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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탄생 100주년 기념판)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요즘 젊은 것들은 진짜 문제야‘
2000여년 전의 이집트 벽화에도 이런 낙서가 쓰여있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는동안,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 낙서가 다시 떠올랐다.
어느 시대에나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르는 10대 혹은 성장기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눈에 그저 이유도
없는 일탈 혹은 반항을 하는 골칫덩이들일 수밖에 없나보다,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자신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불꽃같은 감정의 정체도 원인도 모른채 그저 그 감정만이 일생에서 가장 소중하다 믿고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아이들에겐 어떤 말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터.
그곳에서 빠져나온 뒤에야 자신이 지나온 어둠의 터널이 끝났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그저 지나보면 안다는 가벼운 말로 치부하기에 그시절의 우리들은 너무 뜨겁고 아프지 않았던가.
20세기 영미 명작소설 중 한권으로 꼽히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학교에서 퇴학 당한 고교생 홀든 콜필드가 집으로 갈 용기가 나지않아 방황하는 3일간의 모습을 통해 누구나 지나온 바로 그시절, 10대의 이유없는 불안과 혼란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작가인 셀린저의 자전적 이야기라서인지 주인공인 홀든이 기숙사를 떠나는 순간부터 겪게되는 심리적 혼란과 분노, 불안과 공포 등의 감정 변화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물론 학교도) 온통 가식적인 위선과 허세, 불의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으며, 단 한사람도(심지어 존경했던 선생님조차도) 정상적인
롤모델이 되어주지 못하는 서글픈 현실일 뿐이다.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따라 자유롭게 작문을 하는 학생에게 탈선을 외치며 낙제점을 주고,
친구의 목숨까지 빼앗는 폭력에도 관대한 학교와,
탐욕으로 다른 이들을 속이고 고통을 주는데 익숙한 어른들,
속내를 감춘채 이기적인 욕망으로 서로를 탐색하고
이용하려는 남자들과 여자들..
어른들의 눈에는 퇴학 당해 학교에서 쫓겨난 홀든이
낙오자로 보이겠지만, 위선과 허세에 사로잡혀 이기적인 욕망만 쫒는 그들이야말로 홀든에겐 혐오스러운 존재들이다.
하지만 홀든은 먼 곳으로 떠나 사라지고자 했던 마음을 접고 집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게 되는데,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동생 엘리와 한참 어린 막내 여동생 피비의 존재다.
결국 아이를 구원하는 것은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더 어린 아이들 뿐인 것일까.
얼핏 보기에 주인공 홀든은 룸메이트부터 학교 안의 모든 동급생들을 혐오하고 증오하며,
나이를 속이고 담배와 술을 즐기는데 주저함이 없는
일탈 청소년이다.
어른들에게 공손하지도 고분고분 하지도 않으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무시하고 불평불만에다 욕까지 입에 달고 산다.
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의심의 여지 없이 골칫덩이 문제아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학교를 떠난 순간부터 자신이 혐오 한다던 단점 투성이 친구들을 보고싶어하고,
자살한 친구와 먼저 떠난 동생을 기억하고 아파하며, 우연히 마주친 수녀님들께 더 많이 기부하지 않은 것을 자책하고,
한참 어린 여동생의 부탁에 가출을 포기하고 마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다.
유난히 반항적이고 불만 투성이인 홀든의 모습은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착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분명 선한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지만,
섬세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좀 더 살기 힘들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니까.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청소년기의 반항과
혼란을 사실적인 묘사로 공감하게 만든 저자의 글솜씨도 감탄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에 높은 점수를 주고싶은 부분은 쉽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뛰어난 문장력만큼이나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이야기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 놀라운 유머감각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정확히 필요한 위치에 놓여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주는 유머 한스푼의 힘은
정말 감탄스럽다.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호해주는 파수꾼이 되고싶다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희망을 가진 홀든이
부디 더 상처받지 않고 그 바람대로 살게 되기를..
이 시대의 모든 홀든이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