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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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찰스 디킨스의 [도 도시 이야기], 결과는 만족한다.

이전에 읽었던 에밀졸라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과 비슷한 느낌, 만족이었다.

[ 두 도시 이야기]는 18세기 격동의 유럽의 대표적 도시 런던,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 책의 중심은 프랑스 대혁명의 도사 파리이다. 물론 두 책은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만 뺴고는 시대도 틀리고 소제/주제도 틀리지만 단단한 플롯을 토대로 무리한 비약없이 천천히 하지만 빈틈없이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두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의 능력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데 약간의 인내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이 정도 고통은 책을 읽고 나서의 기쁨과 뿌듯함에 비하면 충분히 감내할 만한 수준이다.

 

찰스 디킨스의 [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18세기 유럽 봉건사회의 몰락과 시민사회 - 물론 부르조아 중심의 민주주의와 근대화- 의 사회적 현상이 작품의 소재일지는 몰라도 직접적인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 한다. 이 책의 주제는 죄없이 고통받는 약자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다름 아니다. 그는 마네트 부녀 - 루소와 마네트 - 의 사회와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출발은 순수(?)했으나 결말은 정치적 보복과 가차없는 피의 폭력만을 가져온 프랑스 대혁명을 시대적/공간적 무대 장치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은 자기 비하적이고 냉조적인 자아로 세속적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던 시드니 카턴마저 감동시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장엄하고 숭고한 희생으로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텔슨 은행의 로니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분신으로 보인다. 로니가 항상 강조하는 '고용인'의 입장이 바로 영국 민주주의 신봉자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인 것이다. 작가의 사상은 온정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적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현재 세상에서도 역시 유효하다고 생각 된다. 모든 사상과 이론은 한계를 가진다. 전적으로 완전 무결한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논리적인 테스트 경쟁에서 생존해야 한다.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책의 두께가 주는 위압감과 스마트폰의 유혹을 3일 정도 이겨 낼 수 있는 분에게는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 하고 싶다. 물론 약간의 지루함을 이겨 낼수 있는 인내도 가진 분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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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 펭귄클래식 114
도널드 바셀미 지음, 김선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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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버지라는 단어는 쉽게 오를 수 없는 단단하고 견고한 성을 연상케 한다. 특히 아들들 한테는....

 

제목은 죽은 아버지 이지만,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죽은 아버지는 절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돈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살아 생전에는 의도적으로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하려는 허상에 다름 아니나 막상 죽음 이후의 부재에는 무의식적으로 - 간혹 의식적으로도 - 그들을 통제하고 구속하는 그 무엇이다.

 

정신분석학으로 대표되는 이론적, 문학적 해석은 아버지와 아들은 남근으로 상징되는 적대적 라이벌 관계로 정의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들은 아버지라는 거대한 동성 지배자한테 육체적, 정신적으로 구속, 통제 되는 나약한 정신박약아에 불과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아들이 아버지를 넘어서는 순간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늙음에 힘입은 바 크다. 상대방이 약해지면서 얻어 낸 승리는 어딘가 정당하지 못한 수단으로 얻어낸 결과라는 찜찜한마음이 들게 한다.

 

아버지는 과거이고, 인습이고, 제도이다. 작가는 언어의 파괴로 죽은 아버지를 철저히 부정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언어적 파괴는 유희적 목적보다는 현재를 부정하려는 비판적 목적에 더 큰 의미를 주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형식적 파괴는 내 취향이 아니다. 형식적 파괴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일지라도 형식저 기교가 전부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평균적 독자들은 형식적 불편함에 지레 겁을 먹고 우리의 뇌는 동작을 멈추고 후퇴하기 떄문이다. 나는 평론가도 전문가도 아니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겨 가지만 의미없는 시간과의 지루한 씨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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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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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 사사키 아타루가 1973년이라고 하니 나랑 동갑인데 나이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읽었을 때 느낌은 문체가 거침없고 떄로는 도발적이기도 하여 작가의 연배를 30대 정도로 예상 했는 데 40대라고 하니 좀 의외였다.실제로 이 책이 5일 밤 시간 동안 물론 연속전인 닷새가 아닌 일주일에 하룻밤씩이지만 - 에만 쓴 글이라면 작가는 40대 일리가 없다. 내가 40대 초반의 평균 이하 체력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을 차치하더라도 우리 나이에 작가의 강행군은 쉽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글은 부제에 명시 되어 있듯이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그대로 이다. 작가는 문학은 문학자 (작가 자신)가 자신의 글()을 통하여 세상을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고, 설교하는 행위로 바로 텍스트를 다시 쓰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로 글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문학자인 내가 미쳤거나 아니면 세상이 미쳤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럼으로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 같은 이유로 모든 것의 모든 것을 아는 척 거들 목 대는 오만한 평론가나 하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 침소봉대하는 전문가의 행위는 목숨을 걸고 글을 쓰는 문학자에 대한 모욕이므로 그들의 비/반 문학적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교 성서와는 동떨어진 채 세속적으로 타락해가는 교회의 모습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음을 확신하고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독일 국민들은 모국어로 쓰여진 성서를 읽으면서 모국어 문맹률도 여전히 높았지만 라틴어 성경은 성직자들도 읽을 주 아는 자가 극소수였다고 한다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성서의 현현이 아닌 소수의 성직자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세워진 왜곡된 결과물 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루터의 대혁명은 16세기 유럽이 교회로 대표되는 종교적 텍스트에서 세속적 정치제도로 물론 아직 시민사회의 도래는 200년 이상은 더 기다려야 한다 – 추가 이동하기 시작하는 혁명의 첫 걸음인 것이다. 작가는 몇 가지 다른 예도 뒤에서 거론하고 있지만 마르틴 루터 장 만으로도 이 책의 목적은 이미 달성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문학이 곧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혁명에서 폭력은 읽고 쓰는 것에 비하면 부차적이며 이차적인 부산물 또는 수단적 행위에 불과하다고도 주장한다. 전적으로 동의 한다.

우리 모두 세상올 돌아 보도록 하자. 목숨 걸고 단식하고 시위는 하고 있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 다름 아닌 텍스트 이다 도 움직이게 하는 읽고 쓰고 해석하는문학적 행위는 부족하지 않았는지 되새겨 보자정보로만 남아있는 저급한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용기를 가지고 텍스트 글쓰기를 기대할 수 있는 그 누군가의 출현 이것이 메시아가 아니 무엇이겠는가? – 을 오늘도 변함없이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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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침입 필립 K. 딕 걸작선 7
필립 K. 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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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K. 딕 걸작선

 

평소에 전집 구매에 벼르고 있었느데 마침 50% 세일을 보고 미련없이 질렀다.

처음 SF 소설을 접해서 그런시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언젠부턴가 속도가 붙으면서 1권에서 5권까지는 재미있게 읽었다.

헉... 하지만 6권 [발리스]는 뭐랄까... 이런 말은 좀 심할 지 모르지만 약쟁이가 글을 썼는지, 아니면 사이비 종교 교주가 무지한 신도들을 집단 마취상태로 빠져들도록 잘난 혀를 놀리는 건지 도데체 내 기준으로는 이 소설은 문학이라기 하기에는 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성스러운 침입]은 [발리스]보다는 뭐랄까, 보다 퍼즐이 맞아 떨어지는 소설로 현 인류에 대한 종교적 성찰과 미래에 대한 묵시론적인 경계를 가지게 하는 가치있는 글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솔직히 이런 글은 여전히 별로다. 좀 흐름을 갖고 집중을 가질만 하면 자꾸만 삼천포로 빠자는 작가 때문에 책을 덮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다 읽기는 했지만 소설은 두서 없는 과잉된 주장과 서술로 길을 잃고 핵심을 벗어나 헤메인다. 책장을 넘기면서 신의 이중적 모습 - 인류를 한없이 사랑하는 자비로운 신과 인류의 잘못을 가차없이 벌하는 가혹한 신 - 의 조화만이 인류 구원의 열쇠라는 주제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부질없는 지는 몰라도 다음 8권 [티모시 아처의 환생] 에 기대를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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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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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섹스

항상 인간을 쾌락의 극한으로 몰고 감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허무를 경함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자 행위

우엘백의 글은 종횡 무진 학문과 문학의 영역을 넘나든다. 매혹적이고 때로는 지적임을 넘어 현학적이기까지 - 분자생물학, DNA 복제 부분은  - 하지만 자세한 성애 묘사에 속절없이 반응하는 내 몸에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작가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68세대의 무책임하고 공허한 극도의 개인주의, 성의 해방을 주인공 브뤼노와 미셸의 마지막에 찾아공 진정한 사랑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론으로 마무리 한다.

 

작가가 꿈꾸는 새로운 인류는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하지만 작가가 꿈꾸는 과학의 힘으로 균질한 유전자가 실현되어 서로에게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서로 경쟁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종의 인류가 행복한 미래의 이상형일까?

욕망이 부재한 미래의 인류가 그다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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