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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뭔가를 글로 쓴다는건, 그것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서 결국에는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생각이 엷어지고 모서리는 닳아서 글로 적어놓은 것들은 결국 희미해지고 사라져버린다. 특히 장소에 관한 글이 그렇다.‘ - p108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을 읽고나면 늘 나의 부족한 독서력과 어설픈 통찰력을 깨닫게 되었기에
망설였으나 책 소개 문구 중 ‘여행 소설‘이란 표현에 혹해 희망을 품고 용기를 내어(?) 구매했다.
하지만, 역시 노벨 수상 작가와 나의 어긋난 감상은 이 작품도 역시 피해가질 못했다.
일단, 무엇보다 이 소설은 내가 기대했던,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일반적인 여행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그런 여타의 여행소설과 같은 기준에서 분류한다면 이 책은 여행소설이 아니다.
게다가 어찌 보면 소설도 아니다.
백여가지의 이야기가(어떤 이야기들은 고작 한 두페이지 정도일 뿐이다) 각각 독립적으로 혹은 약간의 연관성을 갖고있지만, 모든 작품들이 익숙한 소설적 화법을 쓰고있지 않으며, 어떤 것들은 수필 같기도 하고 편지이기도 하며 때론 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도 많으며 적지않은 이야기들은 무슨 얘기가 하고싶은 건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굳이 이해를 하려는 마음으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왜 제목이 방랑자들이며, 여행소설이라고 분류 하는지
짐작되는 부분들은 물론 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고작 세살 정도인 아기는 어둠이 내릴 무렵의 거리 풍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불현듯 뭔가가 달라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나의 관념을 떠나 다른 시각을 가진 존재가 되는 순간.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그 잠깐의 시간을 저자는 여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여행중 사소한 말다툼 끝에 차에서 내린뒤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아내와 아들을 찾아 나서는 남자,
잘려버린 다리의 고통에 집착하는 사나이,
신체에 집요하게 천착하는 해부학 박사,
심지어 아무도 없는 빈 방까지..
백편이 넘는 길고 짧은 에피소드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여행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흔히 여행이란 단어에서 쉽게 떠올리게 되는 낯선 장소로의 여행이 아니라, 각 편의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들만의 어떤 것을 향한 여행이라는 점이 다를 뿐.
어떤 이는 인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향해,
다른 이는 자신이 버렸다고 생각한 가족을 찾는동안 그들이 자신을 버린것을 깨달으며 그 마음이
변한 이유를 찾기위해 고통 속에 고민을 거듭하고,
또 어떤 이는 사라진 자신의 일부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상실과 고통의 감정에서 진정한 자신의 현재를 알려줄 답을 찾는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겐 여행과 같은 것이며, 그런 이유로 ‘여행자들‘이 아니라 ‘방랑자들‘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장소의 이동을 목적으로 삼아 외부적 환경을 바꾸는 ‘여행‘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실과 고통의 답을 찾으려는 내적 요구를 따라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이기에.
각 편의 이야기는 독자적으로 시작되었다 끝이 나기도 하고, 한참 뒤에 다른 이야기와 만나기도 하며, 끝이 난줄 알았던 이야기의 다음 과정이 진행되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 속 사소한 문장이 어느 편의 제목이 되기도 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여행(방랑)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익숙하지 않은 방식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변주하면서도 결국 인간의 내적 방랑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쉽지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가의 능력에 내심 감탄이 느껴진다.
결국 작가가 백여편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고픈 말은, ‘당신은 지금 어떤 방랑을 하고 있나요?‘가 아닐까?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다 익숙한 전개방식도 아니고, 소위 재미라고 부를만한 익숙한 미덕도 부족한 까닭에 솔직히 읽기가 그리 쉽진않다.
그래도 중간에 덮고 포기하기엔 다 읽고 난 뒤의 여운이 적지않게 남는 책임은 분명하다.
재미 위주의 쉬운 독서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를 반성하게 해준 책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