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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 여자, 당신이 기다려 온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1
노엘라 (Noella) 지음 / 나무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노엘라의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나무 수, 2010년 3월)”는 서로 다른 장르이면서도 같은 감동을 담아내는 두 예술을 통해서 비록 직업을 가지지 않은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라도 예술“적” 삶을 꿈꿔볼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램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그림과 음악에서 다양한 사랑의 모습과 감정을 느끼고 종종 함께 보고 들으면 감정이 배가되는 것을 발견한다고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화가와 음악가, 그러나 서로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는 그들의 작품과 인생을 알아가는 설레임을 통해서 삶이 한층 더 농밀해지길, 그리고 예술적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베를리오즈의 음악과 들라크루아의 그림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작가가

사람이 마치 알코올에 중독된 것처럼 날 지배할 때,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 거릴 때,

내가 사랑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만났다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베를리오즈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헤리어트 스미드슨에 대한 광적인 러브스토리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마녀로 둔갑시키는 이 작품에서 그가 얼마나 사랑에 집착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결국 3년 후 그는 스미드슨과 결혼을 했지만 10년 만에 별거하게 되고 다시 10년 후 그녀는 쓸쓸히 죽고 만다. 동시대를 살았던 로맨티시즘을 대표하는 화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라는 그림에서는 자신의 여인들과 말이 죽어가는 모습을 한판을 베고 누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바라보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을 묘사하는 그림을 보며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던, 죽음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또 다른 집착을 느끼게 된다. 결국 들라크루아의 색처럼 강렬하게, 베를리오즈의 음악처럼 현란한 사랑의 유혹에, 사랑에 취해, 사랑에 물드는 감성이 자신을 지배하는 그 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외에도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터치로 유명한 “뭉크”의 그림 <절규> 장조와 단조 같은 조성이 없는 무조음악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쉰베르크의 음악 <달에 홀린 피에르>를 통해 꿈과 현실을 분간할 수 없는 악몽과 공포, 환상을 이야기하고, <최후의 심판>, <다비드>상의 미켈렌젤로와 <압살롬 내 아들아>의 천재작곡가 “조스캥 데프레”를 보고 들으면서 완전할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완벽을 추구한 그들의 노력과 변화보다는 지키려는 열정 그리고 과함보다는 절제된 미를 추구한 부그로의 그림과 브람스의 음악들은 더욱더 깊은 내면의 세계로 이끌며 진정한 의미의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내면과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하며, 전통예술을 부정하고 예술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하며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다다이즘의 뒤샹의 그림과 조각, 사터의 음악을 통해서 나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창조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림과 음악들, 한번쯤은 보고 들었을 작품들인데 이렇게 음악과 그림을 어우러져 감상을 하니 색다르고 새로운 감동이 느껴진다. 고야의 그림을 보면서 베토벤의 음악을 떠올리고, 비제의 카르멘을 들으면 로트레크의 그림을 떠올리는 것, 어찌보면 서로 반대되는 감각을 통해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것, 제목 그대로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그런 순간은 피상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이 느껴지는 전율과 같은 감동, 감성이 자신을 올곧이 지배하는 그런 순간이 아닐까? 이 서평을 쓰면서 틀어놓은 책 속 부록인 CD에서 9번째 곡 드뷔시의 <바다> 1악장 ‘바람과 바다의 대화’의 선율이 흘러나오면서 햇빛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는 클로드 모네의 “루앙 대성당”이 떠오른다. 마치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들으면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플래툰”에서 두 손을 들어 절규하는 병사의 모습을 떠올리듯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떠올리면 스타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귓전을 맴돌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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