즈니스는 결국 인간을 다루는 일이므로 역사에서 성공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역사 공부는 그가 전 세계 60개가 넘는 나라에서 승승장구하며 당당히 업계의 거물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뢰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책은 (): 승부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다’, ‘(): 싸우기 전에 생각하라등 크게 3개의 주제로 나뉘어 있다. 그 안에 총 21장의 교훈이 되는 역사적 사건저자의 생생한 경험담이 녹아 있다. 스위스 용병이 목숨을 던져 신뢰를 쌓은 사실에서부터 칭기즈칸의 창의적이고 유연한 발상,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사단의 팀워크 등 동서양의 역사를 넘나들며 비즈니스 감각을 일깨워주는 다양한 사례들이 눈길을 끈다.

근세까지도 스위스는 공업 기반이 거의 없었던 삼류 농업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처럼 부존자원이 척박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산과 호전적인 기질만 다분한 사람들뿐이던 유럽의 최빈국이었다. 요들송이나 부르고 밀크초콜릿이나 만들어 먹던 그런 스위스가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고품격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하며 유럽의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그 역사적 배경에는 스위스 용병이 자리 잡고 있다. 스위스 용병 부대가 유럽 역사의 중앙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가진 전투력 못지않게 그들이 보여준 철저한 계약정신의 역할이 컸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1527년에 교황 클레멘트 7세가 기거하던 교황청이 신성 로마군에게 공격을 받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로마군 2만 명의 공격으로 교황청의 수비망이 뚫리고 189명의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만이 교황을 지키는 상황이었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고 저항해봤자 죽을 게 뻔했다. 교황은 자신들을 고용한 고용주였고 고용주를 버리고 도망치면 목숨은 건지겠지만 용병으로서의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스위스 근위대는 계약의 충실한 이행을 위하여 도망대신 전멸을 선택했다. 근위대가 성베드로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2만 병력을 상대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교황은 간신히 피신하는 데 성공했지만 용병 부대는 147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 사건은 전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스위스 용병에 감동한 교황청은 이탈리아인이 아닌 스위스 용병들로만 근위대를 구성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이 전통은 이후로도 무려 50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대가를 받고 그 계약 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고용주를 위해 싸웠던 용병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비즈니스맨들이었던 셈이다. 새로운 거래선을 찾아 유럽을 종횡무진 하던 저자한테도 비슷한 경우가 생겼다. 계약을 맺은 헝가리 전자제품 수입업체에서 출장 지원 요청이 들어왔는데 하필 그곳이 발칸반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였다. 연일 폭격과 총성이 계속되고 있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곳인데다 출장을 일주일 앞두고 세르비아 총리가 괴한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더구나 그 무장 세력들은 빅솔론이 참가하려고하는 전시회장을 폭파시키겠다는 예고까지 한 상태였다. 세르비아는 준전시상태에 돌입하고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이쯤 되면 전시회에 참가하기위해 그곳으로 출장을 가는 일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일일 것이다. 출장여부를 고민하던 저자는 이때 스위스 용병을 떠올렸다. 결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가 모습을 나타내자 헝가리 파트너는 놀랐다. 애초에 빅솔론 말고도 4개 업체가 참가를 약속 했지만 빅솔론만 출장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약속을 지킨 저자에게 감동한 파트너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빅솔론과 특별한 신뢰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사부 장군의 전술을 실전에 써먹다

 

책에는 신라의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복하면서 펼친 나무사자 전술을 경쟁사와의 특허 싸움에 적용해 성공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섬나라 우산국은 울릉도의 옛 명칭이다. 고구려와 세력 다툼을 벌이며 북진을 꾀하던 신라에게 우산국은 목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강단 있는 우산국이 고구려나 일본과 손을 잡을 경우 신라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사부 장군은 지증왕의 명을 받고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출항일을 앞둔 이사부는 고민을 거듭했다. 도착까지 꼬박 이틀이 걸리는 바닷길은 험하기로 유명한 난코스라 병사들은 전투를 개시하기도 전에 초죽음이 될 게 뻔했고 간신히 도착하더라도 상륙 역시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에겐 최소한의 희생으로 확실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다. 이사부는 오랜 고심 끝에 우산국 병사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병기를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그 신병기는 무시무시한 사자의 모습을 했지만 사실은 나무로 깍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섬에서만 살아서 육지 맹수를 본 적 없는 우산국 병사들에게 군선 가득 실린 집채만 한 사자들은 엄청난 공포를 줬다. 미지의 맹수에 대한 두려움은 우산국 병사들의 전의를 꺾어놓았다. 우산국 군주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신라군에게 항복했다. 신라 병사들이 상륙한 뒤, 맹수가 사실은 나무로 만든 가짜였음을 눈치 챘지만 이미 우산국 병사들은 모두 무장을 해제당한 뒤였다. 이렇게 신라 장군 이사부는 단 한 사람의 아군 희생자 없이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저자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해외 전시회에 참가했다가 알토라는 대만 업체가 빅솔론 제품을 복제해서 팔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특허 소송을 벌여가며 대응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저자가 써먹은 방법이 바로 이사부의 나무사자 전술이었다. 빅솔론이 삼성에서 분사된 기업이며, 여전히 삼성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몇 가지 기술적 장치를 한 항의 문서를 알토의 경영진에게 보낸 것이다. 문서는 소장(訴狀)양식에 준해서 사용했고 저자의 이름 밑에는 영업사원 대신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넣었으며 소속 또한 해외영업팀이 아닌 법무팀으로 기재했다. 일종의 꼼수를 부린 셈인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알토 측으로부터 정중한 사과와 함께 특허 침해 사실에 대한 인정, 그리고 디자인 변경에 대한 확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상대의 두려움을 자극한 심리전과 이성을 찾기 전에 속전속결로 밀어붙인 속도전이 성공한 사례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주옥같은 비즈니스 비법

 

책에는 그밖에도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영화 <300>의 테르모필레 골짜기와 같은 비즈니스의 길목은 어디인지, 기업이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투다가 황폐해진 이스터 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2차 세계대전 당시 단번에 전황을 뒤집은 둘리틀 공습 작전같은 비즈니스 필살기는 무엇인지 등 흥미롭고 유용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세계 역사에서 비즈니스를 배웠다는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서가 아니고 신화 창조류의 성공 스토리도 아니다. 저자 역시 전문적으로 역사를 연구한 학자도 아니다. 대신 저자의 방대한 인문학적 역사 지식과 실전 비즈니스 노하우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오히려 생동감이 넘친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이 비즈니스 현장을 누비며 겪었던 생생한 경험들과 기가 막히게 버무려져 시종일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25쪽에 이르는 알차게 구성된 부록은 보너스다. ‘완전히 다른, 국가별 비즈니스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각기 다른 비즈니스 스타일이 수록돼 있고, ‘어떻게 협상을 승리로 이끌 것인가에는 협상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10가지 노하우가 담겨 있다. 세계시장을 발로 뛰며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을 누비는 글로벌 미생이 아닌 국내 미생이라면 본문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하다. "비즈니스의 주옥같은 비법을 이렇게 책으로 내놓기 아까웠을 것" 이라는 추천사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 (월간금융 vol.731, 2015.2 전국은행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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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인구 절벽이 온다
해리 덴트 지음, 권성희 옮김 / 청림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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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인구다

 

2018 인구절벽이 온다

해리 덴트 지, 권성희 옮김, 청림출판, 2015

 

"한국은 2018년 이후 인구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마지막 선진국이 될 것이다. 그 후 수십 년간 소비 흐름의 하락세가 중단 없이 이어질 것이다." 인구구조전문가이자 애널리스트인 해리 덴트의 신간 2018 인구절벽이 온다(원서명 : The Demographic Cliff)의 한국어판 서문에 나오는 섬뜩한 전망이다. ‘인구절벽이란 한 세대의 소비가 정점을 치고 감소해 다음 세대가 소비의 주역으로 출현할 때까지 경제가 둔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처음으로 앞 세대보다 인구 규모가 작은 세대가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경제예측 전문기관인 덴트연구소의 창업자이자 HS덴트재단의 이사장인 저자는 인구와 소비 변화를 변수로 한 경제 전망과 투자 전략의 권위자다. 인구와 인구 변동 추이, 이에 따른 소비 변화가 세상과 경제를 해석하는 확고부동한 틀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구통계학은 미래를 여는 열쇠다. 인구변수는 미래 사회·경제를 결정짓는 가장 상위 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를 보고 싶다면 인구구조적 추세를 보면 된다.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 역시 미래예측의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로 인구통계를 사용했다. 저자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일본 경제가 곧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1990년대에 일본의 몰락을 전망했다. 이 틀로 지난 1980년대 일본 버블 붕괴와 1990년대 미국 경제 호황을 정확히 예측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책은 자세하고 심층적인 도표와 통계를 동원하여 선진국을 중심으로 인구 절벽 상황을 살피고 있다. 특히 한국경제와 얽히고설킨 일본의 식물경제와 중국의 버블을 분석한 2, 7장은 중요하게 읽어야 한다. 일본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서구형 국가로 성장했지만, 선진국 중에서 가장 먼저 인구 절벽을 맞았다. 1989년과 1996년 사이에 인구절벽을 경험한 뒤 25년째 장기불황에 시달리며 경제가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물가상승률과 GDP성장률이 거의 0퍼센트였다. 한마디로 식물경제다. 거기다 인구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고, 2020년 이후 또 한 차례 인구 절벽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인구 절벽은 2014년부터 2019년 사이에 거의 모든 선진국을 덮칠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고점에 도달하면서 앞으로 몇 년 내에 한 국가에 이어 또 다른 국가가 일본을 따라 식물경제에 빠질 것이라 전망한다. 이제 일본은 성공 모델이 아니고 재앙 공식이 되었다. 저자는 경제학자들과 정부 관료들, 투자가들, 기업가들이 왜 일본의 사례를 더 많이 연구하지 않는지 의아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을 22년 뒤처져 따라가고 있다. 근거는 일본에서 출산 인구가 가장 많았던 해가 1949, 한국은 1971년이라는 22년 격차 때문이다. 가장이 47세일 때 가계 소비가 정점이라고 가정해 일본의 소비 정점을 1996, 한국은 2018년으로 계산한다. 22년 후 한국이 일본이 될 텐데, 이때 부동산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미래 자본주의의 모델일까? 대답은 NO.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중국 경제를 이끈 것은 소비자들의 소득과 지출이 아니다. 지금 전 세계 크레인의 대부분은 중국에 있다. 오늘날 가장 높은 마천루가 올라가고 있는 곳 역시 중국이다. 중국은 수십 년간 오로지 대규모 과잉 건설을 통해 정부가 경제를 이끌어오며 현대 역사상 가장 큰 버블을 형성했다. 미국은 돈을 찍어내고 중국은 부동산을 찍어내는 형국이다. 다음 글로벌 금융위기의 방아쇠는 남유럽이 당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짜 심각한 골칫덩어리는 세계 2위이자 가장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는 중국이다. 중국의 부동산 버블은 다음 금융위기의 희생양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터져 다음 금융위기를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될지 모른다. 중국은 그간의 과잉 건설을 흡수하는 데만 10년 이상 걸릴 것이고 다른 신흥국보다 훨씬 더 이른 2015년에서 2025년 사이에 인구 절벽이 찾아 올 것이다. 2025년 이후 과잉 투자를 흡수한 다음에는 급격하게 인구 절벽 아래로 떨어져 결코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더 심각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자 향후 한국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요인으로 중국을 꼽는다. 버블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 버블이 터지면 한국은 직격탄을 맞는다. 한국은 수출이 GDP50퍼센트를 차지하며, 특히 중국에 대한 수출이 전체 GDP20퍼센트에 달하기 때문이다. 중국 수출이 50퍼센트가 줄면 한국은 GDP6퍼센트가 사라지게 된다. 이는 깊은 침체를 의미한다. 버블은 팝콘 튀기는 기계 같다. 점점 더 커져 마침내 서로 다른 시간에 여기저기서 터지게 된다. 버블은 예외가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전 세계 주요 정부들은 상상 이상의 부양책을 쏟아냈다. 지금도 각국 정부들은 부채를 축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긴축을 피한 채 파산 상태의 경제를 구제하고 부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부양책은 장기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는 단기 처방에 불과하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채권 등 시중의 금융자산을 사들여 돈을 푸는 것으로 새로운 부채 마약에 다름 아니다. 부채는 마약처럼 점점 더 많이 사용할수록 점점 더 효과가 떨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마약의 부작용과 독성으로 무너지거나 사망에 이르게 된다. 결국 빠르게 고령화하는 선진국들은 정상화하지 못할 것이고 더 큰 규모의 부양책을 쓴다 해도 경제 상태는 기껏해야 비틀거리는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다. 앞으로 수년간 많은 국가들이 인구구조적 절벽을 맞아 정부 부양책의 효과가 점점 떨어질 것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책에서는 현재의 경제 겨울이 지나고 장기호황이 시작되는 시기를 2023년 말이나 2024년 초로 보고 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는 지금부터 2023년 사이에 일어날 위기, 특히 지금부터 2019년 말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될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한국경제를 언급하는 대목을 흘려듣기엔 너무 구체적이다. 한국의 가장 위험한 시기는 지금부터 2016년까지 그리고 2018년과 2019년이라며 대대적인 디플레이션에 대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인 8장과 9장은 다음 위기에 대비한 투자 전략과 경제의 겨울을 대비한 기업 전략에 할애했다. 끝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15년 새해의 최대 화두가 인구가 될 것이란 말도 들린다. 인구변수를 중심으로 미래를 예측한 인구 충격의 미래 한국(프롬북스)같은 책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이래저래 을미년乙未年 새해 출발이 심상치 않다. -- (기획회의 383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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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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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는 들으리라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박하, 2014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은 독일 시사잡지 슈테른의 기자 출신으로 미국과 아시아 특파원을 지낸 얀 필립 젠드커의 첫 장편소설이다.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담은 독일소설이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름답기 이전에 진한 슬픔이 배어있기 때문이고 독일 작가이긴 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미얀마이어서 그렇다. 2002년 독일에서 출간되어 서점주인과 독자들의 입소문만으로 화제에 오르며 전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얀마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변호사의 삶을 살던 남자가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다. 화자인 20대의 딸 줄리아는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미얀마의 한 여성에게 썼던 50여년 전의 편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행방을 쫒아 미얀마 껄로로 떠난다. 그곳에서 줄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된 소년(틴 윈)과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소녀(미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된다. 귀로 세상을 느끼는 틴 윈에게 우 메이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사물의 참된 본질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법이란다. 우리는 오히려 감각 기관 때문에 길을 잃지. 그 중에서도 특히 눈은 우리를 잘 속인다.”(149) 틴 윈은 보지 못하는 대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더 깊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둘은 서로에게 눈과 발이 되어주며 물리적 거리의 장애와 시간의 부식력을 거스르며 하나의 영혼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벽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은 어깨를 빌려주고 옆구리를 내주는 사소한 사랑의 방식에도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감동과 매혹을 넘어 닿을 수 없는 경이감까지 불러일으킨다.

 

미얀마로 여행계획을 세워놓고 가이드북보다 먼저 손이 닿은 책이다. “이 도시에서 좋은 시간 보내십쇼. 깔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19) 길을 잃고 두리번거리는 줄리아에게 낯선 미얀마 청년이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며 하는 말이다. 애초 계획하고 있던 양곤-바간-낭쉐 여행일정에 깔로를 추가하기로 마음먹은 게 아마 이 대목을 읽을 쯤 이었나보다. 틴 윈은 35년 만에 미미 옆으로 돌아왔고, 둘은 그 다음날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날이 15일이다. 한 달 후에 나는 미얀마에 있을 것이고, 일정을 짜다보니 공교롭게도 15일 쯤에 깔로에 닿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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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동의보감 내경편 낭송Q 시리즈
허준 지음, 임경아.이민정 풀어 읽음, 고미숙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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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을 하노라

 

낭송 동의보감 내경편

허준 지음, 임경아.이민정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북드라망, 2014

 

작년 봄에 한 달 동안 인도를 여행했다. 갠지즈 강을 거닐다가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고목나무에서 흘러내린 듯 허리까지 내려와 있는 사두(힌두 탁발승)와 마주쳤다. 얼굴에는 경극 배우처럼 두꺼운 분칠을 했고, 몸에는 갖가지 요상한 악세사리를 두르고 있다.

 

나마스떼!(안녕하세요)” “어디서 왔는가?”

코리아

아니, 네가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모르겠다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하면 50루피!”

사실은 너는 네가 온 곳을 알고 있다. 단지 그 사실을 네 자신이 모를 뿐이다”“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를)”

 

평화는 모르겠고 화가 살짝 나는 게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50루피는 그의 손에 쥐어진 다음이었다. 아이 엠I am을 찾을까 했다가 루피만 날렸다.

 

갠지즈 강에 석양이 지는 것을 보려고 다시 가트로 나갔다가 그 사두를 다시 만났다. 오늘 하루 영업(?)을 결산이라도 하는 듯 가트 옆에서 지긋히 눈을 감고 앉아 명상을 하며 이따금씩 만트라(신성한 주문)를 내뱉는다.

하리 옴! 옴 나마 시바야!”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 옆으로 몰래 다가가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동의보감>을 공부하다 읽은 주역周易64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멋대로 읊어 댔다.

 

중천건 중지곤 수뢰둔 산수몽

수천수 천수송 지수사 수지비

풍천소축 천택리 지천태 천지비

 

사두가 놀랐는지 눈을 번쩍 뜨고 지금 외는 주문이 뭐냐고 묻는다.

궁금한가?

궁금하면 50루피!”

 

사두는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채고 그 턱없이 크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씩 웃는다. 내친김에 손바닥을 비벼 눈자위를 비비고, 콧등을 문지르고, 이를 부딪치는 고치법 등 <동의보감>에서 배운 몇 가지 양생술을 시범으로 보여줬더니 따라한다. 물론 50루피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있는 것이 생업적 사기로 번 돈을 반환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 20134월 어느 봄날 갠지즈 강가에서 우리 둘은 그렇게 한바탕 웃고 헤어졌다.

 

아유르베다는 우주와 인간을 상호 연관 지어 고찰하는 고대 인도의 전통의학이다. 인도와 네팔 등에서 5천년 이상 동안 일상생활에서 활용되어 왔는데, 아유르베다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하면 균형이다.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기운의 상호 균형이 깨졌거나, 또는 개인과 자연환경의 균형이 깨졌을 때 질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우주의 기운이 우리 신체와 연결되어 있듯이 몸과 마음이 서로 소통한다고 말한다. 희로애락과 오장육부가 연동되어 움직이며, 감정은 삶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화를 자주 내면 간이 상하고, 너무 기뻐하면 심장이 다치며, 두려움이 지속되면 신장에 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유르베다가 표방하는 인간은 소우주이고 질서는 건강이고 무질서는 병이라는 철학은 한의학과 일부 통하는 지점이 있다. 서양의학도 다르지 않다. 네델란드 출신의 헤르만 부르하페(16881738)라는 의사는 죽어서 의학사상 최고의 비밀이라는 두툼한 노트 한 권을 남겼다. 이후 이 노트는 경매에 붙여졌는데 그 노트를 펼치자 아무것도 없는 백지의 노트 맨 끝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한 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차갑게 하고, 발은 뜨겁게 하며, 몸속에는 찌꺼기를 남겨주지 마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의 모든 의사를 비웃게 될 것이다." 차가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것,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편안하게 복부는 따뜻하게 하는 것이 건강의 지름길이라는 것으로,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수승하강水昇下降이나 두한족열頭寒足熱과 같은 의미다.

 

<동의보감>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으로, 동아시아 2,000년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동양의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책이다. 조선조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허준이 장장 14년에 걸쳐 완성한 책으로, 25권에 달하는 엄청난 스케일로 목차만 무려 100쪽이 넘는다. 특히 중국에선 30여 차례 간행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본에서도 한의학의 표준적 모델이 되었다. 의서임에도 보다는 생명활동에 중점을 두고 병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양생법을 강조하고 있다.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닌 삶의 비전서, 혹은 양생술의 지혜가 가득한 인생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다. 양생법은 말 그대로 잘 사는 방법인데, 태어날 때 천지로부터 받은 기운을 잘 아끼고 보양하라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맞게 잠자고 일어나며, 음식은 담박하고 적당히 먹으라는 등 일상적인 실천지침을 제시한다. 낭송 동의보감 내경편<동의보감> 중 몸 안의 세계를 다룬 내경편에 있는 내용을 가려 뽑아 낭송하기에 알맞게 그 편제를 새롭게 만든 발췌 편역본이다.

 

하루 중의 금기는 저녁에 배부르게 먹지 않는 것이고, 한 달 중의 금기는 그믐에 만취하지 않는 것이고, 인 년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여행하지 않는 것이고, 평생의 금기는 밤에 불을 켜고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89)

 

그런데 왜 낭송인가? 여기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대체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교과서를 달달 외고 문제집을 술술 풀고 계산을 척척 해내는 게 공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안다. 그렇다. 공부는 쿵푸다. 몸과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을 넘어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부의 핵심은 역시 소리요 청각이다. 신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낭송이라는 전통의 공부법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비유컨대,‘정신은 몸의 의지를 수행하는 손이라는 것. 그러므로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지도 않고, 분리할 수도 없다. 고로, 나는 신체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2021)

 

올 한해 시절인연이 닿아서인지 동의보감을 좀 더 가까이서 공부하게 되었다. 낭송과 산책이 최고의 용신이라는 걸 믿기에 날씨가 좋을 때면 사시사철 화보를 펼쳐 보여주는 남산길을 산책하며 동의보감을 읊조리곤 했다. 몸은 삶의 유일한 현장이자 무대요, 존재와 우주가 교차하는 접점이다. 낭송은 아주 구체적이면서 신체적인 활동이며 몸이 좋아하는 독서법이다. 백미보다 현미가 몸에 좋은 것처럼 묵독보다 낭송이 몸에 더 잘 호응한다. 묵독은 이야기에 담긴 긴장과 갈등, 지혜와 성찰의 호흡을 제거한다. 그런데 낭송하는 순간 책속에 몽글몽글하게 웅크리고 있던 활자들이 그 뜻을 곧게 펴고 책 밖으로 걸어 나온다. 내용을 이해하고 못하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그 파동과 기를 몸이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입과 귀를 써야 한다. 입과 귀가 움직이면 뇌가 충전된다. 그리고 뇌를 자극하면 심장을 거쳐 신장으로, 허벅지와 발바닥까지 그 기운이 전달된다. 그래서 낭송을 일종의 양생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일한 부작용은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쁜 중독이든 좋은 중독이건 중독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낭송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읽으려고 달려들지 모른다. 비록 그것이 가계부와 애 성적표일지라도. 그러니 일단 신체와 궁합이 잘 맞는 좋은 고전을 고른 다음에 머리로 바짝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낭송을 통해 몸에 새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핵심은 외는 것이다. 다 외워야 낭송이 가능하다. 암기와 암송은 다르다. 암기가 음소거 상태에서 의미 단위로 텍스트를 먹어 치우는 것이라면, 암송은 소리로써 텍스트를 몸 안에 새기는 행위다. 그렇다. 뼈에 새기려면 외워야 한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115)

 

이 책을 포함한 낭송Q시리즈는 낭송을 위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꼭 소리 내어 읽고, 짧은 구절이라도 암송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머리와 입이 하나가 되어 책이 없어도 내 몸안에서 소리가 흘러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낭송이다. 1신형新形, 내 안의 자연에서는 인간과 우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명은 어떻게 탄생하고 살아가는지 소개한다. 세상과 고립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1부를 소리내서 읽어 보자. 또 자괴감에 시달리거나 남 탓을 하고 싶을 때는 꿈에서 똥까지 몸 속 무수히 많은 존재들을 탐구한 6부를 큰 소리로 읽다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내형편에 이어 외형편, 잡병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어쩐지 을미년乙未年 새해가 든든해지는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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