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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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은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 1873~1954)의 자전적 소설로 1928년 발표되었다. 이 전에 900페이지가 넘는 <분노의 포도>를 읽어서 쉬어 가는 의미에서 176페이지의 얇은 이 책을 골랐는데, 웬걸 도대체 무슨 말인지 책장이 안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대여섯 장을 겨우 넘겼을 때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래도 돈 주고 산 책이니 읽기로 결심하고 뒤에 나온 작가의 연보를 먼저 읽어 보았다. 


콜레트는 아버지의 파산,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 팬터마임 배우로 활약, 동성 연인과의 동거, 양아들과의 연애, 여성 작가 최초로 공쿠르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여성 작가로서 받을 수 있는 명성과 명예를 다 얻은 그녀는 '우리의 콜레트'라 불릴 만큼 프랑스 문화와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진 것만 봐도 그녀가 프랑스에서 어떤 위치의 작가인지 알 수 있다. 


작가 콜레트의 드라마틱한 삶을 알아보고 읽으니 처음보다는 책장이 잘 넘어갔지만 의식의 흐름으로 써나간 문장은 아름답지만 모호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나'는 프로방스 지방의 별장에서 고양이, 개와 함께 살며 글도 쓰고, 부업인지 취미인지는 모르지만 포도 나무도 키우면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다. 그녀는 화가, 시인, 작가 등 당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지내는데 그 가운데 파리에서 온 서른 다섯 살의 실내 장식가 비알도 있다. 비알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고 두 번의 이혼을 겪은 40대인지 50대인지 잘 모르겠는 '나'는 또 다시 찾아온 사랑 앞에서 갈등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확인한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p.136)다며 그에게 20대의 엘렌 클레망과 결혼할 것을 권유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행동일 뿐 그가 떠나고 혼자 남은 그녀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다음과 같이 드러낸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가버려라! 나타나려거든 내가 알아볼 수 없도록 몰래 오기를. 창문으로 뛰어내려 땅을 디디고, 꽃이 되어 꽃을 피우고, 새나 나비가 되어 날아가고, 소리가 되어 메아리쳐라......당신은 얼마든지 나를 기만할 수 있겠지만, 우리 어머니를 속일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고통을 잊고 껍데기를 벗어던지길. 당신이 돌아왔을 때, 나의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내가 당신을 붉은 선인장 꽃이라 부를 수 있도록. 아니면 불꽃처럼 힘겹게 피어나는 또 다른 강렬한 꽃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도록. 마귀를 쫓아낸 미래의 진정한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수 있도록. (p.173)


<여명>에서 어머니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어머니의 존재는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드러난다. '나'는 늙은 나이에도 사랑(큰 아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비알이 떠나고 혼자 남은 '나'는 호기롭게 '가버려라!' 외치면서도 '나'는 어머니를 닮았기에 자신을 속일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가 돌아왔을 때 당당히 '꽃의 이름'으로 그를 부를 수 있기를 갈망하는 이 고백은 참으로 당차고 매혹적이다. 

'오로지 포기를 통해서만 소유할 수 있다'(p.33)는 어머니의 가르침처럼 그녀가 비알을 다른 여자에게 보낸 것은 그 사랑을 성취하려는 이기심이며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삼십 년 동안 지겹게도 자신을 괴롭혔던 사랑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좀 편안하게 일상을 즐기며 살고 싶은데, 뒤늦게 찾아온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나'의 심리, 남자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흥미롭다. 


친애하는 남자여, 영원히 안녕, 그러나 당신을 환영합니다. (p.30)


오 남자여, 남자와의 우정이란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지, 우리의 우정은 아직도 휘청거리고 있구나. 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p.170)


왜 우리는 '삶에서 가장 진부한 것 중 하나인 사랑'(p.25)에 그토록 목을 매는 것일까? 사랑에 상처받고 실패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하고 싶어한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성장하는 것일까?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프랑스 여성들은 유난히 사랑을 함에 있어서 솔직하고 정열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사랑이 끝나고 치유될 때마다 '매번 새로 태어난다'(p.19)는 문장을 읽으며 '아 나는 너무 사랑을 못 해봤네...왜 그렇게 몸을 사렸을까? 이렇게 늙을 몸인데...' 나도 모르게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ㅠㅠ 


사랑의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시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으로 돌려서 표현한 소설이라 읽기가 쉽지 않았으나, 엘렌 식수가 "여성적 글쓰기의 대표적 예"라고 칭송한 것처럼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는 콜레트의 문장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얇지만 주옥같은 문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밀도 높은 책, <여명>의 몇 구절을 옮겨본다.



나는 단지 혼자가 될 뿐이지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 P16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 P19

종달새가 가장 높은 곳을 향하여,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을 향하여 올라가듯 어머니는 끊임없이 시간의 사닥다리를 올라갔다. 시작의 시작을 소유하려고 애를 쓰면서...... - P35

나이란 이 세상을 달리고 싶어 조바심내는, 자신이 아끼는 청년의 잘생긴 발을 바라보면서 던지는 달콤한 말이나 치명적인 눈물, 타는 듯이 꺼져가는 한숨과 함께 오진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부유해지지 않고는 나이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 P45

그들이 파리를 못 잊듯이, 남자인 당신은 내게 조국과도 같은 그런 존재인가? 존재의 근원인 남자여, 당신은 나의 가장 큰 걱정거리인가? 그렇다 해도 안 될 건 없다. 그러나 나의 걱정거리인 한여름의 대수롭지 않은 사랑들은, 전등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다. - P84

남자의 우아함은, 그것이 비록 말뿐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우리를 사로잡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발걸음을 늦추게 하는가! 한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희생하겠노라 말할 때 그 남자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여자의 허영심이라는 취향이 내게 아직도 살아 있는 모양이다. - P120

내가 캄캄한 밤, 고독, 동물 친구들, 드넓은 들판과 바다 같은 주위 환경에 의지하고 기댄다면 그것은 옛날에 내가 수없이 많이 노래한 여인, 홀로 곧게 살았던 여인, 잎이 다 떨어져도 자신만만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서글픈 장미 같았던 그 여인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 P165

새벽이 온다. 그 어떤 악마도 새벽이 가까이 오는 것을, 새벽의 창백함을, 새벽 푸른 빛의 미끄러짐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소중히 새벽을 품고 오는 반투명한 악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 얼마 전부터 리듬이 끊겨버린 내 삶의 윤활유가 다시 발견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기다림, 또 기다림......기다림이란 우아한 예절과 사양할 줄 아는 최고의 멋을 가르치는 그런 좋은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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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05 0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장들이 참 절절하달까요? 아 그런데 저렇게 나이들어서까지 평생을 남자와의 사랑에 나를 소진시켜야 하는건 소설속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에서는 좀 싫을거 같아요. 프랑스 여성작가들이 사랑에 저렇게 절절한건지 아니면 프랑스인들 대다수가 우리보다 좀 더 그런지 그건 궁금하네요. ^^
그래도 콜레트의 저 사랑이야기를 들어보고싶은 마음이 막막 드는 리뷰였습니다. ^^

coolcat329 2023-02-05 11:28   좋아요 0 | URL
프랑스 사람들이 사랑에 좀 진심인 거 같아요 ㅋㅋ 처음엔 책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 힘들었는데 작가의 세련된 필력에 끌려서 다 읽게 되었어요. 영화도 보고 싶어졌네요.

새파랑 2023-02-05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자전적인 느낌이 확 드네요 ㅋ
문장들이 완전 제 취향이긴한데
어려워보이긴 합니다 ㅡㅡ
역시 고전은 쿨캣님~!!!

coolcat329 2023-02-05 13:57   좋아요 1 | URL
자전적 소설이지만 모든게 다 사실은 아니에요. 어머니 편지도 각색했고 연하남도 실제 인물은 아닙니다.
근데 작가가 실제로 연하남과 연애를 많이 해 본 고수라 흥미롭습니나. 새파랑님은 프루스트를 읽으신 고수시니 이 책 저보다는 쉽게 읽으실 거에요.

자목련 2023-02-07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랑 뭔가 익숙하다 했더니 제가 읽다가 멈춘 소설이었어요. ㅠ,ㅠ
올해는 완독을 목표로 삼아보겠습니다.

coolcat329 2023-02-07 13:0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첨부터 멈추고 싶었어요.ㅎㅎ 근데 3분의 1 정도 읽고 나니 적응 되더라구요. 자목련님은 충분히 완독하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