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권력에 의해 조작된 여러 가지 비인권적인 간첩 사건들은 무수히 많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건의 하나로 중국 공산당의 민생단 사건이 있다.

저자는  거의 무국적자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민생단 사건은 1930년대 전반 동만(東滿)의 한·중연합 항일유격대와 공산주의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사건이다.

수백 명의 한국인 항일투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한국·중국 간의 민족 갈등을 첨예화시켰다.

민생단과 간도협조회의 결성

1932년 3월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동만의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연합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일제는 '간도(間島)에서의 조선인 자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한·중 민족을 분열시키고 항일유격대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할 기관으로 1932년 2월 친일파인 경성 매일신보 부사장인 박석윤(朴錫胤)을 내세워 민생단을 조직했다. 민생단은 비록 5개월 만에 해체되었지만 민생단의 스파이들이 항일세력 내에서 '간도 자치'를 내세우며 분열공작을 획책한 결과, 항일 유격근거지 내에서 조선인이면 일단 민생단의 스파이라고 한번쯤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주구 김동한(金東漢)을 중심으로 1934년 9월 간도협조회(間島協助會)가 결성되었다. 김동한은 약 2,000여 명의 귀순자·변절자를 규합한 후, 공작대를 조직해 유격근거지를 파괴하기 위한 분열공작을 전개했다.

반민생단투쟁

간도협조회의 분열공작에 대해 당시 항일유격대세력들은 민생단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한 반민생단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와 항일유격대의 지도직을 차지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배타주의에 빠져 한국인 항일투사의 대부분을 민생단으로 간주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파벌에 물든 일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자신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민생단의 감투를 씌워 반민생단투쟁은 동만일대 공산주의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 커다란 혼란과 위기를 가져왔다. 500여 명의 한국인 항일운동가들이 체포·살해되거나 도망가야 했으며, 많은 하부조직들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이렇게 항일세력 내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다준 반민생단투쟁은 1935년 2월 옌지 현[延吉縣] 다황웨이[大荒威]와 1935년 6월 왕칭 현[汪淸縣] 야오잉거우[腰營溝]에서 잇달아 개최된 동만특위 및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간부회의를 계기로 그 폐해가 시정되기 시작했다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중국의 한민족 말살 사건 - 민생단 사건

조직 확대 후
중공당은 조선족 및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화해의 조치를 잠시 보이게 된다. 중공당은 조선족의 혁명활동을 지원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 중공당의 기본적 임무의 하나라고 선언한다. 그 일환으로 동만 지구당은 조선인 혁명활동을 지원하고 후에 그들이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화 할 수 있도록 공산당 국제에 건의를 하겠다고 발표한다.




이러한 것은, 중공당의 조직개편이 있었으나, 여전히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이 중공당에 친밀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한
예로 보여진다. 조선공산주의자의 일부는 여전히 조선의 독립해방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활동하고 있었고, 이것은 중공당의 입장과는
상치되는 것이다.


 


이에 중공당은 대대적인 숙청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1932년부터 시작된 민생단 사건이다. 민생단 사건의 원인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심대한 것이었다. 민생단으로 낙인찍힌 자는 조사받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하고 하였다.


 


 

맨 처음, 이 사건은 소문에 불과했으나, 후에 당내에 친일 민생단 분자가 있다는 소문과 함께 회오리바람처럼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휩싸이게 한다. 모든 이들이 의심을 받았고, 상황은 문화혁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43명의 간부를 포함해 431명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약 25%)가 일본군이 아닌 중공당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50%에 해당하는 1000여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 중 561명이 구금되거나 당적을 박탈당했다.


 


민생단 사건의 본질은 당내 조선인과 중국인간의 지도력을 둘러싼 투쟁이었지만, 민족문제를 가지고 중국 공산당원들이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31년 만주 사변 후, 일본이 빠르게 중부 만주를 점령하자, 친일 조선인 단체들은 조선인에게 자치를 확대한 정책을 일본이 가지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선전에 불과하였으나, 문제는 일부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중공당의 선언대로, 조선 소비에트창설, 조선인 자치, 간도지역 독립 같은 주제를 동시에 주장하고 있었다는데 있다.


 

 


 

중공당은 이를 친일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특히 왕밍의 노선이 민족해방투쟁보다는 계급투쟁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 노선의 영향을 받은 중공당은 조선인들의 주장을 반당적이고 당을 분열시키는 행동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중공당은 조선족의 민족자결권은 만주에서 일본의 패퇴 후에나 가능하며, 조선족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은 만주의
다른 민족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고, 오직 중국 프롤레타리아가 해방을 성취한 이후에야 조선족도 해방될 수 있고, 동만의 조선인만
해방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만주에서의 중공당의 족속적 성격을 명확히 한 것으로 중국의 영토적 통일에 관한 불양보와 함께, 중공당의
지도적 원칙을 다시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선언적 의미에서도, 중국혁명 우선론을 갈파함으로서, 그리고, 민족자결권을
유보함으로써, 후에 민족구역자치라는 중공당의 입장의 단초가 보인다고 하겠다.


 


최근, 중공당은 민생단 사건의 재조사를 결정하였는데, 아직까지도 이에 관한 문건은 공개가 안된 상태이다. 단지, 우리는 다른 한 당사자인 북한의 김 일성의 회고록을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민생단 사건의 결과, 조선공산주의 운동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일본의 소탕작전으로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 역시 타격을 받아, 1940년대에 들어서는 사실상 만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종언을 고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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