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찐의 『행위의 철학으로』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를 읽고 있다. 이득재 씨의 논의에 따르자면, "바흐찐에게 세계는 그저 막연하게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주체가 주어진 것에 참여했을 때 만들어지는 사건", 따라서 바흐찐은 칸트에게서 분리된 지식의 세 영역, 이론·윤리학·미학을 "하나의 통일된 사건 안으로 재통일하려 했다."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행위로, "바흐찐은 자기와 동시대의 철학 흐름들을 '이론적인 독백주의'로 비판하는 가운데 자기의 '행위의 철학'을 확립시켜 나간다." 그에게 있어 "삶은 구체적인 응답성 안에서만 의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세계 안에 '존재'하기 시작하고 세계 안에서 자기의 '존재'를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자본주의를 위해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곧 "삶이 세계를 구성할 수 없고, 바흐찐 식으로 말하면 세계를 사건으로 만드는 힘이 삶으로부터 제거되어 버려 행위가 세계 안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 … 세계는 독백주의로 변질되어 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고 '부과된 것'"이라는 바흐찐의 논리를 구조적으로 전치(轉置)한다면, 결국 (세계가 자본의 획일적인 운동에 함몰된) 세계란 '만들어진 것'이거나 '부과된 것'이지 않고 순전히 '주어진 것', 따라서 "주체가 존재라는 알리바이에 갇혀 타자와의 응답성을 상실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의미 선상에서 논자는 묻는다.



 당대를 지구화를 빙자한 신자유주의로 파악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계를 과연 인식한 것인가? … (바흐찐에 따르면) '삶은 응답성 안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우리가 산다는 것은 대화적으로 사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자본 세계는 "석화된 세계"로, 미적인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공존재를 미적으로 구축하는 "공존재의 실현은, 미적으로 삶으로써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미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세계는 그 자체로서 적극적으로 인식될 수" 없게 된다. 논자는 "육체적인 충동이 추상적인 욕구의 전제주의에서 해방되었을 때에만 미적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 테리 이글턴의 자본주의 비판을 끌어온다.


 논자는 그러면서도 바흐찐의 대화주의에서 나타나는 응답성 역시 독백으로 환원될 위험성을 지적한다. "실제로 타자의 응답성이란 (오리엔탈리즘의 담론처럼) 나에 의해 구성된 용어에 따라서 나에게 말을 걸고 응답하는 것뿐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바흐찐의 대화주의는 아직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맑스적으로 이어받으면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각도에서 해석하는 일만을 열중했다. 문제의 핵심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겠다.



※논문은 《현대사상》(1호)에 해당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데거'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오게 되는 일련의 학군이 있기 때문에 그런 도움으로 하이데거를 맥락으로 읽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결국 피동적인 이해로 단지 수적인 이해관계만 충족시키는 문맥으로 전락할 위험 역시 다분하지만 말이다. 나는 우선 박찬국 교수가 지은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를 뽑아들었다. 동녘에서 먼저 출간된 이 책은, 현재 그린비의 'he-story' 시리즈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읽게 된 책은 동녘판본인데, 쪽수에 별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크게 달라지거나 한 건 없어 보인다. 나는 하이데거의 나치 전력이라는 중기까지만 읽고, 그 뒤에서 다루는 현대 문명과 테크네 문제는 차차 고민해갈 생각이다.


 그의 해설을 따라가 보자면, 하이데거(물론 여기서 하이데거에게만 국한되는 문제적 질감은 아니다)에게 있어 "현대 기술문명의 위기는, 궁극적으로 … 고향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믿고서 디딜 수 있는 신뢰 공간의 부재 감각은 "공허감과 불안감"을 주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하고 물질적인 소비와 향락을 추구"하는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대체할 수 없는 심적 공허를 물적 공복으로 채우려는 사태 자체의 '궁핍'이 기술 닥달의 시대를 낳는다. 이것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연장적 사물을 인식하는 자(pp.28-29)를 의미한다.


 닭은 단순히 알을 낳는 에너지원으로 고찰된다. 이와 함께 닭의 독자적인 존재 방식은 무시되고 오직 알을 더 많이 낳게 하려는 목적에서 사육된다. 닭들은 좁은 닭장 속에서 집단적으로 사육되면서 알을 까는 기계로 전락하는 것이다.



 존재는 '세계-내-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계-존재'한다. '내'적 사태가 소거되는 상태에서 존재란 세계의 사태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는 화해할 수 없는 상태로 세계에 절박하게 근거한다. 자기를 물을 수 없는 존재. 세계와 친화할 수 없는 존재. 기쁨이 사라진 존재. 누군가에게 '존재했음'이란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세계. 생탁(生托)만이 사태로 존재하는 세계...



 이런 단순노동은 언제나 채울 수 있잖아요. 그리고 누구나 30분 안에 배울 수 있고. 나사 같은 존재죠. 나사, 나사 중에서도 저기 뭐야, 제일 그런.. ①



 박찬국 씨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존재의 소리'에 주목한다. "'모든 산봉우리에 정적이 있다'라는 괴테의 시구 … (에서) '있다'는 단어가 너무도 소박하게 말해지고 있(다.) … 이러한 소박함은 희귀한 풍요로움과 충만함을 간직한 소박함이다."(35) 그것은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으로(98), 죽음은 그것을 그러하게 고지한다. 



 현존재는 이제 자기 자신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가 '있다'는 사실을 섬뜩하고 황량한 사실로 경험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경이로운 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110-111)



 죽음은 외적인 겁박이 아닌,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질책하는 소리이며, 나의 본래적인 존재를 내가 만든 것이 아님에도 '나의' 것으로 인수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는 소리"이다(125). 죽음은 무한성이라는 시간으로 주어진 생을 유한한 삶으로 개현시킨다.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각자의 고유성을 자각하는 사건이었다. … 막스 뮐러는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 생의 일회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말한다."(127)



-



 『논어』를 여는 첫 글은 단독으로 보자면 매우 평이하고, 논어라는 사태에서 보자면 그 유명세라는 가치에 비해서 너무 시시하다.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고대 중국이라는 장대한 스케일의 뿌리가 되는 공자라는 인물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그러나 살면서 그것을 되새김질할수록 그 평이함이 지닌 '대체 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뜻을 같이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를 읽으면서 이 구절이 많이 생각났다.




 













이종희, 이영롱-24시간 사회의 이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문은 '소비 단위로서의 역사'라는 사태에 주목하면서 팩션이라는 역사 장르를 점검하기 위해 '리진'(Li-Tsin)이라는 인물에 천착한다. 리진이라는 인물의 개요는 대강 이러하다.



 빼어난 미모의 무희인 리진이 당시 조선에 주재했던 프랑스 대리공사의 눈에 들어가게 되고, 그는 리진에게서 '차이'를 초월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황제로부터 '노비'인 그녀를 요구한다. 그런 요구에 황제는 너그러이 그에게 (노비인) 그녀를 하사했다. 여러 시간을 가까이서 지내게 된 그는 리진과의 시간이 더 무르익을수록 커지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결국에는 귀국길을 그녀와 함께하면서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나날도 잠시, 다시 서울에 부임하게 된 그를 따라 귀국하게 된 리진 앞에 놓인 조선이라는 고질적인 운명의 장난은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조선에서 영원히 노비에 속박된 신분이었고, 따라서 그녀의 그러한 변화는 조선 사회에서 받아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조선 사회에 귀속돼 무희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했던 (계몽된)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금박(feuille d'or)으로 자살했다.①



 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대해 주진오 씨는 리진을 유일하게 증명해 주는 『En Corée』를 분석하면서 이것을 저술한 프랑댕이 한국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한국인을 미개하다고" 보는 등 철저한 자문명 중심적인 서술에 입각해 있다고 말한다. 거기다 한국에 소재하지 않은 시절의 역사적 사건까지 (맞지 않게) 서술한 점에서 신뢰와 타당, 두 영역 모두에서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음으로 주진오 씨는 주어진 이야기를 긍정하는 태도로 읽어도 결국에는 자기 모순 상황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주진오 씨는 "대리 공사가 처음 여인을 원할 때 국왕은 어떻게 남의 재산이었던 노비를 마음대로 외국 공사에게 줄 수 있었다는 말인가? 줄 수는 있었는데, 다시 데려가는 것은 막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며, 나아가 "열강의 이권침탈이 자행되던 시기에 외국 공사의 아내를 빼앗아갈 수 있을 만큼 강심장이 되었다는 말인가" 묻는다.


 이 외에도 그가 문제 삼는 것들이 몇몇 더 있지만 큰 그림으로 펼칠 수 있는 얼개들은 대강 그렇겠다. (깊이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해당 논문 일독을 권한다.) 주진오 씨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팩션이지만, 그러면서도 "현지답사 강조가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을 고증에 충실한 역사소설로 오인하게 만들었고, 역사다큐멘터리가 리진을 실존 인물로 확인해 주었다. … 이제 사람들은 리진을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익에 따라 희생당한 가련한 여인이라고 본다. … 그래서 우리에게 그녀는 서구에 살았던 최초의 신여성이면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근대의 딸이 되었다. … 얼마나 리진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과 현지답사를 거쳤는지 밝히고 있다. … 하지만 그들은 모두 리진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젊은 대리공사일 수조차 없는 플랑시의 삶을 따라다녔을 뿐이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① (자살 방법에 있어서는 정확한 인용이 없어 불분명한데, 해당 논문은 "금조각을 삼키고 자살하고 말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금박을 이용해 기도를 막아 자기 숨을 끊는 방법이 중국에서 활용되었고, 프랑댕 이력에 중국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주진오 교수의 '오리엔탈리즘과 센세이셔널리즘이 만들어낸 허구'에서 입각해 보면, 보다 흥미로운 추측이 가능해 진다.)

















 논자는 이 책이 프랑댕 단독 저술이 아니라 '보티에'와 함께 저술했다는 점이 쉽게 간과됨을 지적한다. "저자가 프랑댕만이 아니라 끌라르 보티에 여사와의 공저이며, 그것도 그녀의 이름이 앞에 나와 있다는 점이다." 논문에서는 "공사까지 지낸 외교관"인 프랑댕이 책을 단독으로 집필할 능력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공동 집필자로서의 그녀 역할'이 이 책에서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고 제기한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사물object은 리진이며, 이야기에 '이입'하는 기준점space 역시 리진이다. 그리고 거기서 공통된 서술은 비극이라는 서정이다.)































 주진오 씨는 "신경숙의 소설 표지에는 굳이 영어로 'Lee Jin'이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다. 위에서 했던 '이입'이라는 사태에서 놓고 이것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체는 주체의 응시를 받으니까 말이다.)
















 주진오 씨는 이 작업이 "오랜 노력 끝에 만든 결과물(들)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며, 바람직한 협력방안과 상호 소통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나 역시도 《한국사 傳 통해 이미 '리진'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던 터라 이런 논쟁이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 다시 '종북'(자세하게는 김일성 연구에서 [맥락없는] '표현'들이지만) 논란이 되고 있는 한홍구 씨의 글이다. 그의 책인 『대한민국史』를 차용하자면 "미치도록 잡고" 싶었지만(3권), 간첩"의 짜릿한 감격은" 없었던(1권), 우리 '한국현대사의 그늘'을 조명하고 있다. 그는 남파공작 사례들을 조사하고 종합하면서 이것을 "분단시대의 남과 북은 평범하면서도 고귀한 인간들에게 너도 나도 역사의 흙탕물에 과감히 뛰어들 것을 요구했"고, "여기에 뛰어든 사람들, 특히 남파공작원들은 역사의 격랑에 (…) 본인의 동의를 전제로 한 숭고한 허망함"이라고 표현한다.



 1961년 7월 육상으로 침투한 김중종은 국군 8사단 부대마크를 달고 나왔으나, 8사단은 두어 달 전에 다른 부대로 교체되었다. 한국에 쿠데타가 났는데 부대 이동은 없었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적정 탐지를 책임진 부서에서는 전방은 미군 관할이니 부대 이동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중종은 이 마크 때문에 수사 받을 때 계속 놀림을 받았다고 분개했다. 게다가 자신이 내려오기 전날, 인민군 쪽의 정찰조가 남쪽에 침투했다가 발각되어 남측 지역에 비상이 떨어졌는데 당 쪽에서는 이런 일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냥 범의 아가리 속에 들어간 꼴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논리적인 이유'에서 쌍방이 간첩을 생산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테러"를 가했던 상황을 "슬프게 보내고 슬프게 맞이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례와 떨어져선 읽히기 어려운 글이기에 너무 많은 것을 여기서 담기보다는 관심이 있다면 일독하는 것을 권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일제의 사뭇 다른 풍경을 보너스로 얻게 된다.)


※논문은 《역사비평》(94호)에 해당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당을 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시장'은 내게 있어서 그리 낯선 공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익숙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억지이기에 적당히 '되도록'이라는 표현 없이도 이용하게 되는 곳이 내게 있어서 시장이라는 곳이다. 정말이지 더도 덜도 말고 '장을 볼 필요가 있기에' 있는 곳, 그곳이 시장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라는 의미에서 재래시장을 찾는 이들에게 시장은 하나의 환(등)상이다. (현대판 아케이드라고 할까.) 매체를 통해 부지기수로 생산되는 시장에 대한 처절한 담론들은 외상적인 충격의 경험으로 되돌아오고야 만다.


 '손님을 식구 대하듯'(물론 식구는 자신을 포함하는 의미인데)이라는 표어에 충실한 나머지 정말 '나도 먹을 수 있다'는 그 단순한 이유 하나로 '가정적인' 위생 상태와 '버리면 아깝다'는 가계적인(?) 씀씀이. 기침한 손 그대로 (손맛이 살아 숨을 쉬는 그런) 찬을 집어 내오던 국밥집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여기에 대형마트에 대항하는 가치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시장의 '인심'이라는 어용도 얼마나 '푸짐한지'를 알고 보면 당황스럽다. 불친절마저도 '인심'이고 (결정적으로는) '그것이야말로 인간미'이기 때문이다. 아마 인정(人情)을 이유로 시장을 찾았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받게되는 '상처'가 아닐까 한다. 거기다 순전히 제품에 대한 책임이 소비자 안목에 전적으로 전가되는 탓에 시장에서는 (결과적으로) '당하는 놈만' 바보라는 인식이 철저하게 자리하고 있어 시장 스스로가 진입을 어렵게 하는 일종의 바리게이트화 되어 있다. (특히 노점의 경우에는 고정적인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 샀다가는 나중에 피해를 보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뜨고 난' 자리에 물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여기서 절대화되고 맹신화된 '되도록'이라는 차원에 대해서도 역시 수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오는 이들에게 실망으로 재의미화 하는 것, 시장을 여전히 피동적인 '골목'으로 있게 하는 그 맹신적인 능동성은 반성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