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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ㅣ 밀란 쿤데라 전집 7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 소설의 처음은 수영장에서 시작되어 수영장에서 끝난다. 도입부 수영장에서는 아녜스 – 아니 아녜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매력적인 몸짓의 60대 여성일 수도 있다. – 가 등장하고 마지막 수영장에는 로라가 등장한다. 둘 다 매력적인 몸짓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성으로, 작가는 결말부에 폴의 입을 통해 주저 없이 선언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루이 아라공 ‘미래의 시’ 中)라고. 그에 의하면 “여자만이 그 무엇보다 정당화 하지 못하는 어떤 희망을 간직할 수 있고, 미래로 우리를 초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불멸 = 이상 팽창된 영혼
불멸이란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 날 수 없는 인간의 부질없는 희망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불멸은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혹자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사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 기록하며, 또 혹자는 사랑 – 왜 사랑일까? 사랑은 분노, 경멸, 혐오, 멸시, 증오, 두려움, 공포, 불안, 슬픔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인간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하고 원초적이며 동시에 다른 감정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 을 통해 상대방의 기억 속에 각인됨으로써 시간의 영역을 넘어선다. 사랑의 기억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로라 처럼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면서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남성들을 찾아 헤매던지, 아니면 아녜스 처럼 자살을 통해서 상대방의 기억에 영원한 이미지로써 자신의 불멸을 남기는 방식이다. 그러나 작가는 불멸의 욕망에 사로 잡힌 인간을 “이상 팽창된 영혼’ 이라는 한마디로 일갈 해 버린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불멸이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연기 같은 것으로 순간의 몸짓에 내 전부를 걸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이마골로기(imagology) = 절대적으로 현대적인 된다는 것 = 제 무덤을 파는 자들의 동맹자
이마골로기(imagology)라는 단어가 너무 생소해서 인터넷으로 검색 해 보니 이 단어는 ‘이미지’와 ‘이데올로기’의 합성어로 현대 사회의 정치적인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이 이제는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알려지는가의 문제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매체(물론 여론조사도 포함된다)의 힘이 권력의 한 축을 차지하는 시대를 지칭한다. 즉 ‘내’가 바라보는 ‘나’보다는 ‘남’이 바라보는 ‘내’가 진위 여부를 떠나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이마골로기’ 단어를 저자가 사용하는 이유는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은 제 무덤을 파는 자들의 동맹자가 된다는 것이다”(P231)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지금의 내 존재의 토대가 된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전제 되야 하며 궁극적으로 이는 진정한 ‘나’를 버리고 ‘남’ (사회, 국가든 상관없이)이 보는 ‘나’만을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48년 프라하 ([삶은 다른 곳에]의 야로밀)와 1968년의 프랑스 ([불멸]의 폴)는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야로밀이 그 당시 체코에서 절대적으로 현대적임과 동일어 였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자기 자신을 (‘시’라는 문학) 부정하면서까지 종국에는 파멸에 도달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면, 폴은 프랑스 1968년 5월 혁명의 자기 부정에 적극적으로 동조 하면서 역사를 한낱 역설과 장난의 대상으로만 치부해 버리는 가벼움의 숭배자이다. 혼동하지 말자 폴의 ‘가벼움’이 문제가 아니라 ‘가벼움’ – 그 당시 절대적으로 현대적인 - 에 비판 없이 무임승차 하는 폴이 문제라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의 저자와 역자 두 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먼저 원작자인 밀란 쿤데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미 5/6일 독서 일기에 할 만큼 했으니 여기서는 최대한 줄여서 말하면, 한마디로 소설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역사 속 실존 인물, 소설 속 가공 인물들이 뒤섞여 있는 서사 구조는 혼란스럽고, 특히 작가가 관계의 당사자로 직접 개입하는 부분은 간신히 풀어 가고 있던 헝클어진 실타래를 다시 꼬이게 한다.
그 다음에 역자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에 - 원작자의 동의 하에 - 짧게 나마 역주를 달아 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나 하는 바램이다. 그냥 모른 척 넘어 갈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이 실존 인물들의 입을 빌리거나, 다른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특히 이마골로기에 영어 표현을 병기하지 않은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뭐 무식하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이 번에도 단순 명료한 리뷰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아직도 정확히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누구는 [불멸]이 밀란 쿤데라의 최고의 소설이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최악은 아니더라도 – 왜냐하면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있으니까 더 두고 볼일이다 – 최선은 아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