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해도 망하지 않아 - 프랜차이즈는 따라할 수 없는 동네카페 이야기
강도현 지음 / 북인더갭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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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지 않는 착한카페 이야기

 

착해도 망하지 않아

강도현 지음, 북인더갭, 2012

 

홍대앞을 지나다가 한 카페 앞에 세워진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회사 때려치우고 카페 차렸소!’ 순간 웃음이 났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절반 이상이 자영업을 한다면 카페를 생각한다. 음식점 차릴 만한 요리 솜씨는 없고, 술장사는 뭔가 복잡할 것 같아서다. 반면 커피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고 수요층도 충분한 데다 아기자기한 맛도 있으니 카페야말로 직장인들의 로망이요 퇴직자들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자영업 생존율은 20%가 안 된다. 카페도 예외는 아니다. 적자 안 나는 카페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아는 사람만 안다.

 

착해도 망하지 않아프랜차이즈는 따라할 수 없는 동네카페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프랜차이즈에 치여 거리 구석구석에 숨은 동네카페들을 찾아 그들의 착한 경영방식을 밝힌 책이다. 대한민국 자영업의 적나라한 생태계를 고발한 화제작 골목사장 분투기의 저자 강도현의 두 번째 책이다. 저자는 경영 컨설턴트를 거쳐 외국계 헤지펀드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트레이더로 일했다. 그 과정에서 돈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나 자본주의 시스템의 심각한 폐해를 느끼게 된다. 결국 3년 만에 트레이더 일을 그만두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과감하게 사회적 기업가로 변신했다. 소셜 카페의 기획자로 카페바인을 운영하며 자영업자의 삶을 사는 한편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활발한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

 

저자는 2009년에 작은 카페의 무덤이랄 수 있는 홍대 중심가에 카페바인을 열었다.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 생태계를 만들어보고 싶은 꿈을 안고 시작한 일이다.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평범한 직장인 등 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고 작은 공간이지만 큰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갖고 출발했다. 그러나 상권이 좋으면 그만큼 임대료도 비싼 법. 홍대근처는 1층에서 장사를 하려면 하루에 커피를 2백잔 팔아도 임대료조차 못내는 곳이다. 열심히 일해서 땅주인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연 지 얼마 못 가 적자에 허덕였고 개인적으로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위기까지 맞게 되었다. 결국 희망제작소 컨설팅그룹 연구원들로부터 임대료가 비싼 홍대에서 빠져나오라는 것과 소셜카페로서 본연의 목표를 정하고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지역에 완전히 밀착된 공간을 만들라는 컨설팅을 받기에 이른다. 이미 착한 카페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동네카페들을 벤치마킹하라는 조언도 함께 들었다. 저자는 미련 없이 홍대를 뒤로 하고 동교동으로 카페를 옮겼다. 그때부터 전국의 착한 카페를 찾아 순례의 길을 나섰다. 큰길가의 좋은 상권에 버티고 앉아 세련된 인테리어로 폼 나게 장사하는 프랜차이즈 틈에서 과연 동네카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떠난 카페 기행에서 저자는 놀랍고 감동적인 사례들과 마주친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그 유명한 성미산 마을공동체의 카페작은나무. 200명이 넘는 출자자가 함께 운영하는 작은나무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곳이다. 카페를 통해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고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카페가 마을공동체의 각종 행사와 회의의 장소는 물론 편한 쉼터 구실을 하기도 한다. 공간 자체가 개인적 사건이 될 정도로 생활과 깊숙이 밀착되어 있다. ‘작은나무는 마을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체제에 굴하지 않고 공동이익을 감당해 나가며 어떻게 대안적 카페를 꾸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협동조합 모델이다. 카페신길동그가게는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 윙W-ing센터에서 운영하는 동네카페다. 윙센터 최정은 대표는 사회복지단체를 중심으로 해오던 자활 프로그램에 회의를 느꼈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인문학 공부였다. 공부공동체를 지향하는 수유너머등의 도움을 받아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변화를 체험한다. 강요된 자활 프로그램에는 반응하지 않던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책을 읽기 시작했고 노동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책에는 그 외에도 행복한 카페’, ‘동네변호사카페’, 카페이로운등 착한 경영이 빛나는 여섯 곳의 카페가 더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비자본적으로 살아남겠다는 야심을 품은 저자의 카페바인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저자가 착하게 살아남은 카페들을 돌아보며 밝혀낸 비밀은 바로 스토리이다. 커피는 마케팅이 아니라 관계다. 입지나 인테리어보다 소통의 자산이 되는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 고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객은 언제든지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프랜차이즈가 따라하지 못할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타인을 향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스토리는 함부로 따라할 수 없다. 스토리는 마케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결국 스토리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이것이 가장 비자본주의적 발상으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지역에서 살아남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먹고 마시는 장사는 대개 3년이 지나면 결판이 난다. 자본주의 계산법으로는 망했어도 벌써 망했어야 하는데 카페바인6년이 지난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그동안 카페바인이 큰 수익은 내지 못하지만 공동체의 삶이 살아 있는 실천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고객 동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페라는 공간을 재해석하여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 커피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그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스토리를 쌓아가며 삶과 밀착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 결과다.

 

착해도 망하지 않아는 저자가 직접 발로 뛰며 실무자들을 만난 현장기록을 바탕으로, 착한 경영이 카페 경영에 실제로 어떻게 유용하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경영탐구서에 가깝다. 자영업으로서의 카페날것의 모습과 카페 운영자들의 희로애락, 무엇보다 사회를 향해 강력하고도 착한 힘을 발휘하는 카페라는 위대한 공간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결국 모든 건 사람이 한다. 카페도 커피머신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들에게 성공의 기준은 돈을 벌었느냐 못 벌었느냐가 아니라 도전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느냐에 달려 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의 파고 속에서 이러한 착한 공간이 우리 주변 곳곳에 꿋꿋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인가. 지속 가능한 카페 운영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꼭 읽어야 할 지침서이다. (기획회의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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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신장섭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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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과의 대화

신장섭 지, 북스코프, 2014

 

1997.11 한국 IMF 구제금융 신청, 1999.8 대우그룹 해체, 1999.10 대우 김우중 회장 해외 출국, 2005.6 김우중 회장 귀국, 18년 전 한국경제를 강타하고 지나갔던 IMF사태와 대우그룹 해체 관련기록을 간추린 것이다. 김우중과의 대화는 신장섭 싱가폴 국립대학 교수가 2010년 이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150시간가량에 걸쳐 나눈 대화들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동안 베일 속에 가려있던 IMF관련 숨은 비화와 대우그룹 해체과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신장섭 교수는 현대경제사를 연구하는 경제학자이다. 1997년 한국경제가 금융위기에 들어간 뒤에는 IMF처방 및 구조조정에 비판적인 글을 쓰고 한국경제의 대안을 모색해왔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대우그룹의 성장과정, 두 번째는 대우그룹의 몰락과정, 그리고 세 번째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대화이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현재 경영 일선에 있는 경영자들이 참고해야 할 유익한 조언은 물론 특히 신흥시장에 진출하려는 기업인들이라면 귀담아 들어야 할 알짜배기 정보와 노하우를 담고 있다. 당시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의 깃발을 들고 창업 30년 만에 신흥국 최대 다국적기업으로 뛰어올랐다. 해체 직전인 1998년에는 한국 전체 수출의 13%를 넘어 섰다. 그런 대우가 세계경영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부실이 쌓여 금융위기를 당했는데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확장 경영을 하다가 시장의 신뢰를 잃고 망했다는 것이 그동안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보다 긴 안목으로 재평가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경제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정부는 ‘IMF 구제금융 사상 가장 성공적인 회생을 했다는 치적治績을 내세웠다. 한국경제에 원래 구조적인 문제가 심각했는데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한 결과, 한국경제의 체질이 개선됐고 외국인투자자들의 신뢰도가 높아져서 금융위기를 빨리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난 15년간 한국경제의 정사正史로 굳어져왔다. 그동안 이와 정반대의 야사野史를 써온 저자는 여기에 반론을 제기한다. “금융위기가 온 데에는 한국경제가 일부 잘못한 것도 있지만 국제금융시장이 근본적으로 불안정했던 것에 큰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경제는 IMF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회복됐다라고 주장해왔다. 한국이 다른 금융위기국들보다 빨리 회복한 것은 IMF프로그램 때문이 아니라, 원래 투자도 많이 해놓고 성장률도 높았던 건강체질이었기 때문이다.”(25) 대우 해체에 관해서는 그동안 무수한 언론보도와 후속 연구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당사자인 김우중 회장이 그 과정에 대해 직접 공개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김 회장과 DJ 정부 신흥관료들은 애초부터 한국 금융위기의 원인과 극복 방안에서 커다란 시각차를 보였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한국 재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었던 김 회장은 ‘IMF플러스라고 불릴 정도로 IMF가 실제로 요구한 것보다도 더 강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충실히 집행하려고 하는 정부측 경제 관료들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결국 수출확대를 통한 IMF체제 극복론구조조정을 통한 금융위기 극복론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정부는 대우가 신흥시장에서 적극적으로 벌인 자동차 투자를 부실로 판단하고 유동성을 지원해 살리기보다 대우그룹을 해체시키는 길을 택했다. 1999년 대우는 IMF에서 제시한 처방전을 따르지 않고 구조조정을 가장 등한시한 재벌로 몰리면서 유동성 위기에 처하고 그룹이 공중 분해되는 비운을 맞았다. 김우중 회장은 한국 최대의 부실 기업인으로 낙인찍혔다. 그 뒤 2006년에 법원은 정처 없이 해외에서 떠돌다 6년 만에 귀국한 김우중 회장에게 징역 10년과 추징금 214000억 원을 선고한다. 대우 해체는 당시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파산으로 기록됐다. 반면에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의 와중에 도산 위기를 맞은 세계 자동차회사인 제너럴모터스(GM)2009년 미국 정부가 인수하고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함으로써 불과 4년 만에 회생한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후에는 정부가 나서서 대우차를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으로 GM에 넘겼다. 덕분에 GM은 대우가 개발한 소형차를 앞세워 중국이라는 거대 신흥시장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죽쒀서 개준격이 된 셈이다.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김우중과의 대화는 여러모로 독특한 책이다. 대우라는 한 그룹의 흥망사와 IMF터널을 뚫고 지나온 과거사실을 흥미롭게 전하면서 한국 현대경제사에 대한 재해석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과거자료를 뒤적이고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가며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기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김우중 회장은 대북특사 자격으로 김일성, 김정일과만 스무 차례 이상 직접 만났다. 책에는 김 회장이 남북문제에 대해 깊숙이 간여하며 막후 접촉활동을 한 뒷이야기 등 다른데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밖에도 리비아 진출에 성공한 이야기, 삼성과의 자동차 빅딜, GM을 꺽고 폴란드 자동차회사 FSO를 전격적으로 인수하여 전 세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일 등 대우의 수많은 경영일화가 등장한다. 이 책은 역사의 교훈을 통해 한국의 기업과 기업인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국가공동체 속에서 기업과 기업인들이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한국경제는 어떻게 가야 할지 등 한국사회에 던지는 충심어린 조언을 담고 있다. 기업인들에게는 단순한 기업경영을 넘어 정치경제학, 정치경영학의 참고서로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김 회장은 2012년부터 베트남 하노이에서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s)과정을 운영하며 한국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노회장의 경륜과 젊음의 패기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또다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기대를 하게 만든다. IMF사태와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하여 균형적인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중앙일보 기자 4명이 함께 쓴 DJ정권 5년의 경제실록인금고가 비었습디다(김수길 외, 중앙M&B, 2003)를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 5년의 경제사를 복원한 책으로, IMF 당시 상황과 대우 해체와 관련된 자료를 접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품절되어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도서관에 가야 볼 수 있다. 서초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는 ‘320.911-3-40’이다.(기획회의 401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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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 노래하다 - 노래로 쓰는 인생필사
김현성 엮음 / 뉴휴먼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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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인생을 쓰다

 

Pen으로 노래하다

김현성 엮음, 뉴휴먼, 2015

 

Pen으로 노래하다는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 중에서 필사하기 좋은 아름다운 노랫말을 가려 뽑은 책이다. 가수보다도 가객歌客이라는 독특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가수 겸 작사작곡가 김현성이 엮었다. 가객은 노래를 잘 짓거나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말처럼 엮은이는 세 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이등병의 편지> <가을 우체국 앞에서>와 같은 주옥같은 노래들을 작사작곡한 장본인이다. 엮은이만 있고 지은이는 없는 책이다. 물론 책에 실린 노래들의 작사자가 지은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은이가 더 있다. 바로 이 노래들을 듣고 부르고 사랑했던 우리 모두가 이 책의 지은이다. 우리가 이 책을 애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책장을 넘기니 정감어린 손글씨로 쓴 프롤로그의 한 대목이 눈을 붙든다. “디지털 기기들에게 내어준 눈과 손에게 제자리를 찾아주자. 그대의 마음을 손끝에 모으라. 어린 시절 연필을 깍는 마음이 되자.” 이 책의 성격을 한눈에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제껏 노랫말은 그저 노래에 딸린 일부분이고, 필사는 시나 소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노랫말만을 따로 모아 놓고 보니 노래(가사)가 곧 시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야말로 모래사장 속에 감추어져있던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다. 거개가 낯익은 노래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사만 뚝 떼어놓고 보니 정말 우리가 그토록 불러제켰던 노래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느낌이 새롭다. 아름다운 노랫말을 뽑는 심사위원들은 일을 덜었다. 책에 실린 72편의 노래가사에서 고르면 모르긴 몰라도 크게 벗어나진 않을 듯하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양희은, 한계령)

 

책은 크게 초등학교 동창회 가던날’ ‘그것이 젊음’ ‘브라보 마이 라이프’ ‘꽃들이 피고 지는 게 우리의 모습 이었어라는 4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초등학생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의 희노애락과 정서를 담은 노래가사가 각자의 자리를 찾아 들어 앉아 있다. 이 책은 노래로 쓰는 인생필사라는 특이한 부제가 달린 책이다. 그냥 필사가 아니고 인생에 방점을 찍은 책이다. 필사필사必死筆寫(필사적으로 필사해라, 그래야 글을 잘 쓴다!)류의 책이 아니다. 오히려 낭만필사쯤이 어울리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끼적일 때마다 노래와 함께 웃고 울며 술 마시고 떠들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책장을 넘기다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에 눈이 멈췄다. 젊은 시절 참 좋아했던 노래다. 3학년 때는 3학년이라 좋아했는데, 5학년이 되고 나니 더 애틋하다. 누구한테 받은 선물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만년필을 오랜만에 서랍에서 꺼내 잉크를 가득 채우고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써본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김광석, 서른즈음에)

 

9월과 10월은 밤과 새벽이 점차 가까워져 가는 때이다. 우리가 떠나보내지 않아도 빨리 가고, 떠나오고 싶지 않은데 자꾸 등을 떠민다. Pen으로 노래하다는 그래서 노래를 부르고 싶고, 노래를 듣고 싶은 이 계절에 마주하기에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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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숙 작품집 지만지 고전선집 549
한무숙 지음, 김진희 엮음 / 지만지고전천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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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화양연화

 

한무숙 작품집 - 유수암

한무숙 지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올 여름은 유난히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주말마다 더위를 피해 집에서 가까운 숲속으로 피서避暑를 가면서도 피서避書까지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매번 책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때 읽은 책 중 하나가 한무숙 작품집이다. 한무숙(19181993)은 전통적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규수작가로 알려져 있다. 1948년에 국제신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는 흐른다>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뒤 1957년에 단편 <감정이 있는 심연>으로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과 한국여류문학인회 중앙위원 등을 맡는 등 여성문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한무숙 작품집에는 여성 삶에 대한 통찰과 자아 정체성, 그리고 성과 사랑의 문제 등이 배면에 흐르는 5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한편 한편이 고르게 빼어나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유수암>이라는 작품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진경이라는 이름의 늙은 기생의 일생을 통해 사랑과 욕망에 대한 회한을 보여주는 한편, 홍화와 산월이 등 주변인물의 삶을 대비시켜 여성의 성과 사랑이 갖는 서러움과 애연함을 드러내고 있는 중편 소설이다.

 

1963년에 쓰여진 <유수암>은 서울의 한적한 동네에 있는 유수암流水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언뜻 둘 다 암자 같지만 같은 골짜기에 있는 청수암淸水庵이 실제로 부처님을 모신 암자이고, 유수암은 화류가花柳家, 즉 고급 요정이다. 이름처럼 이 두 곳으로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맑은 물소리와 솔바람소리가 들린다. 거기다 맑고 고아한 독경讀經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가 섞여 제법 유수幽邃한 풍취가 감도는 곳이다. 그러나 유수암에 불빛이 꺼진 후로는 자연 찾아오던 사람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다.

 

가믈가믈 들리는 독경 소리는 누구의 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인지, 숭불崇佛의 경건함보다, 애애하고 곱기만 하여 오히려 서글프다. 맑은 음성이 매그러지듯, 구비 치듯, 오르락내리며 짓는 억양에는 기원보다 절원切願이 느껴졌다. 연련하고 애틋하여, 색정조차 느끼게 하도록 음색에는 윤이 흐른다. (한무숙, <유수암>, 116)

 

사만 평이 넘는 넓은 산장에 퍼져있는 크고 작은 집들 중에서 가장 수수하고 작은 집이 유수암의 안주인 진경이 머무는 곳이다. 기와는 얹었으나 촌가의 모습 그대로다. 독경 소리는 그곳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늙은 기생 진경은 이곳에서 친구이자 같은 노유장화路柳墻花 처지인 홍화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저녁이면 유수암 마당이 크고 작은 승용차로 뒤덮였었지만 지금은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끈끈하게 비린 육취肉臭와 함께 현악絃樂과 환락歡樂에 취한 소리가 끊긴 지 삼 년이 지났다. 젊고 애애한 시절도 있었건만 지금은 짙은 화장으로도 이미 오십에 손이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 무릎을 세우고 교태 어린 앉음새로 화투짝을 떼느라 숙여진 머리의 정수리가 엷은데다 흰 것도 더러 섞여있는 것이 보인다. 홍화가 아리랑 담배 한 가치를 빼어 물고 두 어 모금을 빨며 화투짝을 끌어 모으며 입에 배인 잡가雜歌를 콧소리를 섞어 흥얼거린다.

 

못 살 것만 같더라.

죽을 것만 같더라.

정든 님 이별하고

못 살 것만 같더라.” (한무숙, <유수암>, 119)

 

무던히도 늙은 얼굴이 거기 있다. 거적 말아버려도 썩지 못할 한이 어린 얼굴이다. 노추老醜가 화류항에서 늙는 얼굴에는 유달리 두드러지는 것인가? 그것은 노추를 더욱 발겨 내면서 이미 여인의 한계를 넘고 있는 얼굴이었다.

 

한무숙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은 대개 근대의 개인주의와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사랑에 대한 환상과 허위의식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유수암> 역시 낭만적 사랑과 허위의식이 성에 대한 운명론적 긍정과 엇갈리며 표현되어 있다. 기생이 되는 이유가 대개는 가난때문이다. 간혹 유혹에 끌려드는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바닥에 깔린 것은 역시 원수 같은 가난이다. 진경과 홍화도 마찬가지다. 진경은 조촐한 물주가게를 하던 아버지가 진경이 열여섯 살 때 갑자기 죽는 바람에 가계가 어려워지면서 급기야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뒤 30여년을 꺾이는 꽃의 신산한 삶을 살았다. 화류 인생에서는 정든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역경을 기생이 먼저 안다. 얽혀드는 의리가 까닭일 때도 있고, 무정한 남자의 변심과 속 얕은 여자의 변심이 사이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진경은 기생의 신분으로 수많은 남자를 만나고 떠나보내면서도 자신이 한 번도 버림을 받은 일이 없다고 자부해 왔다. 기생노릇은 할망정 끈적끈적 눌어붙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하여, 그의 정분은 언제나 선명한 막이 내리듯 끝났다.

 

의차피 귀밑머리 마주 푼 사이가 아닌데, 파뿌리 되도록 같이 늙자는 건 아녜요. 가정으루 돌아가세요. 기생과는 외입하는 거지 항아릴 빚는 건 아니거든요. 당신의 가정이라는 항아리는, 나 때문에 금갔지만, 테 메우듯 메우면 그릇 구실은 할게외다.” (한무숙, <유수암>, 125)

 

진경의 사랑이 한 막을 내릴때마다 또 진경이가 사내를 차버렸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경 역시 회한을 가슴속에 품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의식은 스스로를 소외와 고독에 빠뜨리는 것은 물론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것을 가로 막곤 한다. 사노라면 피를 가진 인간이라 병이 생긴다. 기생의 병은 정분나는 것(진심으로 연정을 느낀다는 화류계의 술어)’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끝장이 오고, 기생은 아픔 하나와 남자 다루는 솜씨 하나를 더 얻고 다시 웃음을 팔아야 한다. 영리한데다 여느 기생과 달리 교육도 받을 만큼 받아 지식과 교양도 높았지만 진경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스물 한 살의 젊은 여인이던 시절에 일본의 인류 대학에 유학하며 고등 문과 시험을 패스한 남자에게 첫 정분을 잃고 그 비련 끝에 죽으려고 약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진경의 길고도 질긴 연분은 따로 있었다. 유명 정치인인 정진수와의 꿈같은 7년이 그것이다. 그의 승용차가 어엿하게 유수암 앞마당 느티나무 밑에서 밤이슬을 맞고, 정계의 요인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유수암을 들락거렸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더니 4.19 혁명으로 정진수가 투옥되었고 진경은 그를 잊지 못하고 정진수가 풀려나기만을 기다리며 유수암을 지켰다. 그러던 그가 1년 전에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온 것을 알았지만 정진수는 여태 진경을 찾아오지 않고 있다. 진경이 갖고 있는 남모를 애달픔은 그것만이 아니다. 죽자 사자 한 사람의 씨는 받지 못하고, 싫은 사람의 아이를 갖는 것도 기생의 업인가. 아니면 아무 남자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체의 슬픈 약속인가. 진경은 한때의 어리석은 인연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스물여섯살 때, 피치 못할 의리로 싫어하면서도 잠시 가까이 한 남자의 씨였다. 몸을 풀자 다시 밤이면 분세수하고 요정에 나가야 하는 어미에게 아기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그런 마음에 모성이 자리 잡을 틈이 생기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기생의 몸으로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는 생각에 일치감치 아이 없는 언니에게 보내 남몰래 키우게 했던 것이다. 줄곧 아이의 양육비와 교육비를 보내주었다고는 하나 그건 책임이 아니고 방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아들이 어느새 스물세 살 청년으로 자라 군에 입대하는 전날 생모인 진경을 찾아온 것이다. 진경은 비로서 왈칵 부끄러움이 솟고, 참괴慙愧로 가슴이 쓰렸다. 그러나 낳으면서 모성일 수 없었던 삶이, 생각한 것보다 이내 덜 부끄러운 것이 스스로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십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아들은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묘한 말을 하며 한 번도 어머니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두 번째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며 문이 너무 삐걱거리는군요. 이담에 와선 고쳐드리겠어요.”하며 아들은 그때서야 조금은 살갑게 진경을 대하는 듯 했다. 그러나 진경은 도로 자리에 누우며 자꾸만 솟구쳐 오르는 착잡한 눈물을 어찌하지 못한다. 전날 밤 잠 못 들며 생각으로 밝힌 사람은 아들이 아니고 정진수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성과 사랑으로부터 오는 생명감과 환희에 대해서도 긍정어린 시선을 보낸다. 손자를 안을 나이에 자나 깨나 사랑 타령하는 친구 홍화가 그렇다. 부처님 모시고 보살로 살겠다며 입산했다가 다시 내려와서는 기껏 열세 살이나 손아래인 기둥서방을 만나는 바람에 딸 같은 본처에게 알망신을 당하는 홍화를 진경은 대놓고 나무라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가장 허무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을, 오직 육체로만 확인하려 하는 그의 추행은, 오히려 여심女心의 극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사랑 노래를 들으며, 경은 관음경보다도 더 절절한 기원을 가려들었다. 가여운 중생-지나고 보니 살았다는 실감조차도 엷어졌지만, 이 친구에게 끌리어 헛딛게 된 자기 삶도, 생각하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 (한무숙, <유수암>, 132)

홀로 된 외로움이 육체에까지 사무치는 진경은 방 안을 둘러보다가 옛 연인이 두고 간 아프리카 토우를 바라보며 그 육체에 새겨진 관능성과 생명감을 기억하려 애쓴다. 거기에는 원시인의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는 동시에, 불가해한 것에 대한 불안도 꾸밈새 없이 나타나 있다. 소설 속에서 여성성을 잃어가며 점점 늙어가는 여인이 가까스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애달파하는 모습은 성과 그에 대한 욕망이 인간에게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요정과 기생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을 읽다보니 불현 듯 40년도 더 지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충남 공주의 한 읍 소재지이다. 국민학교(그때는 초등학교를 그런 이상한 이름으로 불렀다) 들어가기 직전이었으니까 일곱 살쯤 되었을 때다. 우리집은해동여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던 요릿집과 담장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우리집과 해동여관이 자리잡은 좁은 골목이 우리들 놀이터였다. 넓은 학교 운동장은 대개는 덩치 큰 형들 차지라 우리 조무래기들은 그 골목에서 공을 차며 놀곤 했다. 그곳에는 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행사 때면 귀빈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가 상장과 부상을 수여하시는 높은 분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찬 공이 그만 그곳 담장을 넘어갔다. 방향을 가늠해보니 다행히 안채가 아닌 뒤뜰 쪽이었다. 누군가 담을 넘어가서 공을 찾아와야 했다. 설사 걸린다 해도 이웃인 내가 낫지 않겠냐며 애들이 내 등을 밀었다. 할 수 없이 발밑에 납작 엎드린 한 아이의 등을 밟고 담장을 넘었다. 지금처럼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라 뜰에는 나리꽃, 목백일홍, 호박꽃, 무궁화 같은 꽃들이 우거져서 좀처럼 공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저쪽 마루 끝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분홍빛 한복을 위아래로 곱게 차려입은 스무 살 후반쯤으로 보이는 누나뻘 되는 여자들 몇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 여자의 고무신 발밑으로 우리가 갖고 놀던 축구공이 보였다. 내게 나이와 이름 등 이것저것을 물으며 까르르 웃어대는 그녀들한테서는 엄마나 동네 아줌마들한테는 맡지 못했던 화장품 냄새와 향수 향기가 훅 하고 끼쳐왔다. 순간 취할 듯 아득해졌다. 공을 갖고 있던 여자가 공을 건네주며 자기가 먹고 있던 양갱과 약식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주인아줌마한테 들키면 경을 칠테니 조심해서 나가라며 친절하게도 바깥으로 나가는 숨은 샛길을 알려주었다. 골목에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아이들 앞에 축구공은 물론 먹을 것까지 얻어서 나타난 나는 졸지에 영웅이 되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가끔씩 밤늦은 시간에 담 너머에서 장구나 가야금 소리에 맞춰 들려오던 알 수 없는 노래 소리와 높은 웃음소리의 정체를 얼핏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젊었던 진경과 홍화가 춤추고 노래하던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골목에서 공을 찰 때면 담장 너머로 공을 넘기기 위해 그 누구보다 힘껏 공을 차곤 했지만 어린 아이가 차는 공이 다시 담장을 넘어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좁은 골목에서 노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어른들의 꾸지람이 이어지자 우리는 학교운동장으로 옮겨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그때부터 공차는 게 시들해졌다.

 

한무숙 소설의 주인공들은 현실에 패배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삶에 절망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선택하며 나아간다. <유수암>의 주인공 진경은 흐르는 물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면서 자신의 현실을 반추한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지나간 사랑을 붙들며 살았던 진경은 비로서 사랑은 이미 떠났고 자신은 늙어가고 있다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경의 눈은 저기 못 박혀 있었던 것이다. “저것 보세요. 언니. 저 물가의 버들이 시들었지요? 물은 변함없이 흐르구 있는데. 허지만 예전 흐르던 그 물이 아니군요. 그러면서 언제나 여긴 물이군요. 언제나 같은 물이군요. 언제나 시시로 새로우면서. 이 물같이 모두들 가버리구, 또 모두들 있군요. 다만 버들만 시들구. 나만 시들구.” (한무숙, <유수암>, 188)

 

그러나 체념과 단념은 다르다. 오히려 그녀는 그러는 동안에 부재의 의미를 뼈저리게 터득한다. 부재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충실하고 뿌리 깊은 현존이라는 것을 진경은 실감으로 터득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 익숙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진경은 절감한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화양연화花樣年華를 기억하기 마련이다. 인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한들 기억의 빛이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힘든 순간이 찾아올수록 그 장면은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 온 몸을 감싼다. <유수암>의 결말에서 홍화는 애애한 목소리로 태평가를 뽑는다. 마치 그 노래를 통해 자신들의 화양연화를 애써 기억하려 하는 듯이 말이다. 두 여자가 믿고 의지하는 현 박사가 유수암에 왔을 때, 마지막까지 유수암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탁 주사가 현 박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인들이 수각에서 놀구 있지요. 놀게 해주어야죠.” 어쩐지 애닮고 쓸쓸하게 들리는 말이다. <유수암>은 여성 정체성의 탐구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탐색과 존재의 자기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더위를 피해서 이 소설을 읽던 곳이 북한산 줄기의 한자락이어서 그런지, 거기서 얼마큼을 더 들어가면 실제로 유수암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어디선가 유장悠長한 태평가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해서 한참동안 귀를 기울였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 (2015 한무숙문학관 리뷰대회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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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大전환, 한국의 大기회
전병서 지음 / 참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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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편승하라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

전병서 지음, 참돌, 2015

 

 

비행기 타는 시간으로 보면 불타는 금요일에 차가 막힐 때 여의도에서 분당 가는 것 보다 가까운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개방 30년 만에 수출 세계 1, 외환보유고 세계 1, GDP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지난 금융위기를 계기로 당당하게 미국과 맞짱을 뜨는 G2로 부상했다. 2022년이면 달러로 환산한 GDP에서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런 중국과 담 하나를 마주하고 2000년간 치고받으며 살아왔다. 문제는 이웃집이 마음에 안 들면 이사 가면 그만이지만 이웃 국가는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필연적인 환경이다. 중국은 무척 복잡한 나라이고 누구도 중국의 현상과 미래를 한마디로 정의하거나 예측하지 못한다. 중국을 둘러싼 정치환경, 사회변화, 경제지표가 어디로 어떻게 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중국에 대한 위기론, 붕괴론, 역할론, 패권론이 들끓지만 붕괴론이나 위기론 지지자들은 지난 10년간 모두 틀렸고 역할론, 패권론 지지자도 확신을 못 한다.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는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이 중국의 급성장 비결과 중국 경제의 현주소를 파헤치고 대중국 전략에 대한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국내 유수의 증권회사에서 애널리스트와 IB(투자은행) 뱅커로 25년간 근무했고, 한국 최초로 중국기업 한국 상장 업무를 시작하는 등 중국 자본시장 분야에 관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의 부상을 실감하고 불혹이 넘은 나이에 중국 공부를 시작해 칭화대학과 푸단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상하이 한화투자 고문과 상하이 차이나데스크 자문위원을 지냈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대중 교역규모가 미국 및 일본과의 교역을 합친 것보다 많을 정도로 중국 의존도가 심하다. 한국의 대중수출 비중이 이미 30퍼센트를 넘었고, 한국 전체 무역흑자의 1.7배나 되는 807억 달러를 중국에서 번다. 거기다 한류 열풍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는 요우커(중국인 관광객)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2014년에는 이미 600만 명을 넘어섰다. 또 지난 금융위기 이후 5년간 IT와 자동차 부문에서 중국이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이 되는 바람에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성장하는 어부지리를 누렸다. 그런데 시진핑-리커창 정부가 들어서며 중국이 달라지고 있다. 성장률에 목숨 걸지 않고 무리한 목표관리보다는 구간관리로 돌아섰다. 올해 중국경제 성장목표는 7퍼센트 내외이다. 이는 결코 낮은 성장이 아니다. 7년 이내에 미국을 제칠 수 있는 무서운 성장률이다. 중국은 이미 제조대국에서 서비스대국으로 탈바꿈하고 있고, 투자에서 소비로, 수출에서 내수로 정책기조를 바꾸었다. 이런 중국의 변화에 한국의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제조대국 중국에 중간재를 팔아 호황을 누렸던 한국의 전통 제조업이 중국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흔들리고 있다. 한국의 차이나 리스크의 본질은 중국의 성장 둔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중간재 수출 비중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 한국 대중수출의 74퍼센트가 중간재다. 중간재를 줄이고 소비재 수출 비중을 늘리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한국이 미래의 먹거리로 선정한 국가 전략기술 10개 분야 120개 중에서 한국이 세계 1등인 것이 하나도 없다. 1등 기술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중국의 기술 추격이 더 무섭다. 반도체와 LCD 정도를 빼고는 한국이 지금 중국보다 앞선 것이 별로 없다. 금융이 유일하게 중국에 10년 이상 앞선 산업이다. 우리가 아직 금융 분야에 경쟁우위가 있는 지금이 기회다. 중국의 금융시스템이 자리를 잡기 전에 중국의 금융시장과 투자시장을 선점하여 중국 제조업에 미리 투자해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훗날 우리 제조업이 중국에 추월당하더라도 중국 기업들로부터 이자와 배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당장 한국의 대중국 펀드투자 방향부터 제대로 잡아야 한다. 201411월부터 한국의 개인투자가도 중국 본토의 잘나가는 기업에 직접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후강퉁(상하이와 홍콩증시 간 교차매매)에 이어 201510월께 도입될 예정인 선강퉁(선전증시와 홍콩증시간 교차매매) 제도가 그것이다.

 

2015년 중국관련 뉴스 중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연말 출범을 목표로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관련 소식이다. AIIB는 미국이 쥐락펴락하는 기존 국제 금융질서에 중국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다. 창립회원국은 한국을 포함한 57개국, 수권자본금은 1000억 달러로, 아직은 기대 반, 우려 반인 게 사실이지만 IMFWB를 두 축으로 한 국제 경제 질서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는 셈이다. 중국은 AIIB를 발판 삼아 글로벌 경제의 강자로 나서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물류, 통신, 에너지망을 중국 내륙과 연결하는 400억 달러 규모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 해상 실크로드)사업AIIB를 통한 첫 번째 초대형 프로젝트이다.

 

한국은 이미 1년 반 동안 진행된 일대일로에 관심도 없다가, 갑자기 AIIB를 계기로 온 언론이 일대일로와 AIIB로 도배를 하고 있다. 이러니 판판이 중국에 당한다. 이미 57개 나라가 조인을 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초대형 건설공사 프로젝트이자 새로운 아시아에서 중국식 경제 패권의 새 패러다임에 한국이 이렇게 무심해도 중국이 재편하는 무대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206)

 

늘 그렇듯이 한국은 이번에도 또 뒷북을 쳤다. 영국보다 먼저 AIIB가입 결정이 이루어졌으면 중국에 땡스콜을 받았겠지만 이젠 아니다. 중국의 지금 태도는 올 테면 오고 말라면 말라는 식이다. 돈 앞에는 의리도, 체면도, 자존심도 없다. G2로 부상한 중국의 돈 폭탄에 세계 각국은 미국을 버리고 중국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있다. 영국은 300억 달러의 현금 가방을 들고 방문한 중국 총리를 영국 여왕까지 나서서 비위를 맞추었다. 그것도 모자라 중국이 주도하는 AIIB에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미국 눈치 보는 와중에 놀랍게도 영국이 깃대 잡고 일착으로 가입했다. 미국의 외삼촌격인 엉클 영국이 미국을 버리고 중국에 붙자 독일, 이탈리아가 얼씨구나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경제 불황에 허덕이는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2014년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시진핑 주석을 앵발리드 광장 환영식과 엘리제궁 만찬으로 대대적으로 환대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프랑스의 자랑인 에어버스 여객기 160대를 중국이 구매할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중국 돈의 외출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은 이른바 중화의 문화적 자신감을 빠르게 되찾고 있다. 공식 해외문화기관으로 공자학원을 미국 90개를 비롯해 지구촌 전체에 거의 프랜차이즈 수준으로 480개나 설립했다. 치명적인 재난이나 전쟁만 없으면 중국은 향후 짧으면 10, 길면 20년 이내에 미국을 추월하고 명실상부 ‘G1’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전에는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화두였다면 이제는 중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저자는 정미경중政美經中이 답이라고 말한다. 정치와 안보는 미국에 편승하고 경제는 중국과 제대로 협력하는 것이 한국이 살 길이라는 뜻이다. 특히 아시아는 미국의 독주 시대에서 중국과 미국의 양강兩强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금 아시아에서는 미국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 60년간 한국은 미국형 인재와 일본형 인재만 길렀지 중국형 인재에는 무관심 했다. 그나마 최근에는 중국을 안다는 사람이 많은 듯 보여도 중국을 정말 잘 아는 중국통은 절대 부족하다. 무늬만 중국통인 짝퉁이 많다. 중국의 ‘China-MBA’들이 필요한데 중문학 전공자들이 대거 주재원으로 나가있다. 중국어의 나라에서 중문과 출신만 보내면 승부는 뻔하다. 중문과 출신이 아닌 중국어가 능통한 상대 출신으로 전사를 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의 미래를 연구할 국가급 중국 연구소가 필요하다.

 

이 책은 중국경제와 금융을 오랫동안 연구한 저자의 전문성에 현지에서 쌓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길어 올린 생생한 사례와 역사지식이 보태져 탄탄한 내공이 돋보인다. 중국경제와 금융을 폭넓게 다루면서도 포커스는 한국의 전략에 맞춰져 있다. 저자는 한국의 부와 미래는 중국에 달려 있고, 향후 1020년 안에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완벽히 부상하기 전에 생존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6가지 주제로 본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중국’ ‘중국의 대기회’ ‘한국의 대위험등 눈길을 잡아끄는 제목들이 책장을 넘기는 손놀림을 바쁘게 만든다. 지나친 동어반복이 눈에 띄지만 급박하고 긴요한 내용을 가장 현재적인 내용으로 전하고자 하는 저자의 절박함이 반영된 결과라고 이해하며 읽으면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이 책의 메시지는 단호하다. "리커노믹스 2.0, AIIB, 일대일로까지 세계경제가 중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바로 지금이 중국의 부상에 편승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 (기획회의 3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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