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히틀러' 를 읽었다. 라캉을 읽고 나서 다음 책으로 푸코, 데리다, 니체, 비트겐슈타을 읽기에는 잠깐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느꼈다. 책은 역자가 지적 하였듯이 [나의 투쟁]과 [제2권]을 텍스트로 히틀러의 사상을 이해하기 쉽지만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원전 텍스트의 친절한 안내서라는 How to read 시리즈의 의도에 가장 충실한 책이 아닌 가 싶다. 그리고 이는 역자 (안인희)의 군더더기 없는 번역에 크게 기대고 있음에 틀림 없다.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번역이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이 책의 요지는 히틀러의 악행을 그가 '악마'나 '똘아이'  였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연설과 글은 대부분 과격하고 폭력적이고 때로는 조잡하지만 인류사에 전례가 없는 족적을 남긴 정치가 - 간혹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그는 1933년 쿠데타가 아닌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물론 1923년 뮌헨에서 쿠데타 실패로 감옥살이를 했지만 말이다. - 를 단순히 미치광이 취급을 하는 것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독해라는 전제가 이 책의 출발점이다.  

 

자세한 내용은 리뷰를 통하겠지만 이 책은 히틀러와 그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참고로 다음의 책들도 히틀러와 제3제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꼭 한번 읽어 보고 싶은 텍스트들이다. 반값 세일을 기다리는 것은 좀 무리겠지만 좀 가격이 착해지면 지를 예정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by 한나 아렌트

- 나치 시대의 일상사 by 데들레프 포이케르트

-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by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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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지젝'의 '라캉'은 거의 포기 수준이다. 처음 리뷰는 정리가 되지 않아서 다 지워 버렸다. 이렇게 하다가는 다음 책을 못 읽을 것 같아서 두서 없이 몇 자 적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자인 지젝에 의하면, 뇌 과학의 발달로 정신 세계가 단순한 호르몬 작용의 결과라는 기계적 사고는 정신 의학적 임상 치료에서도 기존의 대화 치료를 약물 치료로 대체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쾌락을 권유하는 현대 사회는 개인의 성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적 규범이라는 프로이트의 가설은 더 이상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정신 분석학은 회복 불능의 사망 신고가 내려 진 용도 폐기 직전의 가설에 불과 한 것인가? 지젝에 의하면 바로 이 순간라캉은 프로이트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분석과 접근으로 불씨가 꺼져가는 정신 분석학에 전도된 가치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이 글에 의하면 지젝의 정신 분석학적 관점은 (솔직히 이 글은 라캉 이론의 요약/개론서가 아닌, 지젝의 라캉 이론에 대한 분석이 지배적이어서 이 둘을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난 이 두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 물론 자랑은 아니다) 신경증이나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들의 궁극적 상징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사고를 구조적인 언어로 독해하고

자 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젝은 라캉의 이론을 다른 텍스트의 분석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정신 분석학 -

물론 프로이트는 저 세상으로 보내 드리자 - 이 여전히 우리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유효 기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물론 라캉의 이론 (물론 지젝의 관점에서)은 대략 난감의 수준을 넘어서 독해 불능 수준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자체이기 때문에 이론의 실증성은 이미 의미가 없으며, 사용되는 언어 (물론 '상징'이 대부분일 것이다) 들이 어느 정도로 치밀하고 빈틈없이 상호 관련되고 통일되게 구조화 되어 있는지가 이론의 신뢰와 타당성을 담보해 주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라캉의 이론이 난해 하다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어렵다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이 책에서 라캉 이론의 핵심 개념은 대타자라고 생각하며 대타자는 이데올로기, , 민족, 역사, 뭐 이런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라캉이 대타자의 특징을 상호 수동성 으로 정의 한 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허울 (=환상)은 제 삼자의 상징으로 도치됨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이제 반복적인 클리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이는 라캉의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명제로 간략하게 정의 할 수 있다대타자와 직접적인 ‘나’ (실재, 욕망)와의 관계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 하며 이는 환상으로 잠시 봉합되고 억압된다

 

라캉 - 물론 지젝의 관점에서- 은 믿음이 지식으로 귀납되는 현실을 비판했는데 융의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신을 알고 있다'라는 관점과 정확히 대척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융의 제자들인 종교 근본주의자 기독교는 이슬람이든 상관 없다 나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은 자신이 신 (=시장)의 명령과 보호를 받고 있다는 환상으로 신의 대리인양 행세하고 있고 세상은 그 만큼 후퇴하고 고통 받고 있다.  

 

더 이상은 무리다난 라캉 지젝 이라고 해야 하나? - 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 책을 정리하는 초보적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내 20세기 컴퓨터로도 더 이상은 무리다. 하지만 둘 모두 다시 만나 보고 싶은 아저씨들이니 그들의 다른 책을 뒤져 봐야 할 것 같다.

 

P.S. How to Read 시리즈 중 프로이트, , 라캉까지 3권을 읽었는데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다.

벌써부터 다른 책들, 특히 소설들이 그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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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융 How To Read 시리즈
데이비드 테이시 지음, 박현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어 보니 발칙한 상상력의 문학도라는 표현은 프로이트 보다는 칼 구스타프 융한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흔히 모호한 철학적 원리가 지배하는 시적이고 문학적인 분야로 바꾸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반대로 융은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세계를 아동기의 근친상간의 치정극으로만 단순하게 몰아가는 것에 불편을 느끼고 그와 결별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발칙한 상상력의 문학도라는 표현도 융한테 적합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영혼의 제사장 또는 연금술사 라는 표현이 융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융은 무의식의 세계를 프로이트 처럼 욕망이 아닌 원형 키워드로 접근 한다. 원형은 곧 집단적인 무의식의 영역이며 동시에 종교적 정신세계의 산물이다. 융에게 자아(ego)’는 의식의 중심이고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을 합친 전체의 개념이며 그 중간의 무의식 (원형, 아니마, 아니무스, 그림자)의 세계가 존재한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로운 균형이 (‘개성화 과정: 자아가 무의식의 갈등과 대립을 관리) 이상적이지만 이 균형이 깨지면서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 질환 문제가 발생하며 심각한 경우 전쟁이나 학살 같은 집단적 해리 현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융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과거의 원초적이고 영적인 집단 의식이 부재한 채 자아라는 시공간 개념이 확실한 합리성에 발목이 잡혀 상징적인 인간이 삶 (초월)을 거부하는 진부한 사회로 전락해 버린다. 인간은 이 진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사회가 선호하는 부정적인 극단적인 초월 형식에 의존하게 되며 이는 개인적으로는 신경증, 정신병을, 집단적으로는 전쟁의 형식으로 발현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에 의하면 융은 인간 정신의 밝음과 어두움의 균형을 주장하고 복잡하고 모호한 인간의 정신 세계를 있는 그대로 신비하고 영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심리학자이자 예언자적 역할을 상실한 세속적인 종교를 거부하고 새로운 영혼을 구원받고자 했던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한 권의 책만으로는 융의 이론과 사상은 첫째, 산만하고 모호하며, 둘째, 전혀 흥미롭지 않다앞으로도 그의 저서를 찾아서 읽을 기회는 요원할 것 같지만 어디서 다시 만날 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리뷰로 남기는 것도 그에 대한 마지막 예의가 아닌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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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프로이트 How To Read 시리즈
조시 코언 지음, 최창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프로이트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저씨 20세기가 낳은 물건 중의 물건이다. 남녀노소, 지위고하, 빈부격차, 학력 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이름은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무의식 속에서 억압되어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의식의 표면 위로 다른 이미지(상징)로 압축되고 전위 되어 있어 당사자가 인식하지 못 할 뿐이다. 물론 내가 아닌 어떤 아저씨가 설교하는 소리다 - 글을 읽을 수준 정도라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무의식같은 단어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지는 2차적인 문제다 들을 죽기 전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듣거나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만의 과장이고 착각일까?

 

하여튼 프로이트는 20세기 초에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기본으로 인간의 정신 세계에 새로운 해석과 가능성을 연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선구자들이 그러했듯이 처음 학계와 대중의 반응은 거부였고, 그 다음에는 추종,

그 다음은 비판, 마지막으로는 차분한 후학들의 재해석이었다.

 

그렇다. 그의 이론이 인간의 정신 세계를 모두 설명할 수 는 없을 것이고 이것은 그가 원했던 바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간에 대한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해석은 현재에도 유효하며 그의 이론의 과학적 검증 여부에 관계 없이 물론 엄연히 의학을 전공한 과학도 프로이트 아저씨한테는 제일 중요한 문제겠지만 말이다 문학과 예술의 끝없는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의 이름이 회자 되는 것이고 그 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높게 평가 받는 것이 아닌 가 싶다. 이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그의 이론이 실제로 정신 질환이나 심리 치료에 활발하게 적용되는 경우는 우리 생각처럼 그리 흔하지 않으며, 그 보다는 오히려 예술/문학 비평 분야의 분석 도구로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도 문학은 전위된 정신분석학적 진실이 풍부히 담겨 있는 저장소, 결코 지워지지 않을 어린 시절의 환상을 통해 재창조되는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p126)라고 지적했듯이 말이다.

 

예들 들면 그는 무의식이 꿈, 실수, 농담 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우리한테 알리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식 세계에는 무의식의 잠입을 막기 위해 문지기가 24시간 보초를 서고 있기 때문에, 억압된 무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거나 위장하지 않으면 절대로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 원적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긴 까진 부드럽다 못해 착하기 까진 하다. 하지만 어머니 라는 단어를 성적 대상으로 설정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과학자가 아니며 발칙한 상상력을 소유한 천재 문학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과학적 검증 자체가 불가능한, 즉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이미지와 상징의 문학의 개념인 것이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책의 맨 뒷부분을 보면 저자도 내 생각에 상당부분 동의하지 않을 까 하는 당돌하면서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해본다. 뜬금없이 도덕적인 잣대로 그를 평가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뭐 말릴수는 없겠지만 친구로 삼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역시 뜬금없은 생각이다)   

 

이 책의 장점은 읽기 쉽다는 것이다. 원작자의 친절한 설명과 번역자의 명료한 번역 때문 일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절대 쉽지 않다. 그의 이론은 흥미롭고, 자극적이고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복잡하고 심호하며 모호하다. 프로이트를 잊지 않고 현시대에도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이다.  

 

P.S 다음은 을 그 다음에는 라캉 에 도전한다. 이게 맞는 순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웬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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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밀란 쿤데라 전집 8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은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분량의 단편에 가까운 중편 소설이다. 사회 풍자적 요소 특히 위선적인 정치가들을 춤꾼이나 노출광으로 조롱하는 가 가미 된 인생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는 에세이 같은 소설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난 솔직히 별로 였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작품에 비해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심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역시 밀란 쿤데라의 삶에 대한 은유적 시선은 이 작품에서도 번뜩인다. 특히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는 문장에서 우리는 머리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서,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천천히 시간을 우리에 의도에 맞게 되돌려 보면서 시간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야 하지만, 망각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속도라는 그늘 속에서 기억의 빛 줄기를 피해야 한다.

 

좌파의 공통 된 감성의 단어 반항, 붉음, 나체 중에서 나체에 대한 가설, 특히 나체 - 똥구멍도 동의이음어가 아닐까 싶다 를 좌파 지식인들이 단지 혐오스러운 대중에게 모욕을 주고자 하는 욕망의 배설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해석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설득력이 있다. 좌파는 기존 질서와 권위에 대한 전복을 목표로, 일반 대중이 한 번도 의심하지 않던 믿음이나 진실을 조롱하고 위협하고, 때로는 숨기고 싶은, 그러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욕망 당연히 성() 이다 을 드러내 놓고 떠들어 대면서 우리에게 위선의 옷을 벗어 던지라고 선동한다. 그가 모든 작품에서 성()에 대한 담론에 집착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면 나의 무리한 해석일까?

 

유럽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므로, 작가의 18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에 대한 은유와 해석을 공감하지 못함은 다시 한번 유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절반은 내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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