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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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1967~)는 영국 런던, 인도 벵골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인도계 미국작가이다. <축복받은 집>은 그녀가 1999년 출간한 첫 소설집으로 그해 오헨리 문학상과 펜/헤밍웨이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단편소설로는 이례적으로 퓰리처상까지 수상했으니, 첫 작품으로 굉장히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이후 <그저 좋은 사람>,<저지대>등을 발표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축복받은 집>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인도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두 편을 제외하고 모두 미국에 사는 인도 이민자들의 삶을 담고 있다. 인도계 작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소설에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미국에 사는 인도 이민자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라히리는 자신의 소설이 '이민자 소설'로 불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글로 쓰기 마련이기에 작품 속 인물들이 인도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미국의 교육을 받고 미국인으로 자란 작가가 자신이 이방인으로서 겪은 삶을 작품으로 보여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인도인들의 문화와 역사는 낯설지만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면 그 낯섦은 익숙함으로 바뀐다. 소통의 어려움과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 공허한 관계는 국적과 인종을 떠나 모든 인간 관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다. 이 소설집 속 9편의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소통의 부재와 이해심 부족, 그로 인한 갈등과 고독의 문제를 다룬다. 미국 이민자로서 겪는 인도인만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 확장된다는 점이 많은 사람들이 <축복받은 집>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아이를 사산한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가슴 속에 지닌 채 서로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일시적인 문제>, '남편도 아이들도 사랑하지 않는,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이미 삶에 대한 사랑을 상실해버린 여인'(p.110)과 역시 아내와 대화 없이 외로운 삶을 살고 있는 관광 안내인 카파시를 통해 끝내 소통할 수 없는 인간 관계를 보여준 <질병 통역사>, 자신의 몸을 따뜻한 온기로 달아 오르게 했던 "당신은 섹시해요"라는 남자(불륜남)의 말이 사실은 상투적이며 공허한 사랑의 밀어였음을 깨닫는 여자의 이야기 <섹시>, 고국 인도를 떠나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한 여인이 겪는 고독과 어려움을, 혼자서도 잘 지내는 11살 미국 소년과 대비해서 심리적으로 잘 보여준 <센 아주머니의 집>,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결혼한 젊은 부부의 갈등과 이해의 어려움을 담은 <축복받은 집>은 인간 관계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 바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두 번째 이야기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에서는 미국에서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세시)의 독립을 위한 내전을 지켜보며 그곳에 두고 온 가족을 걱정하는 피르자다 씨와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인도인 가족의 따뜻한 정이 열 살 소녀의 시선으로 묘사되는데 다 읽고 나면 뭔가 숙연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맨 마지막 작품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었다.

인도인 남성이 인도, 영국을 거쳐 세 번째 대륙인 미국에 정착해 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로 이민자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힘들지만 평범한 삶이 그것을 겪는 개인에게는 달에 가는 것보다 더 큰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다음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데 9편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가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싶다. 


아들이 좌절할 때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네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中 (p.309)


단편 소설집으로 유명한 줌파 라히리의 책을 처음 읽었는데, 9편의 작품이 대체로 다 좋았지만 읽기 전의 기대가 너무나 컸었기에 살짝 그 기대에는 못 미쳤다. 원제는 세 번째 작품 <질병 통역사 Interpreter of Maladies>가 표제작인데, 국내에서는 좀 더 느낌이 좋은 제목인 <축복받은 집>으로 바뀌어 출간되었다. 

인도 이민자들을 주인공으로 인간 관계 속에서 허덕이고 길을 잃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갈등, 그 안에 보이는 작은 희망과 회복을 줌파 라히리만의 매우 차분하고 깔끔한 문체로 그려낸 소설집 <축복받은 집>, 데뷔작이지만 데뷔작 같지 않은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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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1-13 13:0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글 읽어 내려가니 하나하나 다시 생각나요~~
저도 ‘세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 너무 좋았어요. 인용하신 문장도 넘 좋았고요^^
다시 감동이 밀려옵니다~~

coolcat329 2022-01-13 14:15   좋아요 5 | URL
마지막 이야기 정말 감동적이더라구요. 페넬로페님도 좋아하는 이야기군요!

새파랑 2022-01-13 16: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리뷰도 남겼고 좋았었는데 쿨캣님 리뷰 읽으니 조금씩 기억이 나네요~!! 약간 낯선 느낌이 드는 분위기가 좋았어요 ^^ 다시 읽어보고 싶어 지네요~!!

coolcat329 2022-01-13 16:35   좋아요 4 | URL
네~단편은 시간이 지나 다시 읽으면 또 새롭고 좋더라구요~새파랑님은 줌파 라히리 많이 읽으셨죠? 저는 이제서야 읽었네요😚

새파랑 2022-01-13 16:38   좋아요 4 | URL
제가 찾아보니 저도 세권밖에 안읽었더라구요 😅
<그저 좋은 사람>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ㅋ

mini74 2022-01-13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작가분 다른 책들 찾아봤던 기억 납니다. 묘하게 정서가 닮은 거 같아요 ~

coolcat329 2022-01-14 09:34   좋아요 2 | URL
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차분하고 가라앉은 느낌이 인상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