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요리사의 책이다. 주제 음식이 있고 저자의 일화와 주제사적 지식(??)이 곁들여져 있다. 나는 원래 '맛있게'라는 인간의 포지션이 매우 불만이었던 사람으로, 요식이란 건 배부르면 장땡주의자였다. 가격대비 성능에서 맛이라는 요소 항목은 먹을 수 있는지의 여부 따위 정도. 인간이 먹기 위해 일삼는 무분별한 사치를 생각하면 내 생각은 더욱 타당했다.


 하지만 최근의 나는 여전히 그런 발상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살기 위해 먹는다' 따위의 생각과는 이별했다. 인간이 자행(!)하는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각적인지를, 쌉싸름한 시금치를 먹으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책이 뜨거운 한 숟가락이 아니라 한입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노중훈의 여행의 맛 잘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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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 말았다. 작품에 대한 개별 사례론으로 기대했는데 내 헛발이었다. 모든 것에서 재미를 추구하려는 현대적 괴질에 걸린 나로는 진지한 문학론에 질려버린 것이다. 다만 히익! 오따꾸를 전개해 나가는 작가의 고찰은 나에게 백수라는 즐거운 상상력을 떠올리게 해준다. 팍팍한 살림이 아니라 한가롭고 세상의 다분화된 주절거림들이 말이다. 지나칠 정도로 멍청하지만 유쾌한 에너지의 생각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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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는 발제다. 물론 수학에 대한 신적 권위에 대해서는 별로 찬동할 사람이 많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이 문제로 가기 위한 책에 소개된 도발적인(?) 이야기들.


 (마틴 가드너에게서는) 인간이 그 존재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가드너는 다음과 같은 재치 있는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공룡 두 마리가 숲속 공터에서 다른 공룡 두 마리와 마주쳤다면 그곳에는 네 마리의 공룡이 있게 된다. 그 공룡들을 관찰할 인간도 없고, 공룡이 자신들의 수가 넷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영리하지 못해도 공룡이 네 마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이클 이티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개념을 과연 지켜낼 수 있을까? 만약 우주가 1차원이었거나 불연속적이었다면 기하학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수는 확고한 토대 위에 존재하며 수를 세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를 한번 상상해 보자. 만약 지적인 능력이 인류가 아닌 광활한 태평양 같은 깊은 곳에서 홀로 떠다니며 살아가는 해파리에게 있었다면 어떨까? 이 해파리는 개체라는 것을 대한 경험이 전혀 없고 주위에는 오로지 물밖에 없다. 그렇다면 물의 움직임과 온도와 압력 같은 것이 이 해파리의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기본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속적인 세계에서는 불연속적인 수 개념이 발달하지 못하고 셀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수학사도 겸하기 때문에 고전역학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뒤에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대한 다차원적인 접근이라든지 확률 문제는 반납일이 코앞이어서 읽지 않고 그대로 반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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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연민, 그러니까 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어떤 인간적인 동정을 느꼈다. 니체가 혐오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개념에 들어가는 그 정신을 말이다. 나는 비로소 그 정신이 긍정이 아닌 비관적인 에너지, 허무의 초석이 아니라 끝없는 세계의 정념임을 몸소 깨닫는다. 동시대의 연대감이 아니라 그 결과물인 고마움에 대해 생각할 때,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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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당연하지만-당연히)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또한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한' 책이다. 그의 '문제작'인 오리엔탈리즘을 필두로 하여 그 생각들로 하여금 에드워드 사이드를 구성하게 한다. 서구와 비서구라는 분법 자체에서부터 은연히 자리한 서구주의 담화를 밝히고, 서구를 서구답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서구로 하여금 비서구답게 하는 출현과 재현의 양식들을 통찰하고 비평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구와 비서구의 대립이 아니라 대립이라는 함몰된 양식이다.

 이 책은 집요하게 사이드의 세계성을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수한다. 지식이 (설령 그 자신이 뜻하지 않더라도) 봉사하는 문화 권력 속에서 "민족주의적 독립의 영역에서 해방이론 영역으로의 거대한 문화적 전환"이라고 표현되는 비평적 힘, 즉 "권력을 향해 진리"를 말함으로써 말이다. 비평과 세계성의 관계는 이렇게 요약된다.


 "대립하는 양쪽, 반드시 어느 한 편에 서게 되는 전쟁, 이 한가운데에서조차 비평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쟁점과 문제를 둘러싸고 혹은 어떤 가치나 심지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울 때, 거기에는 이미 비평적 의식이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행위자를 사유하는 방식은 그의 저작들이 저항의 이론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책 껍데기의 가정처럼 "에드워드 사이드가 없었다면" '가장 익숙한 낯섦음과의 조우'를 조금 늦게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역시 가정된 가능성이다.)

 

 이 책을 읽으며 으레 외국인이면 물어보는 한국 문화에 대한 질문과 흔히 매체에서 대답되는 24시간과 배달(이 둘은 결국 합쳐 24시간 배달이 되는데)과 자신이 살던 자국에서 겪던 '불편'과 판이하게 다른 편함에 대한 증언과 부연 설명 그리고 그렇게 한국(인)으로써 여길 자랑거리 혹은 자부가 되는 문화론이 떠올랐다. 이 책은 단순히 나가 구상하는 너라는 대항적 관계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그것을 이루는 세계 그곳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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