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형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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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은 나의 십대를 생각할 때 첫 번째로 생각나는 물건이다. 내 삶이 너무 단조롭고 무료했던지 나는 추리소설을 읽으며 세상에 대한 어떤 자극과 희열을 느꼈던거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100원, 500원 씩 모아 사들인 추리소설이 얼마나 많았던지 매일 먼지 털고 없어진 책 없나 체크하며 애지중지 아꼈는데, 정신 못차리고 붕 떠서 살던 어느 날 그냥 싹 다 갖다 버렸다.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80권, 모리스 르블랑, 코넌 도일, 엘러리 퀸의 거의 모든 책들, 해문출판사 어린이 용 추리소설 세트 등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80~90년대 스타일의 1500원짜리 책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이 수백 권의 책들을 나의 아이에게 물려주지 못한게 두고두고 한이 된다. 사실 그 책들을 읽었기에 그래도 늦게나마 지금 책을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의미있는 물건인지 모른다. (아,눈물...)

지금은 잘 읽지 않지만 새로 나온 추리,스릴러 소설을 보면 알 수 없는 애정과 설레임을 느끼는건 그 꿈많고 모험을 꿈꾸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근데 세계문학전집에 추리소설이 있음을 작년 초 폴스타프님 리뷰를 읽고 알게 되었다. 바로 희곡 극작가로 유명한 뒤렌마트의 <판사와 형리>이다. 


'뒤렌마트의 소설들은 추리, 또는 탐정소설이라는 전통적 카테고리를 이어받되 그 전형적 도식에 반기를 든 내용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작품이 나오고 10여 년이 지난 뒤부터 문예비평 측에서 각광'(p.296 작품해설)을 받았다고 한다.

이 소설들은 뒤렌마트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절 '밥벌이'를 위해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행히도 큰 인기를 얻어 경제난도 해결해 주었고, 특히 <판사와 형리>같은 경우는 60년 초까지 100만 부를 돌파, '교과서에 채택되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판사와 형리>는 두 편의 중편을 담고 있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콘스탄티노플, 독일에서 '명수사관으로 두각'을 나타내다 1933년 고향 베른으로 돌아온 베르라하 경감이다. 


<판사와 형리>는 1948년 11월 3일, 순찰하던 경찰이 길가에 세워둔 차 안에서 살해당해 죽어있는 슈미트라는 경찰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이 사건은 베르라하에게 위임되고 그는 찬츠라는 형사와 함께 이 사건을 맡게 된다. 단서는 슈미트의 시신이 발견된 범행현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총탄과 슈미트의 포켓 달력에 적혀있던 'G'라는 메모이다. 

근데 이 베르라하 경감은 신통방통하게도 이런 모든 단서가 나오기 전에 상관 루츠 박사의 "누군가 혐의가 느껴지는 대상이 있소?"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네, 용의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츠 박사님."(p.17) 


범행 현장에도 안 가보고 이게 무슨 말인가! 용의자로 염두해 둔 사람이 있다니...

어쨌든 '베르라하가 염두해 둔 용의자는 누구일까?', '어떤 기막힌 추리와 반전이 나올까?' 기대하며 읽는 가운데, 그들은 수사를 진행한다. 

우선 죽은 슈미트 형사가 매주 만나러 갔던 이 'G'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적극적인 찬츠 형사는 이 인물이 가스트만이라는 인물임을 알아낸다. 또한 슈미트는 다른 인물로 위장하여 가스트만의 집을 드나들며 수사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럼 가스트만이 슈미트의 정체를 알아내고 죽였다? 


사실 베르라하는 과거 40년도 지난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때 가스트만과 알던 사이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허름한 술집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이끌려 뜨거운 대화를 나누던 그날을 두 사람은 잊을 수 없다. 그들이 나누던 주제는 '우연'으로 베르라하는 세상을 지배하는 '우연'의 법칙때문에 완전범죄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가스트만은 바로 그 우연이 가져다주는 '인간관계의 뒤얽힌 상태' 때문에 완전범죄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결국 두 사람은 내기를 하게 되고 며칠 후 가스트만은 범죄를 저질러 자신의 범죄를 베르라하가 '입증하지 못하게 하리라'던 그 계획을 실행하고 입증한다. 


이 '우연'이라는 키워드는 이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요 전에 읽었던 뒤렌마트 희곡에도 곳곳에 '우연' 박혀있다. 뒤렌마트는 '인간이 계획적으로 행동할수록 우연은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정말 딱 들어맞는 말이다. 40년간을 집요하게 가스트만을 계획적으로 추적했으나 결말은 결코 베르라하가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혐의>는 <판사와 형리>에서 마지막에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베르라하가 수술을 마치고 회복하는 중 '라이프' 잡지를 읽다가 우연히 강제수용소에서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을 하는 수용소 의사 '넬레'에 대한 기사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친구이자 의사인 훙거토벨은 친구가 그 기사를 내밀자 안색이 창백해지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베르라하는 다음날 묻는다.

베르라하의 집요한 물음에 훙거토벨은 그 의사가 현재 취리히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과거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엠멘베르거라는 인물인거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훙거토벨은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은 전쟁 중 칠레에 있었기에 사진 속의 인물과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고 하고, 경찰 기록에 의하면 사진 속 넬레라는 의사는 45년 함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자살했으니 더 이상 혐의점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베르라하는 한 번 품은 혐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병원 침대에 누워 두뇌로만 추리를 해나가던 베르라하는 자신의 생각과 진실이 일치하는지 입증하기 위해 그 의문의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스스로 입원, 이야기는 위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뒤렌마트의 세계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추리소설의 형식에 색다른 변화를 준 점은 좋았으나, 솔직히 재미면에서는 조금 기대에 못 미쳤다. 그동안 추리소설을 읽은 경험에 의하면 독일 추리소설이 제일 재미가 없었는데, 이것도 독일문학...ㅎㅎㅎ 

독일은 추리소설도 심각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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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16 2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일이란 나라는 뭔가 진지하고 차가운? 그런 느낌이 듭니다. 문학도 그런거 같고 ㅎㅎ 유머가 별로 없는~ 반면 러시아는 맨날 보드카 먹고 책에도 보드카만 나오고 ㅎㅎ

coolcat329 2021-04-16 23:31   좋아요 2 | URL
네~범죄자들도 철학이 있더라구요.ㅋㅋ
좋은 밤 되세요 ~🌛

레삭매냐 2021-04-17 0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저도 뒤렌마트 작가의
책을 한 번 쯤은 만나 보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coolcat329 2021-04-17 09:26   좋아요 2 | URL
네~저는 이번에 희곡 두 편 읽고 그 중 <노부인의 방문>은 연극하면 꼭 보러가야지 생각했어요. 희곡 읽은건 거의 없지만 참 매력있는 거 같아요.

scott 2021-04-17 1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뒤렌마트 희곡자중 ‘노부인의 방문‘을 최고작으로 평가 받으며 독일에서 영화 드라마로도 제작 방영 될 정도에요
연극도 재밌으니 쿨켓님 기회 되신다면 꼭 보세요

coolcat329 2021-04-17 22:55   좋아요 0 | URL
네 그렇잖아도 유툽에서 독일에서 만든 드라마 봤는데 못 알아들어도 웃기고 재밌더라구요. 그거 보니 연극 더 보고 싶어졌어요~~^^

han22598 2021-04-22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붕떠서 살던때 버리신 그 추리소설들.......너무 아깝네요 ㅠㅠ 붕붕 떠나니면 살고 있는 제가 책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같이 슬픔. ㅠㅠ

coolcat329 2021-04-22 07:51   좋아요 0 | URL
제가 원래 좀 잘 버리는 스타일인데..어린 시절 추억을 버린건 참..후회막심입니다.
같이 슬퍼해 주시니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