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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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은 푸시킨이 죽기 1년 전 발표한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러시아 산문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은 예까쩨리나 2세 통치 시절로 그녀는 남편 표뜨르 3세를 폐위시키고 1762년 스스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녀는 독일계의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유럽의 계몽사상을 러시아에 전파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제위에 오르지만, 실제로 그녀의 정치는 자신과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귀족들의 특권은 늘어나는 반면, 농노들은 귀족에 예속, 농노제는 나날이 확대되어 농노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따라서 예까쩨리나 2세 통시 기간 동안 농민들의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반란이 '뿌가쵸프의 반란'(1773~1775)이다.


뿌가쵸프란 인물은 무식한 농부 출신으로 '본의 아니게 탈옥범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중' 민중들의 봉기를 목격하고 스스로 봉기를 일으킨 인물로 자신을 표트르3세로 칭하며 수많은 추종자들을 끌어 모은다. 러시아 군의 요새를 점령, 위세를 떨치며 예까쩨리나 정부를 위협하나 1774년 수보로프 장군에게 크게 패하여 결국 1775년 처형된다. 


<대위의 딸>은 바로 이 '뿌가쵸프 반란'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그리뇨프는 지방 귀족의 아들로 변방 요새로 부임되어 가는 도중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는다. 그때 우연히 한 농부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길을 찾게 된다. 다음날 그리뇨프는 하인 사벨리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안내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토끼가죽 외투를 준다. 농부는 "나리의 은혜는 길이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는데, 이 우연한 만남과 농부의 이 말은 나중에 그리뇨프의 운명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요새에 도착한 그리뇨프는 사령관 미노로프 대위의 가족과 만나고 대위의 딸 마리야와 사랑하게 된다. 이들의 사랑을 질투하는 선임 장교 쉬바브린의 중상모략과 이어지는 결투로 인해 그리뇨프는 부상을 입게 되나 마리야와의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아버지의 결혼 반대, 부모가 축복하지 않는 결혼은 할 수 없다는 마리야, 쉬바브린의 적의 등으로 인해 그는 점점 의욕과 사기를 잃는다. 이런 음울한 시기에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뿌가쵸프의 난'이다.


사실 그리뇨프가 요새로 오기 전에도 근처 현에서 폭동이 일어나 소장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폭동의 무리는 나날이 그 세력이 커져,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고 몇몇 요새는 점령당하는 상황에서 그리뇨프가 있는 벨로고르스끄 요새도 뿌가쵸프의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장한 각오로 폭도들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던 수비군들은 막상 사령관의 "돌격, 나를 따르라!" 라는 외침이 들리자 겁에 질려 꿈쩍도 하지 못한다. 

폭도들에 의해 사령관 부부는 처형되고 영악한 쉬바브린은 반란군 편으로 넘어가고 그리뇨프는 생포되어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 긴박하면서도 중요한 전투 장면이 한 페이지도 안되서 끝나버리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 어떤 것도 기약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지만 푸시킨은 이 무시무시한 순간을 짧고 간결하게 묘사,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가벼운 어조를 유지한다.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뿌가쵸프의 반란은 실제로 매우 잔악하여 그 정당성에 흠집을 내지만 그래도 푸시킨은 러시아 정부의 폭압적인 정치에 반발한 뿌가쵸프를 나쁘게만 그리지 않는다.


이목구비가 번듯한 것이 꽤나 서글서글해 보였고 흉악한 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 모두들 전우처럼 격의 없이 어울렸고 대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공대하는 눈치는 없었다. (...)저마다 자기 자랑을 해대며 의견을 개진했고 또 자유롭게 뿌가쵸프를 반박했다. (p.107,108)


뿌가쵸프의 호감가는 외모와 반란군들이 서로 격의 없이 편하게 대하는 모습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그러나 안일한 러시아 군관료들과 비교되는 부분으로 푸시킨의 상상으로 새롭게 탄생한 뿌가쵸프의 모습이 흥미롭다. 그와 헤어지는 순간에는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가 지휘하는 폭도의 무리에서 그를 떼어 내어 더 늦기 전에 그의 목숨을 구해 주고 싶다는'(p.158) 생각을 하고, 나중에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는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과 함께 어떤 알 수 없는 분노도 느낀다.


예멜랴, 예멜랴! 당신은 어째서 칼 아래 쓰러지지 않았소? 왜 포탄 앞에 몸을 던지지 않았소? 차라리 그랬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p.169)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뿌가쵸프는 나라를 뒤흔든 포악한 폭도에 불과하지만 그리뇨프에게는 자신과 마리야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고, 고마움에 보답할 줄 아는 하나의 인간인 것이다. 역사 속에서는 한낱 폭도에 지나지 않는 뿌가쵸프가 푸시킨의 문학 속에서는 의리를 지키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점은 흥미롭다.


푸시킨은 러시아 정부에 반기를 든 뿌가쵸프를 칭송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쁜 악인으로 그릴 수도 없었던 듯 하다. 가혹한 전제정치에 고통받는 농노들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본인 또한 귀족 출신으로 직접 나서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그가 황실의 감시와 검열을 받는 작가였음을 상기시킨다. 


작품의 뒤로 가면 예까쩨리나 여제가 나오는데, 그녀의 등장은 마치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을 도와주는 동화 속 요정을 연상케 한다. 뿌가쵸프가 흉악함이라고는 없는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그려졌듯이 그녀 또한 '통통하고 혈색 좋은 얼굴'에 '푸른 눈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뿌가쵸프와 예까쩨리나 2세 두 사람 다 자신의 권력을 무섭게 휘두르지만 한편으로는 자비를 베푸는 인간적인 선함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푸시킨은 예까쩨리나 여제와 비천한 폭도 두목 뿌가쵸프에게 동등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시대가 감추고 있는 어떤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역자 석영중 교수의 설명대로 그것은 바로 권력이 지니는 어떤 '허망'함이 아닌가 싶다.  


푸시킨은 정부군과 반란군을 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폭력, 살인은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누가 됐든지 간에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 고문, 살인은 옳지 않음을 이 가벼운 어조의 소설에서 간간히 드러낸다. 


이것이 한때 우리 시대에 일어났음을 돌이켜볼 때,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알렉산드르 황제의 온화한 통치하에 있음을 상기해 볼 때 나는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박애주의적 법규의 확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청년들이여! 만일 나의 이 수기를 읽게 된다면 기억해 주기 바란다. 보다 훌륭하고 항구적인 개혁은 일체의 폭력적 강요를 배제한 풍속의 개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p.85)


강도의 무리가 도처에서 만행을 일삼았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사면해 주기도 했다. 전란의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저 광활한 지역의 상황은 처참했다......신이여 다시는 이렇게 무의미하고 무자비한 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소서! (p.168)


뿌가쵸프만이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압하는 러시아 군대도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한 점을 지적한다.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비천한 농부에게 건네 준 토끼가죽 코트가 그리뇨프의 목숨을 구했듯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억압과 폭력이 아닌 인간이 품고 있는 선량함이라는 것을 푸시킨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로써 푸시킨의 소설은 <벨킨 이야기>, <예브게니 오네긴>과 함께 총 3권을 읽었다. 푸시킨을 읽으며 한 가지 분명히 드는 생각은 그는 천재라는 것이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뿌쉬낀이 '러시아 산문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전통의 확립에는 실패'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산문은 너무도 시대를 앞서간 나머지 당대 및 후대 작가들의 모방을 불허했기 때문'(p.226)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늘 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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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14 20: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1권 읽어봤는데 리뷰 보니 너무 읽고 싶어지네요 ㅎ

coolcat329 2021-03-15 07:38   좋아요 1 | URL
책이 그렇게 두껍지 않아서 금방 읽으실 거에요. 부족한 글인데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03-19 1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오래 전에 푸시킨의 소설을
읽고도, 푸시킨이 소설도 썼나?
했다니 고저 무식의 소치입니다.

coolcat329 2021-03-19 15:00   좋아요 1 | URL
그쵸? 레삭님 대위의 딸 리뷰 2010년에 쓰셨더라고요. ㅎ 잊어버리실만도 한 세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