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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간만에 진화론 관련 책을 선택하였다. 2009년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150주년에 맞춰 여러 언론에서 앞다퉈
내놓은 특별 기사를 통하여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장대익의 [다윈의 식탁]을 계기로
리차드 도킨스, 제러드 다이아몬드, 대니얼 데닛, 스티븐 핑커, 마이클 슈머, 제프리 밀러, 메트 리들리 같은 천재들을
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서재에 이 책들이 꽂혀 있어도 이 책을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읽는 당시에는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 노동이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경험이었던 것 같다.
진화론은 나에게 2가지 단어을 떠오르게 한다. '생존'과 '번식'이며 이 두 단어는 각각 '자연선택'과 '성선택'과 짝을 이룬다.
이분법은 사고의 다양한 발전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복잡한 사고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개체 또는 집단이든 간에 모든 생물은 생존이 본능이며 이는 주위 환경과의 적응에 적합한 형질 또는 형태를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생물은 신화속의 불멸의 존재가 아닌 이상 생명의 빛을 본 그 순간부터
유한의 생명 시계를 안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가 진화의 단위라면 번식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도킨스는 진화의 개체를 서슴없이 유전자, 그것도 자신의 형질을 번식을 통하여 대대로 보전할 수
있는 '이기적 유전자'로 명명한 것이 아닐까?
위 내용은 나의 궤변으로 전혀 과학적인 지식이나 근거에 맞지 않는 나의 느낌을 솔직히 표현한 것이니
부디 무식하다고 욕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물론 이도 쓸데 없는 기우에 틀림 없다. 누가 이런 허잡한
글을 읽어 주기나 한단 말인가? ㅋㅋㅋ
진화론이 매력있는 학문임은 지구상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요 며칠 전에 EBS에서 우연히 이 책의 저자인 최 재천 교수님을 강의를 보게 되었는데
가장 인상이 남았던 부분은 인간이 식량 자원 확보를 위해 인위적으로 식용 작물을 집약적인 농장 형태로
농사를 짓게 되면서 병충해 문제가 발생 했는 데 이는 우리 인간 관점에서는 생산성을 저해하는 제거의
대상이나 벌레들의 입장에서는 생존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식물들이 인위적으로
집단 번식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벌레 또는 세균 (박테리아)들도 먹이를 찾아 모이게 된 것이며
생산성이라는 미명하에 유전자 다양성이 줄어 들면서 특정 해충 - 이 표현도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다 - 에
취약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 책 P47의 '도데체 자식을 하루에 하나씩 낳는 동물이 이 세상천지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닭은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괴물'이라는 구절에 압축 되어 있다.
그런데 갑자기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 된 남미/아프리카 지역 에서의 커피, 코스타리카의 바나나 농업이
저렴한 생산 비용으로 서구 본토 시장 요구와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부를 축적한 반면, 정작 식민지 원주민들은
생존에 기본적인 식령마저 역으로 수입에 의존하면서 기아와 가난의 악순환에서 허덕이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극단적인 비약인가?
하지만 어느 책에서도 진화론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이 있으니 바로 '동성애'이다.
내 생각으로 동성애는 생존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며 더군다나 번식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몇 가지 가설들이 존재하나 억지 또는 단순한 가정 수준 이상은 아닌 것 같다.
진화론도 역시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특히 도킨스의 경우)는 '종교'처럼 모든 지구적인 현상을
진화론이라는 하나의 도구로 설명하려는 만용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진화론은 여전이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은 흥미로운 학문이며 인문학과 사회과학과의 지속적인
대화의 문을 열어 놓은 '통섭'의 학문이다.
이 번주에는 서재 구석 먼지 속에 처박혀 있는 진화론 서적들을 들춰보면서 흩어져 있는 퍼즐들을
하나씩 맞춰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