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은 어디선가 말한다. 군인이 본질적으로 나쁘지는 않다고. 이 영화는 그런 본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 곳곳엔 가득한 상품들이 즐비하다. 이른바 명품이라고 하는 것들이 영화에서 -부르주아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들이 봉합되지 못한 채 널브러진 -그러나 강렬하게 번쩍이는- 이미지만을 고수하는 반면, 여기에 동행해서 이어져 나가는 인물의 삶은 스크린이라는 뚫을 수 없는 거리를 고집하는 향기를 (그럼에도) 고집한다. (이깟 영화 하나가 무슨 파문을 가지겠는가?) 다만 그러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멋진 공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틀렸다 -어떻게 말인가: 정의는 수단을 정의롭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바보 같은 말장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핑계는 언제나 수단이 목적에 정당하지 않음을 이유로 하는 구실을 연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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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이라는 경제적 위기와 거기에 대한 월스트리트라는 공간성, 여기에 대한 미국경제학계의 주류와 비주류의 동향을 진단하는 논문이다. "몰역사적인 생산 함수와 소비 함수를 동원한 동적 최적화 모델", 즉 이윤과 이익이라는 공리성에 입각한 합리적 효율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생산에 대한 비판과 그 주변부을 그리는 비주류의 활동들을 소개한다. 주제면이야 동향에 대한 귀동냥이기 때문에 술술 읽어가면 되고, 흥미로웠던 것은 소개되는 일화 하나였다.



 미국 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한창 번져나가던 2008년 가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왜 금융 위기가 발생했고 어떤 경제학자들도 왜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는지를 공개적으로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영국의 왕립 학술원에 소속되어 있던 주류 경제학자들은 여왕에게 '도래하는 금융 위기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었던 경제학자들의 무능력'을 자책하면서 '창의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민감성을 갖추지 못한 경제학자들의 집단사고'가 도래할 국제 금융 위기를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답을 줄 수 없다. 학문은 미묘하게 전문과 엇나간다. -그것은 함께 고민하는 힘, (논문이 강조한 표현은 아니지만) "관심의" 힘이다. 진보에 대한 불평은 언제나 손쉽다. 그것은 늘 다음과 같은 반성과 동일한데, 당장 무언가를 제시할 수 있는 현안을 마련하라는 비판 섞인 비난이다. 우린 여기서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미래는 보이는 시야가 아니라 나아가는 징후라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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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수에 대한 사형 폐지입장을 이야기하기란 간단하다. 우선 인권을 언급하고, 세상만사가 오로지 법 관찰에 의해 완벽하게 관철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디어에서는 사실은 범인은 따로 있거나 우발적인 사건인데 죄 없고 가난한 사회적 희생양들은 탐색하기 마련이다. 이런 그런 장면들은 대단히 효과적으로 주제를 (가령 '7번방의 선물'에서 딸을 호명하는 신체 없는 목소리 부분... 나는 여기서 웃었다가 친구들로부터 질책과 원망을 샀다) 전달하지만, 사실을 놓고 보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워 실은 부당함에 대한 헌사에 가까운 (눈이 부신 대신에) 눈물겨운 헌사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쏘우'에서 직소가 그렇지 않은가? 삶이 따분하지 않았느냐고.) 그저 게임을 원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 데드맨 워킹은 다소 따분하다. 그래서 추천한다. 이 영화는 진부하고 무책임하다. 사형수도 살리지 못하며, 피해 가족들의 상처를 충분히 소화해내지도 못한다. 수녀는 오로지 그 중간에 서서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또 아파할 뿐이다. 사형이 집행된 뒤 사형을 강고하게 원한 유가족이 사형수 장례식에 찾아온다. 같은 교인으로서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수녀라는 사람이 살인자인 그를 보며 아파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지 그녀의 믿음을 책망한다. 그리고 그녀는 대답한다: 그건 노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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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눈을 뜨면 그렇다. 그래서 밥을 찾아 먹는다. 어쩐지 밥만 먹는다는 것은 허전해 TV를 시청한다. 모던 패밀리의 라이프 스타일에 덩달아 즐거워하며 너구리를 몰고 간다... 그렇게 어영부영 밥을 다 먹고 컴퓨터 앞에서 노닥거린다. 뉘엿뉘엿 시간은 흐르고, 눈을 흘기는 식으로 책도 어영부영 넘어간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빌려온 책들이 반납을 알리는 때가 온다.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길을 나선다. 인간적 상처들이 달리는 버스 차창처럼 흐릿하게 나를 주위로 해서 지나간다.. 순간들은 그렇게 돌아오지 않고, 나는 두둥실 떠다니는 버스를 타고서.

 돌아오는 길 혼자서 벽보를 발견하곤 킥킥거린다; 큼직한 글자로 벽보는 이렇게 인사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 도시에서? 나는 그런 물음으로 조금 가까이 가 본다. 그리고 이내 킥킥 웃고야 만다: 추운 겨울이 어쩌고... 따듯하게 -자사의 점퍼를- 입고 다니라는 광고였다.
 

 반성? 아니다.. 나는 좀 더 그럴듯한 핑계들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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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장 불티나는 성상은 역시 십자가+예수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종의 공통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에게서 찾아지는 페티쉬즘이다. 우리는 예수를 들여다보는 것일까, 아니면 예수 내면에 자리한 그 이면의 십자가에 대한 도착이 있는 것일까... 물론 둘에 대한 분리의 강조는 웃긴 논리이다. 그것은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가장 근본적인 소박한 질문을 가로막는다는 것에 있다. "예수란... 누구란 말인가?" 


 2. 언제가 내려간 부산역 앞에는 확성기를 이용해 전도를 하는 교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커다란 깃발에무슨 천국(천국에 대한 내용은 잘 기억에 남질 않았다) 불신지옥이라는 흔히 떠도는 거 캐릭터의 완벽한 정형성을 띠고 있었다. 상당한 노구였음에도 강고해 보였다. -그것은 참 놀라운 경험이었다. 믿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귀신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단언컨대- 무당이었다. 그 완벽한 로컬라이징에 감탄하지 않기란 어려운 것이다.


 3. 정훈이었나 종교 행사(-그렇다. 종교는 오늘날 어디까지나 행사다)였나 무튼 훈련병 시절 어느 영상을 시청할 기회가 있었다. 내용은 실미도에 대해였다. 지루하지 않게 중간중간 영화의 장면도 삽입하고, 생존한 기간병의 증언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어디서 부터인가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하더니 놀랍게도 영적 체험에 대한 간증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개인의 체험적 차원이므로 논박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것 역시 원천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소박한 물음들을 기적으로 대체하는 일반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그 중 단연 으뜸은 볼썽사나운 한숨 소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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