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은 '소비 단위로서의 역사'라는 사태에 주목하면서 팩션이라는 역사 장르를 점검하기 위해 '리진'(Li-Tsin)이라는 인물에 천착한다. 리진이라는 인물의 개요는 대강 이러하다.
빼어난 미모의 무희인 리진이 당시 조선에 주재했던 프랑스 대리공사의 눈에 들어가게 되고, 그는 리진에게서 '차이'를 초월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황제로부터 '노비'인 그녀를 요구한다. 그런 요구에 황제는 너그러이 그에게 (노비인) 그녀를 하사했다. 여러 시간을 가까이서 지내게 된 그는 리진과의 시간이 더 무르익을수록 커지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결국에는 귀국길을 그녀와 함께하면서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나날도 잠시, 다시 서울에 부임하게 된 그를 따라 귀국하게 된 리진 앞에 놓인 조선이라는 고질적인 운명의 장난은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조선에서 영원히 노비에 속박된 신분이었고, 따라서 그녀의 그러한 변화는 조선 사회에서 받아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조선 사회에 귀속돼 무희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했던 (계몽된)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금박(feuille d'or)으로 자살했다.①
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대해 주진오 씨는 리진을 유일하게 증명해 주는 『En Corée』를 분석하면서 이것을 저술한 프랑댕이 한국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한국인을 미개하다고" 보는 등 철저한 자문명 중심적인 서술에 입각해 있다고 말한다. 거기다 한국에 소재하지 않은 시절의 역사적 사건까지 (맞지 않게) 서술한 점에서 신뢰와 타당, 두 영역 모두에서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음으로 주진오 씨는 주어진 이야기를 긍정하는 태도로 읽어도 결국에는 자기 모순 상황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주진오 씨는 "대리 공사가 처음 여인을 원할 때 국왕은 어떻게 남의 재산이었던 노비를 마음대로 외국 공사에게 줄 수 있었다는 말인가? 줄 수는 있었는데, 다시 데려가는 것은 막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며, 나아가 "열강의 이권침탈이 자행되던 시기에 외국 공사의 아내를 빼앗아갈 수 있을 만큼 강심장이 되었다는 말인가" 묻는다.
이 외에도 그가 문제 삼는 것들이 몇몇 더 있지만 큰 그림으로 펼칠 수 있는 얼개들은 대강 그렇겠다. (깊이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해당 논문 일독을 권한다.) 주진오 씨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팩션이지만, 그러면서도 "현지답사 강조가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을 고증에 충실한 역사소설로 오인하게 만들었고, 역사다큐멘터리가 리진을 실존 인물로 확인해 주었다. … 이제 사람들은 리진을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익에 따라 희생당한 가련한 여인이라고 본다. … 그래서 우리에게 그녀는 서구에 살았던 최초의 신여성이면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근대의 딸이 되었다. … 얼마나 리진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과 현지답사를 거쳤는지 밝히고 있다. … 하지만 그들은 모두 리진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젊은 대리공사일 수조차 없는 플랑시의 삶을 따라다녔을 뿐이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① (자살 방법에 있어서는 정확한 인용이 없어 불분명한데, 해당 논문은 "금조각을 삼키고 자살하고 말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금박을 이용해 기도를 막아 자기 숨을 끊는 방법이 중국에서 활용되었고, 프랑댕 이력에 중국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주진오 교수의 '오리엔탈리즘과 센세이셔널리즘이 만들어낸 허구'에서 입각해 보면, 보다 흥미로운 추측이 가능해 진다.)
논자는 이 책이 프랑댕 단독 저술이 아니라 '보티에'와 함께 저술했다는 점이 쉽게 간과됨을 지적한다. "저자가 프랑댕만이 아니라 끌라르 보티에 여사와의 공저이며, 그것도 그녀의 이름이 앞에 나와 있다는 점이다." 논문에서는 "공사까지 지낸 외교관"인 프랑댕이 책을 단독으로 집필할 능력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공동 집필자로서의 그녀 역할'이 이 책에서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고 제기한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사물object은 리진이며, 이야기에 '이입'하는 기준점space 역시 리진이다. 그리고 거기서 공통된 서술은 비극이라는 서정이다.)
주진오 씨는 "신경숙의 소설 표지에는 굳이 영어로 'Lee Jin'이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다. 위에서 했던 '이입'이라는 사태에서 놓고 이것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체는 주체의 응시를 받으니까 말이다.)
주진오 씨는 이 작업이 "오랜 노력 끝에 만든 결과물(들)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며, 바람직한 협력방안과 상호 소통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나 역시도 《한국사 傳》을 통해 이미 '리진'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던 터라 이런 논쟁이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