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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불 - 존재에서 기억으로
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애도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경건함, 차분함이 느껴지는 가운데 끊임없이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하지만 이 질문은 죽음에 대한 탐구 뿐 아니라 결국은 ‘삶’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 에구치 미노루는 오오노지마라는 섬에서 일생을 살아갔던 사람이다. 전쟁 때문에 잠시 시베리아 벌판에 나갔던 때를 제외하고 언제나, 섬에서 사랑하고 이별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기시감’을 잘 느끼는 것이다. 언제가 와봤던 느낌, 언젠가 봤던 사람같은 느낌... 보통 전생의 기억이라고 알고 있는 기시감이지만 미노루의 경우 가까운 미래도 기시감처럼 느끼고 있다. 기시감으로 그는 어떤 불행이나 슬픔, 기쁨도 모두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만큼 감정의 기복 역시 크지 않았다. 그의 감정은 그렇게 소설 전체의 분위기로도 이어진다. 죽음에 대한 탐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기에 진지할 수밖에 없지만 가끔은 그런 감정이 힘들게 다가오기도 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역시나 한줄기 희망을 주는 것은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알게 되는 삶의 깨달음,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 찾아낸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 미노루, 이게 죽음이란 거야.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어. 죽음이란 잊는 거야. 하지만 잊지 않는다면 늘 함께 있는 거란다. 언제까지고 말야.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어. ” (p138)
“ 슬프다는 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야.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하는 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지. 죽음은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거다. ”
“ 극락은 없다. ”
“ 그러니까 지옥도 없지. ” (p172)
아, 희망적인 말이 없었다면 책의 분위기에 빠져 음울함의 늪을 허우적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도하는 사람’을 읽을 때에도 주인공이 하는 행동,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들은 나에게 감동적이기 보다는 도대체 왜? 하는 의문만 남겼다. 총, 전쟁, 죽음 등은 내가 다루기 힘들어하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진 것이라 앞부분을 읽는게 힘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총, 전쟁을 다룬 부분이 끝나고 전개되는 이야기부터는 좀 읽기 쉬워진다.
“ 다들 어디로 가신 걸까? 어째서 모두 사라져야 한단 말이냐. 우리도 머지않아 그렇게 되겠지만......”
“ 해답이 있는 게 아니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니 원.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저세상으로 가보지 않은 한 알 수 없는 법. 알 수 없다는 게 결국 답이겠지. ” (p307)
“ 골불 준비를 하면서 저는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왔습니다. 죽음을 직시하면서지요. 어렸을 때는 죽음의 정체를 몰라 그저 두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길든 짧든 자기 삶이 다하는 곳에 죽음이란 입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그럴듯한 논리로 파악하기는 싫습니다. 죽음은 생각을 초월하고 존재를 초월한 깊은 우주입니다. 기요미는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없는 무라 했습니다만, 저는 죽음이란 늘 곁에 있는 거란 생각이 듭니다. 살아 있는 것들 곁에 있는 것, 그것이 평온한 죽음일 것 같습니다. ” (p329)
이 책이 특별한 것은 책을 읽는 중에 느껴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잔잔히 다가오는 삶과 죽음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한평생 가졌던 의문들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다. 미노루의 삶을 지켜보면서 역시 삶이란, 또 죽음이란, 짧은 시간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아주 먼 훗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도달했을 때 그 때 평가해야 하는, 생각해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백불 - 존재에서 기억으로>는 삶이 끝까지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처럼, 끝까지 읽어 보는 것이 좋다. 읽는 중에도 미노루처럼 질문하고 삶의 답을 찾아본다면 소중한 독서의 시간이 되어 줄것이라 믿는다.
삶이란 원래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