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핏빛 자오선>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로드>에 이어 세 번째 만나는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1933~)의 작품으로 1985년에 발표되었다. 미국의 평론가 헤럴드 블룸이 '현존하는 미국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로 매카시는 이 작품으로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 아이를 보라'라는 예언서에서나 나올 법한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 아이'의 여정을 따라가며 전개된다. 1833년 미국 테네시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주인공인 소년은 열네 살에 가출하여 여기 저기를 떠돌며 거친 생활을 시작한다. 

때는 1800년대 중반 미국과 멕시코 간의 전쟁이 끝난 무렵으로 구걸과 도적질을 하며 떠돌던 소년은 백인 우월주의자 화이트 대위에 의해 비정규군에 가입하게 되고 멕시코로 원정을 떠난다. 그러나 이국의 땅에서 코만치 부족을 만나 전투를 벌이다 군 전체가 거의 박살이 나고, 소년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만 멕시코 군대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다. 

그 후 글랜턴이라는 자가 이끄는 용병대에 가담하게 되는데, 글랜턴 일당은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벗겨 멕시코 주 정부로부터 돈을 받는 집단으로 일명 '머리가죽 사냥꾼들'이다. 이들은 습격과 약탈을 일삼는 인디언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멕시코 정부에 의해 고용되었지만 이들에게 머리 가죽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영수증'이었기에 이들의 전투는 인종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살육으로 번진다. 다음은 이들 열 아홉 명의 용병대가 천 명의 인디언을 죽인 대학살 장면 중 일부이다. 


[시체들이 바다에서 일어난 대재앙의 희생자인 양 물가에 나뒹굴었다. 소금으로 얼룩져 있던 호숫가는 순식간에 피와 내장으로 뒤덮였다.(...)군인들은 시신을 아무 이유 없이 난도질하며 시뻘건 물 속을 돌아다녔고, 몇몇은 호숫가에서 죽어 가거나 죽은 젊은 여인네의 구타당한 몸뚱이에 들러붙었다. 델라웨어 하나는 시장에 장사 나온 행상인처럼 머리 가죽 다발을 들고 다녔다. 손목에 묶인 머리카락 끝에는 머리 가죽이 서로 엉겨 붙었다. 이곳에서의 매 순간순간이 훗날 사막에서 입에 오르내리리나는 사실을 잘 아는 글랜턴은 부하들 사이로 말을 몰며 열심히 독려했다. (p.209)]


<핏빛 자오선>에서 보여주는 서부의 모습은 온갖 살육과 폭력이 난무하는 혼돈 그 자체이다. '태양이 창백한 빛줄기를 뿜어내다 느닷없이 핏빛을 뚝뚝 흘리며 평원을 불태'(p.67)울 것만 같은, 가는 곳마다 인간과 동물의 사체와 해골이 널려 있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세상이다. 

서부 개척 이야기를 할 때 주로 백인이 인디언에게 가한 폭력을 이야기하지만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폭력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다. 백인, 인디언, 멕시코인 모두 피에 굶주린 짐승들처럼 서로를 속이고 죽이는 가운데 극한의 잔인성을 보여준다.

이런 폭력, 살인, 죽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옥 같은 세상을 작가 매카시는 건조하면서도 시적인 긴 문장으로 묘사하는데 뭔가 섬뜩하면서도 독자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가히 일품이란 생각을 했다 


[북쪽 하늘을 빠짐없이 뒤덮은 뇌운에서 검은 덩굴처럼 벋어 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비커에 묻어난 램프의 시커먼 그을음 같았다. 그날 밤 수 킬로미터 너머에서 초원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그들에게까지 실려 왔다. 바위투성이 산길을 오르자니 저 멀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산을 번개가 훤히 드러냈다. 벼락이 내려칠 때마다 바위가 울렸고 씻어낼 수 없는 형광 물질 같은 푸른 불 다발이 말에 들러붙었다. 부드러운 용광로 빛이 금속 마구에 번지고, 푸른 빛이 총신을 물처럼 흘러 다녔다. 토끼가 푸른 섬광에 미쳐 날뛰다 우뚝 서고, 쩌렁쩌렁 울리는 높은 바위산에는 독수리가 익살스레 몸을 웅크리거나 천둥에 짓밟혀 한쪽 눈이 노랗게 갈라졌다.(p.244)]


사실 나는 이 책을 참으로 힘들게 읽었다. 438페이지의 소설을 장장 9일 동안 읽었다. 살기 위해 죽이고 숨고 또 길을 떠나는 여정은 지루하고 피로했으며, 연이어 나오는 끔찍한 이야기의 잔혹함에 마음이 쉽게 지쳐서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광대한 서부의 풍경과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는 초현실적이며 때로는 잔인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고, '아 이 책은 그 '영혼을 압도하는 매혹적인 문체'를 느끼려면 원서로 읽어야 겠구나' 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읽기 힘든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한 힘은 매카시의 문체와 함께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에게 있다. 홀든 판사...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징그럽고 잔혹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핏빛 자오선>에는 선악의 구분 없이 모두가 다 악한 존재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악인은 바로 홀든 판사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년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소년을 의식하기 보다는 판사의 행동과 말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의 모습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210cm의 '거대한 덩치에 털 오라기 하나 없는 아이 같은 얼굴'(p.111)로 5개 국어를 하며, 세상에 안 가 본 곳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는, 한마디로 소설 속에서 미친 존재감을 뿜어내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무한한 지식을 활용하여 글랜턴 일당을 이끌며 뒤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글랜턴을 비롯한 용병들은 그를 정신적인 지주이자 구원자로 여기며 따른다. 

'이 세상에 나의 지식 없이 존재함은 곧 나의 허락 없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p.259)하기에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반드시 자신의 허락 하에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홀든 판사는 자신을 이 세상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이런 지배력을 무섭게 보여주는 예가 소설 속에 몇 번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어린 아이를 성적 도구로 삼다가 가차 없이 죽여버리는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판사는 모닥불가에 그 아파치 아이와 같이 앉아 있었다. 아이는 검은 딸기 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몇몇은 아이를 놀리며 웃어 댔고, 육포를 주기도 했다. 아이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아침에 군인들이 말에 안장을 얹는 동안 판사는 아이를 한쪽 무릎에 앉히고서 얼러 댔다. 토드빈은 안장을 들고 지나가며 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10분 후 말을 끌고 그 자리에 오니 아이는 머리 가죽이 벗겨진 채 죽어 있었다. (p.219)]


<핏빛 자오선>은 한 소년의 여정을 통해 사막의 모래처럼 거칠고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부 개척 시대의 모습을 인간의 잔악한 본성에 초점을 두고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로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30년을 보낸 소년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서부 개척 신화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냉철히 비판한 소설 <핏빛 자오선>, 재미가 있거나 가독성이 좋지도 않았지만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묵직함과 엄숙함을 가진 작품이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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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3-03-1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얘기인데 읽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coolcat329 2023-03-11 12:41   좋아요 0 | URL
영혼을 사로잡는다는 그 문체를 오리지날로 맛을 못 보니 참 아쉬웠습니다. 호우님도 기회되시면 읽어보세요~따뜻한 주말 잘 보내시구요~

Falstaff 2023-03-11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매카시, 이 인간은 에휴, 말을 말아야지, 징글징글해요. 근데 별오. 흠. 안 속겠습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23-03-11 15:47   좋아요 1 | URL
아 골드문트님 매카시 안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ㅎㅎ
저는 이 소설 읽으며 콘라드의 <어둠의 심연>이 떠올랐어요. 제가 좀 이런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징그럽게 피곤한 소설인 건 맞습니다. 😓

바람돌이 2023-03-11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카시는 모두 다 예쁜 말들 하나 읽었는데 좋았어요. 그런데 그 뒤 다른 책의 평이 대부분이 이렇게 잔혹함이 먼저 나오는지라 읽을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ㅠ.ㅠ

coolcat329 2023-03-12 04:59   좋아요 1 | URL
잔혹하기도 하지만 400페이지 넘게 사막, 초원, 바위 산 등을 뭐에 홀린듯이 쫓아다니는 기분이라 피로하더라구요. 좋은 일은 없는데 말이죠. 😥
<모두 다 예쁜 말들>저 갖고 있어요. 국경 삼부작의 1권이라 아마도 다음에 읽을 매카시 작품이 될 거 같네요.
좋으셨다니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