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이스트우드의 영화 모두를 본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은 [그랜 토리노]와 비슷했다. 그의 두 영화에서 모두 정작 중요한 때에 영화 전반을 주름잡아 왔던 '총'이 순간적으로 -또한 그것은 결정적으로- 부재한다. 정말이지 황당할 정도로 영화 내내 사회가 그런 '장치' 하나에 무기력하고 무능해진다. 그러한 대면에서 삶들은 어떻게 할지를 전혀 몰라하고, 일상은 파괴된다. 그런 상황에조차 잃지 않는 것이 있는데...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지겨워 진다. 그건 내 몫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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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책을 대신할 요량으로 'root of all evil?'이라는 BBC 다큐를 봤다. 신을 둘러싼 근본성들에 정면으로 당돌해 가는 도킨스의 육탄전이 굉장한 다큐였다. 이전까지 도킨스라는 인물에 대한 '쑥덕거림'에 그가 과학이라는 타이틀을 빌미로 소모적인 논쟁으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그런 아류 과학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고치는 계기가 되었다. 다큐는 내게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유는 변화화고, 종은 진화한다.



 다만 사후에 대한 (믿음) 공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오히려 질환적이라는 점에서 너무 단선적이지 않나 싶었다. 정말 지옥이 있다고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면 이 모양은 아닐 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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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당이라는 수사학은 늘 한결 같다. 대의제를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대의제를 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엄청난 수고와 함꼐 발생되는 비용의 낭비, ...즉 따라서 의사 결정에 국민은 한 마디로 낭비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와 약간이라도 유사한 것을 결코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정당이란 대의라는 수사에 의존하며 실제로는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따라서 "정당의 나쁜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4년마다 단 한 번 국민은 품귀 현상에 시달리며, 나머지 영역에 대해선 "공공적 삶의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표현할 기회나 수단" 없이 산다. 고개를 조아리는 청소 용역부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시선. -이것은 그저 사실에 지나지 않는데, 문제는 이것을 사실이 아니게끔 하는 외양적인 분노들 =사과를 촉구하는 그것이야말로 민주적이고 반민주적인 것이다. 시몬 베유는 말한다.



 모든 정당의 첫째 목적이자 궁극적인 유일한 목적은, 어떠한 제한도 없는 자기 확장이다. 바로 이 세 가지 성격으로 인해 정당은 그 씨앗에서부터 그리고 그 열망에 있어서 전체주의적이다. … 즉 목적과 수단의 도치가 그것이다. … 사실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모두 수단이다.



 정당 체제는 무한한 확장을 그린다. "보통의 사람들이 정당에 몰두하면 정당의 확장을 욕망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은 정당을 어떤 제한도 갖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그것은 가능한가? "정당의 확장이 선의 기준이 되면서 정당은 사람들의 생각에 집합적 압력을 행사한다. 이 압력은 실재하고 공개적으로 펼쳐진다. 이 압력은 고해 되고 주장된다. 이는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익숙해져서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전적으로 아렌트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근본적인 파괴를 통해서뿐이다: 스미스 부인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는 가서 그녀를 죽여버리는 살인자의 경우처럼 말이다."


















 "저는 약속드립니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건 간에 제가 특정한 집단의 일원임을 완전히 잊고 오직 공공선과 정의만을 위해 저 자신을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발언은 매우 나쁘게 여겨진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마저도 그를 배신자로 여길 것이다. 보다 온건한 사람들은 "그는 왜 당에 가입했지?"라고 말할 것이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정당에 소속됨으로써 언제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면, 정당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악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능력은 동시에 두 곳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양자에서 승자는 사적인 것의 공공성이다. 사적인 이해가 공적인 의식에 -(논문이 주목하는 루소에서의) '정념'적으로- 주인하고자 하기 때문에 공공은 언제나 사적으로 파괴된다. 그럼에도 "공공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효과적인 개입을" 원하기 때문에 이 패거리 문화에 짓눌리고 만다.



 "저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 사실상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구체적 태도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민은 어디까지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는 것이며, 차라리 그것은 실제 요행을 바라는 것보다 더 기행적이다. 합리적이고, 거기다 우주의 탄생 근원으로까지(심지어 벌써부터 우주 탄생 이전까지) 육박해 가는 시대에, 비합리적이고 이미지 추론에 전적으로 모든 것을 위임하는 이 "영역에서, 이제 사람들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초등학교에서도 어린이들에게 찬성 또는 반대를 하는 연습을 시킨다. … 시험을 칠 때는 세 시간 동안이나 답안을 작성해야 하는 데도, ("여러분들, 찬성이에요 반대예요?") 이에 대해 찬성인지 5분 동안도 자문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얼마나 진실에 다가갔는지, 얼마나 진리에 다가서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모든 '파산'적인 사태(특히 금융 위기 당시 이 표현은 아주 단골이었으나 정작 '오늘'이 입증하듯 파산 당사자는 -오히려- 파산이란 용어의 주체였다)가 범람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구르고... 굴러가고... 동글동글... 그렇게 지구는 돈다. 정치도 알아서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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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비데의 노트를 통한 '공산주의는 어디에'라는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 이념은 도대체 어디쯤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 어디에서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지배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는 스스로 출구를 찾아 나갈 수 있는가?" 이것은 인문학에 대한 우파의 한탄들은 그런 맥락과 맞닿아 있다. 좌파는 도대체 어디에서 이 목소리의 현실을 찾을 수 있는가? 박힌 사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사물로서의 텍스트. 우파는 말한다. "현실을 직시하라." 우파는 요구한다. "현실을 보여라." 지시하는 대상, 지시되는 사물 모두가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서) "현대성의 선언(이) 그 자체로 다른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실재적 대립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가령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으로 제시되는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의 양식성은 이론적 부합성을 근거로 제시되는 이념이어선 안 되는 것이다. 공리라는 산술 문제에 '판단'이라는 요청 문제는 인지의 부조화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것이 강조된다.



 현대성의 선언은 그 자체로 다른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재적 대립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주목되는 '곳/것'은 어디인가? "현대계급구조가 전제하고 있는 메타구조는 노동력의 자유로운 판매를 이야기하는 상품생산논리이다. 계급구조는 앞서 말한 바대로 이러한 상품생산논리를 전제한다." 지시하고, 지시를 가리키며 사라지게 되는, 바로 -여기- 손에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총체적 현대 세계는 체계라는 용어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장갑 낀 손으로만 우주로 뻗어갈 수 있을 뿐이며, 그 장갑은 조금이나마 자신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할 자신의 민족이다.... -예이츠(루크 기본스, 「국민의 손님」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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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이것은 존재의 대상인가? 대상의 존재인가? 이런 물음에, 지난 역사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일관된 대답을 해왔다. 지난 세기 국가는 개인의 물리력을 뛰어넘은 가공할 폭력을 (개인이 상상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했다. 국가는 모든 개인을 우습게 초월했다. 개인은 국가가 아니었다. 국가가 개인이었다. 국가의 유적 본질은 개인이었지만, 국민은 그런 개인에 선행했다. 국가의 역사란, 오로지 국가 없는 미래를 지시하는 그 무엇 이상도 아니었다. 국가라는 모든 현장에 폭력은 국가가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그 자체였다. 국가 생활 세계의 가능성은 개개인의 불가능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가진다. 유럽은 여전히 분자가 아니라 분열이다. 환대는 여전히 막연한 상상력이다... 국가는 언제나 옳았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새로운 과거'가 운동한다. 과거는 그곳이 여전히 인간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새로움은 그곳이 지금을 의미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국가의 운명은 어떠한가? 국가는 '어떠할' 수 있는가? 논자는 이 물음을 구성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활용한다. 가령



 바쿠닌은 계획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져 꿈꾸던 모든 것을 창조한다면 무슨 일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나는 즉시 내가 만든 모든 것을 다시 허물어뜨리기 시작할 것이오." 



 논자는 아나키즘의 "이러한 운명"들에서 (일종의) "텅 빈" 제스쳐를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주주의가 텅 빈 기표로 남겨져 있는 것처럼 국가 또한 텅 빈 기표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가 그 자체를 악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으로 열려 있는 것으로 이해할 때, 국가의 성격 또한 변화 가능할 것



 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이다. 논문은 이렇게 '국가 이후 국가'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 우리 지난 역사의 민주화에서 언제나 '타협'의 대상이었던 것이 국가였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논문은 《진보평론》(53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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