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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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생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14살 때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1년 동안 처참한 경험을 하고 2차 대전이 끝나면서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이 소설은 작가의 그런 경험을 담은 책으로 13년 간의 집필 끝에 그의 나이 46세인 1975년에 발표되었다.

 

부다페스트에 사는 14살 소년 죄르지는 유대인 차별 속에서 체펠 섬에 있는 정유회사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죄르지가 타고 있던 버스가 세워지고 버스 안에 있던 유대인들은 강제로 끌려 나온다. 이렇게 색출된 유대인들은 독일로 일하러 가는 줄 알고 열차에 오르는데 이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아우슈비츠이다. 이 소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아우슈비츠로 끌려와 다시 부헨발트를 거쳐 차이츠로 이동,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을 경험한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른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들과는 그 상황을 기술하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매일매일이 죽음과 배고픔, 잔혹한 노동으로 고통스러운 수용소를 죄르지는 15세 소년답지 않게 담담하게 묘사한다. 감정의 동요도 없고 그저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해 나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차량 바닥에서 잔 터라 조금 아팠다. 다른 때도 자주 그랬듯 기차가 멈춰 섰고 사이렌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중략) 새벽녘이라 바깥 공기가 서늘하고 향기도 좋았다.드넓은 들판 위로 회색빛 안개가 드리워 있었다.(중략)나는 일출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름답고 흥미로웠다. (p.85)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로 이동하는 화물열차 안을 '남녀노소가 싸구려 상품들처럼 무자비하게 포개'져 있다고 묘사한다. 추위와 갈증,구타로 절망을 느낄 수도 없었다고 하는 그 상황을 죄르지는 바닥에서 자서 '조금아팠다'고 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일출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레비가 수용소로 이동하면서 나흘 동안 물을 못마시고 극심한 갈증 상태로 도착한 곳에서 (마시지 말라는)수도꼭지를 발견, 물을 마시지만 이내 뱉고 마는데, 죄르지는 '이렇게 맛있는 물을 마신 적은 없었다'(p.101)고 말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원제는 '운명없음'이다.
잔혹한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작가가 운명이란 없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죄르지에게 이웃 노인들은 끔찍했던 기억들을 다 잊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죄르지는 왜 잊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인데 내 기억에 대고 명령을 할 수는 없다'(p.278)고 항변한다.

 

"특히 저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p.278)

 

놀라운 말이다.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니...

작가는 이 말을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악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모두가 크고 작게 연관되어 일어난 범죄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거 같다. 죄르지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착오이고 우연이고 일종의 탈선이었다고 말하는 것을'(p.281) 견딜 수 없다. 광기어린 악이 자신 앞에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것과 함께 갔다'(p.279)고 말하는 점이 그렇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를 선고 받은 존재'라고 했다.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모든 선택과 책임은 내가 지겠다'는 자세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자는 운명에 지배당하는 것일테고, 후자는 나 '자신이 곧 운명'이 되는 것이리라.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다. 그런데 만약 반대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p.282)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논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나는 잘 안다. (p.284)

 

 

죄르지는 '그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었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 냈다'(p.281) 고, '나의 운명 속에서 끝까지 정직하게 걸어왔'고,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p.284)고 말한다.

나치의 만행이 유대인의 운명이었다고 체념하고, 다시 살아가기 위해 잊는다면 홀로코스트와 같은 악은 언제든지 다시 인간 세상에 출현할 것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거 같다. 그래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논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 소설의 마지막은 나를 숙연케 한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p.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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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17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마 이 책을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구해서 가지고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읽었나 안 읽었나. 하도 오래 전
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coolcat329 2020-12-17 15:36   좋아요 1 | URL
빨간 표지 맞으시죠? 다른우리 출판. 저 이 책도 같이 비교하면서 읽었는데, 몇 군데 이해 안가는 문장 도움이 됐어요. 레삭님은 읽으셨을거에요~^^

Falstaff 2020-12-17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케르테스는.... 낯설고 어렵더라고요. 거의 모든 작품이 그런데 그중 편안한 게 <운명>아니었나 싶습니다.

coolcat329 2020-12-17 15:39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폴님의 <좌절>리뷰 읽고 ‘아, 이건 좀 어렵겠다...‘ 생각했답니다.🤭

han22598 2020-12-18 0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좋네요 ^^ 어쩌면 세상은 계속되는 홀로코스트 같은 악이 진행중일지도... 요란하지도 하지만 무심코 지나칠수 없는 운명같은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이 책은 정말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

coolcat329 2020-12-18 11:56   좋아요 1 | URL
제가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으나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네요. 부끄러운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