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느림]이다. 뭐 시작은 했지만 영 신통치 않다. 갈수록 느낌이 오질 않는다.

 

첫째, 유럽의 역사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어려운 걸 떠나서 공감이 어렵다.

둘째, 작가가 목에 힘을 좀 빼야 싶지 않나 싶다. 물론 이 역시 나의 자질 부족이다.

 

하지만 2013년간 완간 예정이라는 그의 전집에서 - 지금까지 한 6-7권 정도를 읽은 것 같다 -

역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최고다. 물론 나의 대학 새내기 시절의 기억의 흔적에

기대고 있음에 애당초 객관적인 관점은 기대하지 말자. 

 

이 책을 마지막으로 길었던 - 물론 내 게으름으로 - 소설과의 만남에 잠시 쉼표를 남긴다.

주말부터는 'How To Read' 시리즈 16권 세트이다. 서재에 자리가 없어 책상 밑에서 박스에 감금(?)되어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낸 책들에게 꼭 햇빛을 보여 주리라 다짐해 본다. 기대되는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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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밀란 쿤데라 전집 7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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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 소설의 처음은 수영장에서 시작되어 수영장에서 끝난다. 도입부 수영장에서는 아녜스 아니 아녜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매력적인 몸짓의 60대 여성일 수도 있다. – 가 등장하고 마지막 수영장에는 로라가 등장한다. 둘 다 매력적인 몸짓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성으로, 작가는 결말부에 폴의 입을 통해 주저 없이 선언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루이 아라공 미래의 시)라고. 그에 의하면 여자만이 그 무엇보다 정당화 하지 못하는 어떤 희망을 간직할 수 있고, 미래로 우리를 초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불멸 = 이상 팽창된 영혼

불멸이란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 날 수 없는 인간의 부질없는 희망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불멸은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혹자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사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 기록하며, 또 혹자는 사랑 왜 사랑일까? 사랑은 분노, 경멸, 혐오, 멸시, 증오, 두려움, 공포, 불안, 슬픔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인간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하고 원초적이며 동시에 다른 감정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을 통해 상대방의 기억 속에 각인됨으로써 시간의 영역을 넘어선다. 사랑의 기억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로라 처럼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면서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남성들을 찾아 헤매던지, 아니면 아녜스 처럼 자살을 통해서 상대방의 기억에 영원한 이미지로써 자신의 불멸을 남기는 방식이다. 그러나 작가는 불멸의 욕망에 사로 잡힌 인간을 이상 팽창된 영혼이라는 한마디로 일갈 해 버린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불멸이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연기 같은 것으로 순간의 몸짓에 내 전부를 걸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이마골로기(imagology) = 절대적으로 현대적인 된다는 것 = 제 무덤을 파는 자들의 동맹자

이마골로기(imagology)라는 단어가 너무 생소해서 인터넷으로 검색 해 보니 이 단어는 이미지이데올로기의 합성어로 현대 사회의 정치적인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이 이제는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알려지는가의 문제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매체(물론 여론조사도 포함된다)의 힘이 권력의 한 축을 차지하는 시대를 지칭한다. 가 바라보는 보다는 이 바라보는 가 진위 여부를 떠나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이마골로기단어를 저자가 사용하는 이유는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은 제 무덤을 파는 자들의 동맹자가 된다는 것이다”(P231)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지금의 내 존재의 토대가 된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전제 되야 하며 궁극적으로 이는 진정한 를 버리고 ’ (사회, 국가든 상관없이)이 보는 만을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48년 프라하 ([삶은 다른 곳에]의 야로밀) 1968년의 프랑스 ([불멸]의 폴)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야로밀이 그 당시 체코에서 절대적으로 현대적임과 동일어 였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자기 자신을 (‘라는 문학) 부정하면서까지 종국에는 파멸에 도달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면, 폴은 프랑스 19685월 혁명의 자기 부정에 적극적으로 동조 하면서 역사를 한낱 역설과 장난의 대상으로만 치부해 버리는 가벼움의 숭배자이다. 혼동하지 말자 폴의 가벼움이 문제가 아니라 가벼움’ – 그 당시 절대적으로 현대적인 - 에 비판 없이 무임승차 하는 폴이 문제라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의 저자와 역자 두 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먼저 원작자인 밀란 쿤데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미 5/6일 독서 일기에 할 만큼 했으니 여기서는 최대한 줄여서 말하면, 한마디로 소설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역사 속 실존 인물, 소설 속 가공 인물들이 뒤섞여 있는 서사 구조는 혼란스럽고, 특히 작가가 관계의 당사자로 직접 개입하는 부분은 간신히 풀어 가고 있던 헝클어진 실타래를 다시 꼬이게 한다.

 

그 다음에 역자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에 - 원작자의 동의 하에 - 짧게 나마 역주를 달아 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나 하는 바램이다. 그냥 모른 척 넘어 갈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이 실존 인물들의 입을 빌리거나, 다른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특히 이마골로기에 영어 표현을 병기하지 않은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뭐 무식하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이 번에도 단순 명료한 리뷰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아직도 정확히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누구는 [불멸]이 밀란 쿤데라의 최고의 소설이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최악은 아니더라도 왜냐하면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있으니까 더 두고 볼일이다 최선은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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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불멸] 을 어렵게 다 읽었다.

 

밀란 쿤데라의 책들 중에 제일 재미없고 어려웠다. 전집 출간 이전 구판의 리뷰를 훌터 보면 그의 책 중에 최고라는 찬사가 대부분인데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작품 속 인물과 작가의 만남, 소설 안팎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담한 서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불멸을 향한 인간의 헛된 욕망과 그 불멸로 인해 더욱 깊어지는 고독을 그린다.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직접 자신만의 철학과 소설관을 들려준다."

 

윗 글은 알라딘 책 소개에서 발췌한 것으로 내가 이 소설을 지루하고 재미 없게 읽은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첫째, 뜬금없이 작가가 나와서 작품 속 인물과 소통하는 것이 영 불편하다. 대담한 서술일지는 몰라도 작품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 뜨리고 군더더기로 느껴진다.  

 

둘째, 밀란 쿤데라 소설이 갖는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사유와 철학의 매력이 이 소설에서는 작가의 여과되지 않은 과잉된 의욕으로 인하여 반감되었다. 다시 말해서 작가가 직접 작품에 개입해서 자신의 철학, 인생관, 소설관을 드러내는 것은 독자의 해석의 몫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을 전제 하는 것으로, 이 소설의 경우 그 선을 넘어 선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 수준이면 소설이라기 보다는 비평이나 이론서에 가깝다.  

 

아쉽지만 오랜 만에 만난 밀란 쿤데라는 너무 멀리, 높이 서 있는 꼰대 같았다.     

P.S.: 리뷰는 잛게 해야 할 듯 싶다. 솔직히 기억나는게 별로 없다. 기억으로 남아야 불멸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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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새 밀란 쿤데라 [불멸]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물론 술먹고 머리 싸메고(?) 누워 있던 나날들이 있어 그러 했지만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부터 좀처럼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몇 주 동안 치열하게 국내 소설가들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향연에 빠졌다가 오래만에 번역체를 보니 좀 딱딱하고 건조한 느낌이 들어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전집 완독에 도전하는 나로서는 열심히 읽을 도리밖에 없다. 누군가 왜냐고 묻는다면 뭐 딱히 할말은 없지만 이 책들이 책상에 꽂혀 있는 걸 볼때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하다. 이런 문화적 허영이나 사치는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심하게 욕먹을 짓은 아닌 것 같다.

 

내일 부터는 슬슬 시동을 걸어서 주말에는 꼭 리뷰까지 끝내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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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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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상실과 치유에 대한 희망을 노래 한다. 주인공 김정훈은 아버지, 어머니 (이새인)가 부재하며, 어머니 이새인 에게는 아버지가, 강토형 (희선)에게는 남자 친구 이수형이, 이수형에게는 아버지가 부재한다. 이 소설의 부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을 의미하며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격동의 시기에 행해진 무자비한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자로 서로 연결 되어 있다.

 

작가가 이 세상에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 곧 고통을 읽어내고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원더보이의 존재이다. 하지만 원더보이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 낼 수는 있어도 해석하는 데는 미숙 한 미완의 능력자이나,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아버지의 유산으로서가 아닌 진정한 자신만의 공감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 단계 성숙해진 초능력자가 되었음에 틀림 없다. 그래 우리 모두 원더보이의 공감의 능력을 믿어보자.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더보이의 성장을 기대하는 대목이다.  

 

1960~1980년대 군사 독재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에 파괴되고 해체된 가족사와 연예사에 바치는 헌정시 같은 작품이지만 나는 김연수 소설 중에 제일 공감하지 못한 아쉬움이 짙게 남는 작품이다. 처음에 사고 장면과 권대령이 등장하는 첫 도입부의 정치적 풍자의 강한 분위기가 중반부터 시작하는 원더보이의 고통과 주위 인물의 상실에 대한 진지함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 말이다. 물로 이는 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 있지만 다른 작품보다 집중과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 이었다.

 

하지만 우리 젊은 (사실 난 이제 젊은 축에는 끼지도 못한다. 40이 넘었으니…) 세대는 우리 앞선 세대의 민주화의 희생에 대한 채무의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공짜로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최소한 그들이 경험한 고통과 공포를 공감하도록 하자. 이는 우리 후세대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첫 걸음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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