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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ㅣ 밀란 쿤데라 전집 8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은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분량의 단편에 가까운 중편 소설이다. 사회 풍자적 요소 – 특히 위선적인 정치가들을 ‘춤꾼’ 이나 ‘노출광’으로 조롱하는 – 가 가미 된 인생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는 에세이 같은 소설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난 솔직히 별로 였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작품에 비해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심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역시 밀란 쿤데라의 삶에 대한 은유적 시선은 이 작품에서도 번뜩인다. 특히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는 문장에서 우리는 머리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서,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천천히 시간을 우리에 의도에 맞게 되돌려 보면서 시간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야 하지만, 망각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속도라는 그늘 속에서 기억의 빛 줄기를 피해야 한다.
좌파의 공통 된 감성의 단어 반항, 붉음, 나체 중에서 나체에 대한 가설, 특히 나체 - ‘똥구멍’도 동의이음어가 아닐까 싶다 – 를 좌파 지식인들이 단지 혐오스러운 대중에게 모욕을 주고자 하는 욕망의 배설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해석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설득력이 있다. 좌파는 기존 질서와 권위에 대한 전복을 목표로, 일반 대중이 한 번도 의심하지 않던 믿음이나 진실을 조롱하고 위협하고, 때로는 숨기고 싶은, 그러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욕망 – 당연히 성(性) 이다 – 을 드러내 놓고 떠들어 대면서 우리에게 위선의 옷을 벗어 던지라고 선동한다. 그가 모든 작품에서 성(性)에 대한 담론에 집착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면 나의 무리한 해석일까?
유럽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므로, 작가의 18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에 대한 은유와 해석을 공감하지 못함은 다시 한번 유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절반은 내 몫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