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봉착점에 대한 동향이 예수로 향한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읽음'에 대한 것은 [신을 옹호하다] 약간 정도인데, 대단히 익숙한 논의이기 때문에 흥미롭지는 않다. (예수전도 읽었으나 넘긴다.) '현대적'이라는 흔한 표현으로 입장 정리를 하자면 예수는 '누구인가?'하는 불가능성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예수는 어떻게 살았고, 그게 어떻고... 신앙이... 진리가... 포스터모던이... 여기서 느낄 수 있는 무게는 깃털에도 미치지 못한다. 책은 알량하게 넘겨지고, 사물은 여전히 유일하게 부동한다. 허무에 대한 사랑을 비껴가는, 그러니까 무지에 대한 열정을 쏟을 이유는 없지만, 없는 감흥을 애써 보태어 가며 위선으로 진리를 외도하는 일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디치킨스... 이 공박의 유희는 굉장하지만 -디치킨스라니!! 아마 현장에 있었다면 구르면서까지 웃었으리라- 정작 논의가 진행될수록 사위는 어두워지고 생명은 시들해 진다.) 참을 수 없는 것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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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타인. 그 언명은 마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고통의 고지로 들린다. 그러니까 이 말을 정식화하면 이렇다. 타인의 고통. 그러니까 타인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가 나누었던 전쟁에 관한 편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문은 이미 넘어갔다.) 그 편지는 (당시에 휘기한) 전쟁 현장을 담고 있는 사진 하나를 지시하며 남/녀라는 차원을 '우리'로 환원하는 무언가를 -그 편지, 그 사진, 그녀, 그가- 이야기한다. 전쟁. 나를 수 없는 전쟁이 건너야 했던 상상력의 심연을, 사진은 전쟁이라는 현장으로 나른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그 사진이, 그 편지가, 그녀가, 그가 '우리'라고 불렀던- 우리에게 궁색하고 진부하지만 늘 논란의 대상이자 주목받는 사물이다.



 "우리의 상황은 (울프와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카메라를 매개로 전쟁을 알게 되는 오늘날의 상황에는 (고통과 폐허를 담은) 지독히 친숙하고, 지독히 유명한 이미지를 피해갈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 1936~37년 겨울 때까지만 해도 잔혹한 사진들은 별로 없었다. 울프가 『3기니』에서 ('우리'에 대해) 언급한 사진들에 담긴 전쟁의 공포는 그때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듯싶다."(45-46)



 그것은 마치 쾌락을 암시하는 듯 행동한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65) "이런 이미지를 쳐다볼 수 (없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 (그러니까) 움찔거린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쾌락이다."(67) 우리는 사안을 보지 않는다. 관능적인 에로티시즘(eroticism)의 사건을 본다. "특히 연출됐다는 사실에 우리가 적잖이 당황하게 되는 사진들은 개인이 겪는 가장 최고의 순간, 특히 사랑과 죽음을 기록한 듯이 보이는 사진들이다."(85) 그것들은 적잖은 희열을 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그 사진이, 그 편지가, 그녀가, 그가 '우리'라고 불렀던- 우리에게는 궁색하고 진부하지만 늘 논란의 대상이자 주목받는 사물성을 생산한다. "이미지의 도저히 참기 어려운 리얼리즘을 비난하면서도, 몇 마디 말과 함께 이 사진들이 자아내는 멜로드라마에 저항하지 못한다."(99) 전쟁. 그것은 리얼리즘의 피사체가 섬광처럼 영원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무대였다.



 (2) 타인. 그것은 사진이 자리할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사진은 타인의 자리인 것이다.



 주검들뿐만 아니라, 적나라한 얼굴을 공개하는 것도 늘 엄격하게 금지되어 왔다. 가드너와 오셜리번이 찍은 사진들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땅에 등을 댄 채 누워 있는 연방군과 남부동맹군 병사들의 얼굴이 너무나도 뚜렷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래로, [미국의] 주요 출판물들은 수많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전장에 쓰러져 있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사실상 (공공연하게) 두 번 다시 보여준 적이 없었다(처음에는 군부가 검열을 통해서 이런 일을 막았다). (pp.108-109)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그런 품위 차리기"들, "사상자들은 늘 숙여져 있거나 뭔가에 덮여 있지 않으면, 얼굴이 안 보이는 쪽으로 돌려져 있"는 한껏 격실을 차린 그런 사진들. 그것은 사진의 공간이 누구를 위한 자리인가를 표징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109)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러니까 반드시 치유해야하지만)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110)



 한편으로는 "…(이)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리는 막연함을 '포착'한다. (122) "사진은 사진을 흉내내기 마련"이며, 그 "친숙함은 현재, 그리고 얼마 안 된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감각을 형성해 놓는다."(129,130) 피사체의 향연. 걸레 조각처럼 난자당한 채 매달려서도 여전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그 끈질기게 역동하는 생명력의 향연. 생에 대한 희열. "… 고통의 관점, 즉 타인의 고통에 관한 관점이다. 이 관점은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고통을 뭔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불의의 사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관점이다."(149-150) 타인은 고통이다. 고통은 유일하게 우리를 매개하는 관점이며, 따라서 타인은 고통이다. 일치를 볼 수 없는 고통이라는 입장을 유일하게 참조할 수 있는 '나'가 아닌 영역, 그곳이 타인이며, 타인은 고통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166) 타인은 고통을 제공한다.


 그렇게 모두는 타인이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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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


'외상적인 진실들'... (그러니까 진실이 외상적이라는 현실.. 일반 농가의 허름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문자 그대로- 모가지가 따여 피를 질질 흘리는 닭의 모습과 대조되는 첨단 시설)


진부한 담론..


그러나 새로운 이야기.. (가령 음식의 재료가 되는 가공물, 그러니까 원재료가 사육되는 가축 환경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어느 정도 통용되는 인식이지만, 그 구체성에 있어서는 늘 새로운 이야기들이 수혈되는. 가령 '친환경'이라고 선전되는 업체들이 사실은 거대한 식품 회사의 후원과 인수로 유지되는..)


그런 이야기로 채워진 영화다.



그리고 영화는 food라는 주식회사의 소비자를 주주 주체로 바꿈으로써 food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점점 우리에게서 좋고, 유익한 음식을 요구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공급할 거예요. 약속드리죠. 우리는 (소비를 쫓는) 영악한 사람들이죠. 우린 공급해요. 그게 할 말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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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성, 소유권. 벌써 짐작되지 않는가? 공공은 성격이고 소유는 권리다. 존재의 차원에서도 역시 공공의 권리, 그러니까 공공권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공성과 소유권이라는 차원이 지닌 차이를 흘러 놓치게 하진 않는다. 둘의 입장은 하나의 입점에 놓이게 된다. 공공성. 그것은 환경에 따라 놓이게 되는 공공의 성격이고. 소유권. 그것은 자신에 입각하는 장전적인 소유 권리인 것이다. 몰지각을 가르는 차이는 거기이다. 공공은 환경에 의해 주어진 것이고, 소유는 자신을 장전하는 것. 통신사 대리점 앞에 이런 현수막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해지 위약금 100% 최대 보장." 해지 위약금의 완전한 보장이 아닌 100%로 최대 보장. 여기서 얻는 가장 정직한 교훈은, 논리적 실증성의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당하는 놈이 바보. 마이클 하트는 바로 여기에 "묵시록의 두 얼굴"을 이야기한다. 전혀 자각하지 못했던 가치를 통각하고 일깨우는 일로써 말이다. 그것은 "삶가치(value of life)를 유일하게 유효한 가치평가의 척도로서 부과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2009년 12월 나는 제15차 UN 기후변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갔다. … 공식 모임에 참석한 것은 아니고, 공식 참가집단들의 행위(더욱 중요하게는 그들의 행위 부재)를 겨냥한 회의장 바깥에서의 일련의 시위 행동에 참여했다. … 반자본주의적 사회운동과 기후변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운동 사이의 관계가 … 나로 하여금 시위를 구성했던 주요한 두 부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론적인 고찰을 하도록 만들었다. 



 생태주의는 인간이 한계를 모르는 자만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그러니까 환경 친화적인 생태적 인간 실현), 사회주의는 인간이야말로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초극성을 주장하기에 둘은 '보이기에 따라' 너무도 다른 노선이라는 것이다. 즉 "따라서 한 영역에서는 보존에 대한 요구와 한계에 대한 이야기가 논의의 주를 이루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다른 영역에서의 논의는 무한한 창조적 잠재성에 대한 찬사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변부의 관찰에서 벗어나 주변 그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그곳에 '모였다'라는 행동 자체가 "삶가치를 유일하게 유효한 가치평가의 척도로서 부과"되는, 그러니까 "생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분할선이" 흐려지는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느끼게 되는 감각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산업생산이 중심이었던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물질적 혹은 삶정치적 생산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경제로의 획기적 전환의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 세계라고 명명되는 형태가 봉착하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1. 그 자체로 운행함으로써 존재하는 내적인 모순이다. 생산. 그것은 "많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은 개방된 방식으로 공유될 때에만 그것이 가진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기능한다. 어떤 생각이나 정동이 당신에게 가지는 유용성은 그 생각이나 정동을 나와 공유한다고 해서 감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유함으로써만 유용해진다." 학업과 취업의 상관 고리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진행되는 현행에선 "하나의 강력한 모순이 … 심장부에서 부상하고 있다.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자본주의적 축적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사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사이의 모순이 그것이다." 치료제와 판권은 그 사이의 긴장감을 표현한다. 널리 이로운 것은 돈이 된다는 사실의 측정이고, 그것이 생산의 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아마존 식물에 대한 토착민들의 지식과 그것의 약효 성분을 초국적 기업이 그 특허권을 획득하여 사유재산이 되었다. 그 결과는 부당할 뿐만 아니라 파괴적이다.



 2. 그리고 그 현행성이 "누구도 측정할 수" 없는 "파괴되는 삶형태들"을 결정짓는다는 점이다. "방글라데시의 절반이 물에 잠기는 것, 에티오피아의 영구적인 가뭄, 이뉴잇족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파괴되는 것이 얼마만큼의 액수에 해당될 것인가? … 일하다 손가락을 잃는 것에 대해 당신이 얼마만큼의 돈을 보상받을 수 있는지, 눈이나 팔을 잃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의 돈을 보상받을 수 있는지를 산정한 보험회사의 보상기준표를 읽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혐오와 분노가 일어난다."


 따라서 그는 각자의 노선을 구축하는 사회주의와 생태주의라는 "두 형태가 공유하는 이 두 가지 논리", 그러니까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가 소유관계에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합리성이라는 전통적인 척도에도 저항하는 것 … 이들 두 외형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공통적이고 공유하는- "기반이 된다." 그는 우리는 산업생산이 중심이었던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물질적 혹은 삶정치적 생산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경제로의 획기적 전환의 한 가운데 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 둘은 "생산과 재생산의 전통적인 분할이 사실상 깨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일단 인식하고 나면, 한 영역에서는 보존을, 다른 영역에서는 창조를 요구하는 것이 실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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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한자로 풀이하면, 그러니까 主人으로 놓고 보았을 때, 그 의미가 주체와 있어서 명확하다. 주인은 人에 主하다. 즉 노예사적 정신 상태가 주인인 것이다. 한갓 주인에겐 역사가 없다. 노예를 자기로 인식하는 한에서 주인은 자기를 인식한다. 이와는 다르게 주체는 역사적 사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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