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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 사사키 아타루가 1973년이라고 하니 나랑 동갑인데 나이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읽었을 때 느낌은 문체가 거침없고 떄로는 도발적이기도 하여 작가의 연배를 30대 정도로 예상 했는 데 40대라고 하니 좀 의외였다.실제로 이 책이 5일 밤 시간 동안 – 물론 연속전인 닷새가 아닌 일주일에 하룻밤씩이지만 - 에만 쓴 글이라면 작가는 40대 일리가 없다. 내가 40대 초반의 평균 이하 체력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을 차치하더라도 우리 나이에 작가의 강행군은 쉽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글은 부제에 명시 되어 있듯이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그대로 이다. 작가는 문학은 문학자 (작가 자신)가 자신의 글(책)을 통하여 세상을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고, 설교하는 행위로 바로 텍스트를 다시 쓰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로 글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문학자인 내가 미쳤거나 아니면 세상이 미쳤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럼으로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 같은 이유로 모든 것의 모든 것을 아는 척 거들 목 대는 오만한 평론가나 하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 침소봉대하는 전문가의 행위는 목숨을 걸고 글을 쓰는 문학자에 대한 모욕이므로 그들의 비/반 문학적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교 성서와는 동떨어진 채 세속적으로 타락해가는 교회의 모습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음을 확신하고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독일 국민들은 모국어로 쓰여진 성서를 읽으면서 – 모국어 문맹률도 여전히 높았지만 라틴어 성경은 성직자들도 읽을 주 아는 자가 극소수였다고 한다 –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성서의 현현이 아닌 소수의 성직자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세워진 왜곡된 결과물 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루터의 대혁명은 16세기 유럽이 교회로 대표되는 종교적 텍스트에서 세속적 정치제도로 – 물론 아직 시민사회의 도래는 200년 이상은 더 기다려야 한다 – 추가 이동하기 시작하는 혁명의 첫 걸음인 것이다. 작가는 몇 가지 다른 예도 뒤에서 거론하고 있지만 마르틴 루터 장 만으로도 이 책의 목적은 이미 달성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문학이 곧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혁명에서 폭력은 읽고 쓰는 것에 비하면 부차적이며 이차적인 부산물 또는 수단적 행위에 불과하다고도 주장한다. 전적으로 동의 한다.
우리 모두 세상올 돌아 보도록 하자. 목숨 걸고 단식하고 시위는 하고 있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 – 다름 아닌 텍스트 이다 – 도 움직이게 하는 “읽고 쓰고 해석하는” 문학적 행위는 부족하지 않았는지 되새겨 보자. 정보로만 남아있는 저급한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용기를 가지고 텍스트 글쓰기를 기대할 수 있는 그 누군가의 출현 – 이것이 메시아가 아니 무엇이겠는가? – 을 오늘도 변함없이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