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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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너머로 흔들리는 부성의 부재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문학동네, 2010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은 '아버지는 작년 9월에 이감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뇌물죄로 구속된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져 민통선 안쪽의 최전방에 위치한 수목원으로 들어온다. 그곳에서 1년을 머물며 식물과 나무들의 세밀화를 그리는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다. 어느날 인근 군부대로부터 한국전쟁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을 세밀화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세밀화가인 주인공 조연주와 뇌물죄와 알선수재로 구속됐던 비리 공무원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거리감을 두려고 하는 어머니가 한 켠에 있고, 통문소대장 김민수 중위와 수목원 연구실장 안요한 등이 다른 한 켠의 이야기를 차지하고 있다. 

김훈의 이전 작품들은 대개 이 세상의 비루함과 몸을 섞어야 했던 남성들이 단골 소재였다. 삶과 죽음이 칼날처럼 맞부딪치는 쓸쓸한 삶의 현장을 묘사하거나, 깊고 핍진한 상실감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주로 남성들)의 내면을 즐겨 그렸다. 이번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처럼 굵직한 역사소설이 아니고, 29살 여성 화자를 중심에 둔 현대물을 선 보였다. 생명이 돋아나는 숲의 아름다움과 세월에 마모된 유골의 황폐함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소통의 싹을 틔우는 세밀한 과정이 줄기를 이루고 있다. 아버지의 세상과 주인공의 생활이 맞닿는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담아낸 숲의 묘사와 함께 신산한 살풍경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에는 일관된 스토리나 서사구조가 약하고 문체 역시 건조하다. 감정이입이 없고 문장과 문장 사이가 넓어, 든든한 골격(사실) 보다는 섬세한 피부(묘사)에 의지해서 읽어야 한다. (물론 김훈의 팬이라면 이정도의 불친절함은 이미 익숙하겠지만 말이다) 대신, 김훈 소설 특유의 비루한 삶이나, 그 삶에서 묻어나는 파편 같은 것을 끌어모은 풍경이, 삶을 견디는 것은 저렇게 힘들고 쓸쓸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추측하게 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부성의 부재, 즉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군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뇌물을 챙기고 상납하다가 구속된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구속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의 삶에서 떨어져 나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다. 어머니 역시 남편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나 교회라는 품속으로 맹목적으로 숨어 든다. 물론 아버지의 뇌물수수는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범죄행위가 분명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뇌물을 받다 구속당한 아버지는 가족에게서 버림받는다. 

"지금 아버지가 앉아 있는 집은 아버지가 거처할 곳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다른 아파트로 보낼 것이었다. (- - -) 아버지에게 교도소 안과 교도소 밖은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에 아버지의 자리는 없었다." (183쪽)

아버지 자리가 없다는 말은 '정자 기증자'이며 '경제적인 기부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꿈을 꿀때면 늘 함께 나타나는 '좆내논'이라고 불리는 말의 은유 속에서 쓸모를 다한 무기력한 폐마(廢馬)와 하나로 겹쳐진다. 주인공은 뼈그림을 그리며 간간이 아버지의 무기력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비루하고 남루한 삶 역시 자신이 그리는 뼈그림을 닮아 처연하고 서늘하다. 

"아버지가 구속된 후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 인간, 또는 그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 - -)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삶은 멸종의 위기에서 허덕거리듯이 위태로웠고, 비굴했다. (- - -)삶이 치사하고 남루하리라는 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9쪽)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부재 현상은 따지고 보면 산업화의 결과다.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공장이나 광산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집에서 더는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아버지라는 종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 너무나 슬프고 딱한 소설이다.

"산업화는 낮에는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빨아들였다가 밤에는 작업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동숙소로 이들을 뱉어내었다. 가족들과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점점 더 낯선 사람이 되어갔다." (루이지 조야, '아버지란 무엇인가'중에서)

아버지와 헤어지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함께 사는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서 살던 어머니는 막상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긴 울음을 토해낸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뼛가루를 수목원이 있는 자등령 숲속에 산골(散骨)하여 장례를 치룬 후 수목원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향한다. 

"어머니는 뒹굴면서 울었다. 어머니의 몸속에 저토록 모진 울음이 감추어져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울음은 한 번도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고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발효되고 숙성된 울음이었다. (- - -)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이 너무 멀어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329쪽)

이 소설을 연애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훈의 연애 서사에는 "사랑한다"는 고백도 없고, 하다못해 끌어 안거나 입맞춤 하는 장면조차도 찾아 볼수가 없다. 다만 이 소설의 밑바닥에 흐르는 약간의 온기와, 어쩌면 막 스며들기 시작한 사랑의 무늬가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비추고 있다. 안실장의 어린 아들 신우를 한 번 안아 주고 싶다는 주인공의 마음속 생각이나, 제대를 앞둔 김중위가 주인공에게 미리 명함을 건네고, 그 명함을 잘 갖고 있는지 여러번 확인하며 다음에 만날 가능성이 여운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그렇다. 작가가 언젠가 다른 책에서 썼듯이 남자가 남성성만으로 온전할 수 없듯이 여자들도 여성성만으로 온전할 수는 없다. 아마도 주인공은 어린 신우나 김중위한테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갈구한다”고 밝힌 작가의 말처럼 다음에 만날 작품에서는 더 온전한 사랑과 희망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숙취가 가시지 않은 지난 주말에 아이를 학원에 밀어넣고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이 소설을 읽었다. 창밖으로 세설(細雪)이 흩날리고 있었다. 자등령 숲 속 너머에서 낯선 나무들이 뿜어내는 날선 풍경의 파편들이 이 도시로 묻어 온 듯 미세한 소름이 돋는다. 인간의 삶은 순간의 음역을 살며 가슴 저미도록 짧다. 절망이 섞여있지 않은 희망이란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비겁한 모습일까 하는 생각에 부르르 몸서리가 난다. 때마침 유재석 나오는 ‘무한도전’ 할 시간이라며 귀가를 재촉하는 아이의 문자메시지가 뜬다. 나는 집을 향해 엑셀을 밟았다. 나는 다시 아버지가 된다. -끝- (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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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2-02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님 리뷰 스타일 참 좋아합니다.
어쩜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깊은 글을 쓸 수 있는지.....
책을 읽는다, 생각을 한다, 쓴다.
전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열심히 읽고 노력해야 겠습니다.
글 스타일 비슷해져도 노여워 하지 마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