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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라캉 ㅣ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지젝'의 '라캉'은 거의 포기 수준이다. 처음 리뷰는 정리가 되지 않아서 다 지워 버렸다. 이렇게 하다가는 다음 책을 못 읽을 것 같아서 두서 없이 몇 자 적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자인 지젝에 의하면, 뇌 과학의 발달로 정신 세계가 단순한 호르몬 작용의 결과라는 기계적 사고는 정신 의학적 임상 치료에서도 기존의 대화 치료를 약물 치료로 대체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쾌락을 권유하는 현대 사회는 개인의 성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적 규범이라는 프로이트의 가설은 더 이상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정신 분석학은 회복 불능의 사망 신고가 내려 진 용도 폐기 직전의 가설에 불과 한 것인가? 지젝에 의하면 바로 이 순간 ‘라캉’은 프로이트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분석과 접근으로 불씨가 꺼져가는 정신 분석학에 전도된 가치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이 글에 의하면 지젝의 정신 분석학적 관점은 (솔직히 이 글은 라캉 이론의 요약/개론서가 아닌, 지젝의 라캉 이론에 대한 분석이 지배적이어서 이 둘을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난 이 두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 물론 자랑은 아니다) 신경증이나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들의 궁극적 상징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사고를 구조적인 언어로 독해하고
자 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젝은 라캉의 이론을 다른 텍스트의 분석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정신 분석학 -
물론 프로이트는 저 세상으로 보내 드리자 - 이 여전히 우리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유효 기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물론 라캉의 이론 (물론 지젝의 관점에서)은 대략 난감의 수준을 넘어서 독해 불능 수준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 자체이기 때문에 이론의 실증성은 이미 의미가 없으며, 사용되는 언어 (물론 '상징'이 대부분일 것이다) 들이 어느 정도로 치밀하고 빈틈없이 상호 관련되고 통일되게 구조화 되어 있는지가 이론의 신뢰와 타당성을 담보해 주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라캉의 이론이 난해 하다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어렵다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이 책에서 라캉 이론의 핵심 개념은 ‘대타자’라고 생각하며 대타자는 이데올로기, 신, 민족, 역사, 뭐 이런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라캉이 대타자의 특징을 ‘상호 수동성’ 으로 정의 한 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허울 (=환상)은 제 삼자의 상징으로 도치됨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이제 반복적인 클리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는 라캉의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명제로 간략하게 정의 할 수 있다. 즉 대타자와 직접적인 ‘나’ (실재, 욕망)와의 관계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 하며 이는 환상으로 잠시 봉합되고 억압된다.
라캉 - 물론 지젝의 관점에서- 은 믿음이 지식으로 귀납되는 현실을 비판했는데 융의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신을 알고 있다'라는 관점과 정확히 대척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융의 제자들인 종교 근본주의자 – 기독교는 이슬람이든 상관 없다 – 나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은 자신이 신 (=시장)의 명령과 보호를 받고 있다는 환상으로 신의 대리인양 행세하고 있고 세상은 그 만큼 후퇴하고 고통 받고 있다.
더 이상은 무리다. 난 라캉 – 지젝 이라고 해야 하나? - 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 책을 정리하는 초보적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내 20세기 컴퓨터로도 더 이상은 무리다. 하지만 둘 모두 다시 만나 보고 싶은 아저씨들이니 그들의 다른 책을 뒤져 봐야 할 것 같다.
P.S. How to Read 시리즈 중 프로이트, 융, 라캉까지 3권을 읽었는데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다.
벌써부터 다른 책들, 특히 소설들이 그리워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